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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딜 (3) (65/200)
  • 빅딜 (3)2022.01.04.

    최일전자의 강남 서초 사옥. 마돈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건물의 최상층으로 향했다. 그녀를 제지하는 이는 한 명도 없었다. 애초에 회장과 약속을 잡고 왔으니까. 띵-. 짧은 신호음과 함께 엘리베이터가 멈춰 섰다. 문이 열리고 마돈나가 내리자, 비서로 보이는 인물이 꾸벅 인사를 하며 그녀를 안내했다. 비서를 따라 오른쪽으로 향하자, 문 하나가 놓여 있었다. 똑똑. “손님 도착하셨습니다.” 비서는 짧은 말을 하고는 다시금 마돈나에게 허리를 접어 인사한 뒤, 자리를 떴다. 그리고 홀로 남은 마돈나. 물론, 온전히 혼자는 아니었다. 그녀의 귀에는 초소형 이어폰이 들어있었으니까. 직접 들여다보지 않고는 알 수 없을 정도로 작은 크기. 이어폰은 최지훈과 연결되어 있었다. 상대방이 하는 말을 최지훈이 듣고, 그의 말을 전하는 게 오늘 마돈나의 역할. “후우.” 임지현은 호흡을 가다듬고 문을 열었다. “오셨습니까?” 예상 밖의 광경에 마돈나는 미간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그녀를 맞이한 건 최일그룹의 총수가 아닌, 다른 남자였으니까. “저는 회장님과 약속을 잡았는데요.” “회장님은 바쁜 일이 있으셔서 제가 대신 나왔습니다.” 남자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마돈나를 소파로 안내했다. “일단 앉으시죠.” -그의 말대로 해. 최지훈의 목소리가 마돈나에게 들려왔다. 임지현은 심기가 불편한 걸 티내며 소파에 앉았다. “비서실장 박성태입니다.” 남자가 먼저 손을 뻗으며 인사했지만. “네.” 통성명을 하는 대신 그녀는 고개만 까딱였다. “너무 실망하지 마십시오. 오늘 대화는 제가 회장님을 대신해서 나온 것이니 결코 무겁지 않으니까요.” -일단 처음 준비한 대로 하자. 마돈나는 최지훈의 지시대로 품에서 사진 세 장을 꺼내 테이블 위로 올렸다. 최일그룹 재벌 3세 구성동과 송하늬가 스킨십을 하는 장면. 구성동이 마약을 한 채 눈이 까뒤집어져 팔에 주삿바늘 자국을 드러내 놓고 반쯤 기절해 있는 모습. 그리고 그가 다른 이들에게 마약을 건네는 모습까지. 물론, 첫 번째는 선명하나, 두 번째와 세 번째 사진은 화질이 좋지 않아 구성동이라고 생각하면 알아볼 수 있지만, 100% 그일 것이라고 확정지을 수는 없었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나요? 통성명 정도는 할 줄 알았는데요.” “그건 이 대화에서 중요하지 않으니까요.” 회장도 없는 마당에, 굳이 돌려 말할 필요는 없었으니까. 어젯밤에 걱정한 것과 달리, 임지현은 여유로운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마치 본인이 마돈나라는 걸 증명하듯 꽤나 도도하고 거만한 얼굴. 박성태 비서실장은 사진을 집어 들고 천천히 살폈다. “흐음…….” 그의 입가에선 불쾌한 숨소리가 새어나왔다. 마돈나가 증거를 들고 있다는 건 예상했겠지만, 꽤나 적나라한 사진이었기에 놀랄 수밖에. 잠시 후, 그는 사진을 툭 던지듯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원하시는 게 뭔지 말씀해 보시죠.” 마돈나는 여유롭게 다리를 꼬고 앉았다. “300억.” “300억이요?” 그는 말도 안 된다는 듯 헛웃음을 쳤다. “인생역전도 유분수지, 무슨 말도 안 되는 금액을 부르십니까?” “그럼 이건 어떨까요?” 마돈나는 여유롭게 소파에 몸을 묻었다. “파나마.” “파나마요?” 비서실장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파나마에 있는 비자금만 넘기시죠.”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건지…….” 그는 처음 듣는다는 듯 모르는 시늉을 했다. 마돈나는 혹시나 비서실장도 모르는 게 아닐까 생각했지만. -워커 스미스. 최지훈은 단호하게 말을 덧붙였다. “워커 스미스.” 마돈나의 목소리에 비서실장의 눈꼬리가 흔들렸다. 김태원 기자가 확인한 최종 계좌. 미국 국적의 ‘워커 스미스’라는 남자를 통해 파나마에 있는 한 계좌로 들어갔다. 그 뒤까지는 추적을 할 수 없었으나, ‘워커 스미스’만으로도 돈의 실체에 대해서는 알고 있다는 걸 증명하는 셈이었으니까. “생각보다 많은 걸 조사하고 오셨군요.” 박성태 비서실장은 표정 관리를 했지만, 당황했다는 건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구성동 사건 묻고, 비자금에 대한 추적까지 사라지면…… 꽤 할 만한 장사 아닌가요?” “글쎄요.” 그는 이내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다시금 사진을 향해 몸을 기울였다. “300억 치고는 사진의 화질이 꽤 흐린 것 같은데요?” “화질이 흐려도 충분히 알아볼 수 있죠. 의상만으로도 같은 날의 구성동이라는 게 증명되는걸요.” “그건 알 수 없죠. 같은 날이라는 건 추정이고, 사진이야 얼마든지 조작할 수 있으니까.” “과연 시민들도 그렇게 생각할까요?” “그들이 뭐라고 씨불이건 간에 상관없습니다.” 박성태 비서실장은 딱 잘라 말했다. “여론을 의식하는 건 정치인들이죠. 저희 같은 기업들이 눈 하나 깜빡할 것 같습니까?” 그는 당당한 목소리로 말을 덧붙였다. “브랜드 이미지? 그딴 건 한두 달이면 회복됩니다. 최일그룹이 괜히 최일그룹이 아니니까요.” 맞는 말이다. 재벌이라는 부와 이미지는 하루 이틀 만에 만들어진 게 아니다. 오랜 세월과 노력에 걸쳐 쌓아 온 만큼, 견고한 성은 쉽게 무너지지 않는 법. 여론이 워낙 크게 일어나 문제가 되더라도 잠깐 머리 숙여 사과하면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아 잊히는 게 대한민국이니까. 물론, 마돈나는 질 생각이 없었다. “구성동은 그렇다 치더라도 비자금 여파는 감당하실 수 있겠습니까?” 이게 핵심이었다. 비자금이 들통 나는 순간, 그 돈은 다시는 가져올 수 없는 돈이 된다. 가져오는 순간, 자신이 부정한 방법으로 부를 쌓았다는 걸 증명하는 셈이니까. 단순히 돈을 잃는 것만이 아니라, 정부에게 찍히는 게 문제다. 재벌급의 회사가 움직일 때는 당연히 100% 깨끗할 수는 없다. 회계 조사, 세무 조사만 한 번 때려도 적지 않은 타격이 있는 건 당연하고. 정말 잘못된다면, 국가 사업을 다시는 딸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이는 곧 재벌이고 뭐고 무너질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지. 허나, 그건 말 그대로 최악의 상황일 때다. 재벌그룹 하나가 무너지면, 국가 경제에도 적지 않은 타격이 온다. 어지간한 상황이 아니면, 국가가 나서서 재벌을 찍어 누르는 일은 거의 없다고 봐야지. 하지만 조심할 필요성은 있었다. 최준석 대통령은 이처럼 기업의 범죄에는 굉장히 예민한 사람이었으니까. “그래서 정확히 얼마를 원하시는 겁니까?” “300억.” 터무니없이 높은 금액에 박성태 비서실장은 언성을 높였다. “파나마에 얼마가 있는지 알고 하는 소리입니까?” “아니까 하는 소리입니다.” 마돈나는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파나마에 있는 돈도 잃고, 아들도 잃고 싶지는 않잖습니까?” 그녀는 냉정하게 말했다. “둘 중 하나라도 살려야죠.” “…….” “혼자서 감당 안 될 것 같은데, 얼른 회장님한테 쪼르르 달려가서 보고하시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알겠습니다.” 박성태 비서실장은 이를 악물고 답했다. “다시 연락드리죠.” 마돈나는 방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감사합니다.” * * * 최일그룹의 회장실. “뭐?!” 커다란 의자에 앉아 있던 구택일 회장은 분노 섞인 언성을 토해냈다. “파나마에 있는 돈을 그년이 어떻게 알아?” “그것까진 잘 모르겠습니다.” 박성태 비서실장은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허나, ‘워커 스미스’라는 이름도 알고 있고, 구체적인 액수까지 알고 있는 걸 보면…… 실체에 꽤나 가까이 접근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제기랄…….” 구택일 회장은 들고 있던 서류를 박성태 비서실장에게 던졌다. “내가 똑바로 처리하라고 했어, 안 했어!” “죄, 죄송합니다.” “파나마에 있는 돈 다 빼려면 얼마나 걸려?” “액수가 워낙 큰지라…… 못해도 나흘은 걸립니다.” “어휴…….” 구택일 회장은 답답함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됐고, 그 여자는 뭐 하는 년인데?” “정확하게는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일단 저에게 보여 준 자료를 토대로 살펴보면, 기자로 추정됩니다.” “기자?” “예. 따로 소속은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프리랜서 기자로 추정 중인데, 확실한 확인을 위해 사람을 붙여 뒀습니다.” “그래. 나오는 대로 보고해.” “알겠습니다.” 구택일 회장은 한숨을 푹 내쉬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성동이 그 자식도 문제야. 내가 증거 남긴 거 있냐고 물어보니까, 없다고 확신하더니만…… 이 정도면 빼도 박도 못하겠구먼.” 그래도 모른다는 생각에 대한당에 로비를 해서 구속되는 상황까지 대비를 한 게 천만다행이었다. “송하늬와 함께 찍힌 사진은 선명하지만, 나머지 사진들은 정확히 얼굴을 확신할 수는 없었습니다.” “혹시 모르잖아. 잡아떼다가 다른 증거라도 나오면 진짜 X되는 거야.” 박성태 비서실장은 입을 떼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게다가 파나마에 있는 돈의 흐름까지 알고 있으면…… 우리 생각보다 더 많은 자료를 들고 있을 수도 있어.” “그러면 돈은 어떻게 할까요? 일단 다 뺄까요? 차라리 미국 네바다주에 있는 돈과 합치는 게 나을 것 같은데…….” “그래. 거기 있어 봤자, 더 추적당하기 쉬울 수도…….” 구택일 회장은 말하다가 문득 말을 멈췄다. “잠깐만.” 순간, 그의 머리가 냉정하게 식었다. “아니지. 그게 아니지.” “……예?” “돈의 확실한 흐름을 알았으면 내게 접근할 필요가 없잖아.” 파나마에 있는 비자금 300억 전부를 내놓는 제안에 최일그룹이 쉽게 응할 리 없다는 걸 상대방이 모를 리 없다. 즉 여자의 목적은 처음부터 협상이었다는 뜻이란 걸 알아챘다. “그러면 결국…….” 그 여자는 자신이 아들을 아낀다는 걸 알고 움직인 것이다. 아들이 구속되지 않는 게 구택일의 최우선 목적이라는 전제를 깔고 있다는 뜻이지. 물론, 그렇다고 해서 300억을 포기할 작자가 아니란 것도 알고 있다. 즉. 그녀의 접근은 300억을 갖는 게 아니라, 300억의 행방에 대해 자신들이 알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게 목적이었다는 뜻이지. 순간, 그의 입꼬리가 휘어졌다. 구 회장은 고개를 들며 나직한 목소리를 냈다. “박 실장.” “예, 회장님.” “가서 성동이 불러와.” “알겠습니다.” * * * “수고 많았어.” -아닙니다. 도련님이 고생하셨죠. 저는 말씀하신 그대로 옮겼을 뿐입니다. 최일그룹과의 대화는 큰 수난 없이 마무리 되었다. 다만, 회장이 아니라, 비서실장이기에 걱정이 되긴 했지만, 큰 문제는 없을 터. 구택일 회장도 아들을 지키려면 어쩔 수 없이 협조해야 할 테니까. -아, 참. 도련님. “왜?” -당분간은 통화로만 연락해야 될 것 같습니다. “무슨 문제 생겼어?” -아무래도 미행이 붙은 것 같아서요. “언제부터?” -오늘 오는 길에 차 한 대가 따라붙었습니다. 아마 최일그룹에서 붙인 것 같아요. “알았어. 잠잠해진 것 같으면 그때 다시 보자고.” -예. 당분간 메일과 전화로만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래.” * * * 이튿날. 최일그룹에서는 슬슬 똥줄이 탈 테니, 오늘내일 중으로 비자금을 움직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면 국정원에서 발견하고 내게 연락이 오겠지. 홀가분하게 생각하고 집을 나서려 했지만, 충격적인 소식이 발목을 잡았다. 신문엔 예상치도 못한 내용이 1면에 대문짝만 하게 붙었다. -최일그룹 재벌 3세 구모 씨, 검찰에 자진 출석…… 마약 투약 혐의 인정 및 자백! “하.” 이런 X발. 제대로 엿 먹었다. 아들이 아니라, 돈을 택하겠다. 이거지?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그렇지. 이 정도는 되어야 재벌이지. 재미있다. 이게 이상과 다른 진짜 현실이라는 뜻이지. 300억. 어차피 내 돈은 아니었으니, 얻지 못해도 괜찮은 돈이다. 허나, 나를 엿 먹인 걸 모른 척 넘어갈 수는 없지. 그래. 어디 한번 2라운드 가 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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