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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가리면 (3) (61/200)
  • 눈을 가리면 (3)2021.12.31.

    순식간에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워낙 급하게 여론을 돌리려다 보니, 문제가 발생하고 말았다. 가짜 간첩이라니. 인터넷 커뮤니티를 다시 한번 돌아보았지만, 젊은 세대뿐만 아니라, 온 국민이 리정화 간첩 사건으로 난리였다. 없던 것으로 되돌리기엔 이미 늦었다. 차분하게 정리해 보자. 우선 이 간첩은 가짜다. 이 사건으로 국민들의 눈을 돌리려 한 건 사실이나, 거짓이라는 건 알지 못했다. 이러한 진실이 밝혀진다고 한들, 까놓고 말해서 내게 피해는 없다. 이번 사건은 국정원과 검찰에서 합동 수사를 했고. 그 조사 과정이 부실한 탓에 문제가 발생한 것이니까. 내가 확인을 했다고는 하나, 국정원장과 정무수석 또한 한 번 더 체크를 했으니 더욱더 그렇지. 정무수석과 국정원장의 표정을 보면, 아마 그들도 뒤늦게 사건의 진실을 파악한 것일 터. 세세한 사항까지 알 수는 없으니, 이렇게 된 건 국정원 요원들의 잘못일 테니까. 다만, 결과적으로 비난의 화살은 대한당과 아버지에게로 향하겠지. 어쨌든 NLL 순찰정 포격과 연관되어서 정부를 지지하게 만들도록 사건을 터뜨린 것인데, 그게 거짓인 게 밝혀진다면 오히려 국민들의 심리는 ‘배신감’으로 물들 테고, 정부에 대한 신뢰가 떨어질 테니까. 분명 지금까지와는 달리, 대통령인 아버지께 큰 타격이 갈 수밖에 없을 터. 그리고 이번 사건에서 가장 중요한 건, 미래 문자에 나온 시기. 지금으로부터 10년 뒤의 이야기다. 다시 말해 논란이 된 지금부터 10년 동안은 이 사건의 진실이 밝혀지지 않는다는 것. 사실, 10년이라는 시간은 강산이 한 번 변할 만큼 굉장히 긴 시간이다. 즉 문자에 나온 시기에 진실이 밝혀진다면, 아버지와 청와대 그리고 대한당은 크게 타격을 입지 않을 것이다. 잠깐 논란이 될 수는 있으나, 워낙 오래 지난 사건이기에 흐지부지 덮이고 말겠지. 정당의 상황이나 청와대의 형편으로 미루어보아, 모른 척 지나가는 게 맞다. 허나, 문제는 따로 있었다. 장교 4명. 리정화에게 마음을 뺏긴 것도 모자라 돈도 잃고 명예까지 잃어버린 4명의 군인들이었다. 동영상 내용을 되짚어 보면, 그들은 단순히 이용당한 게 아니라, 리정화의 거짓 증언으로 징역을 살고, 빨간 줄이 그이며 불명예 전역까지 당하고 만다. 그리고 10년이 지나서야 진실이 밝혀지지만, 피해자 중 하나는 이미 세상을 뜬 상태라는 걸 생각하면 더 말할 것도 없지. 그들에게 10년은 정말 지옥 같은 삶일 것이다. 장교들의 한을 풀어 주자니, 아버지가 위험해지고. 아버지를 생각해서 외면하려니, 그 장교들의 무고함을 알고도 모른 체하는 몹쓸 짓을 하는 것만 같다. 무고한 피해자까지 보면서 권력을 유지하는 게 과연 옳은 걸까. ……이런 젠장.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 * * 청와대 집무실의 바로 옆에 붙어있는 대통령 비서실. 똑똑. 노크소리와 함께 사무실의 문이 열렸다. “실장님. 정무수석님과 국정원장님 오셨습니다.” “들어오라고 해.” 잠시 후, 고태욱 비서실장의 사무실로 국정원장과 오지태 정무수석이 들어왔다. 그들의 얼굴을 본 고태욱 비서실장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무슨 일인데 그렇게 똥 씹은 표정을 짓고 있어?” “그게 실은…….” 국정원장은 송구스러운 듯 머리를 푹 숙인 채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리정화가 검찰에게 거짓 자백을 했고, 국정원에서 그것을 뒤늦게 파악하여 바로 뛰어왔다는 내용. 그가 설명을 하는 내내 정무수석 또한 죄지은 표정으로 열중쉬어를 한 채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그러니까 정리하면…….” 고태욱 비서실장은 이마를 짚으며 나직이 입을 열었다. “리정화는 간첩이 아니라, 사기꾼이었던 새터민이다. 그리고 그 새빨간 거짓말에 국정원이고 검찰이고 홀라당 넘어갔다, 이거지?” “송구하지만 맞습니다.” “이런 제기랄!” 쾅! 그는 책상을 세게 내리치며 소리쳤다. “너희 새끼들은 정신 안 차리고 뭐한 거야?” 고태욱 비서실장은 사납게 눈매를 찌푸리며 그들을 나무랐지만, 그의 욕지거리에도 정무수석과 국정원장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의전상 서열은 비슷하다고 한들, 실제 지금 정권에서 고태욱 비서실장의 파워는 실질적으로 대통령 다음인 넘버 투라고 봐야 했으니까. “죄송합니다. 워낙 급하게 진행하느라 확인이 부족했습니다.” “후우…….” 고태욱 비서실장은 눈을 감으며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허나, 지금 상황에서 진실을 공개할 수는 없었다. 보궐선거까지는 이제 겨우 서너 달밖에 남지 않았다. 여기서 삐끗하면 민국당에게 기회를 주는 것과 마찬가지. 그들에게 물어뜯을 거리만 주는 것과 다름없었으니까. 게다가 대통령을 보호하는 것이야말로, 비서실장의 가장 주된 업무. 이미 코리안 뉴딜을 포함해 몇 번 대통령에게 적지 않은 타격이 있었다. 지금까지는 방탄총리라 불리는 한석현 국무총리가 대신해서 국민들의 분노를 받아냈다고 하나. 이번에는 국정원이 직속으로 연결되어 있기에 이번 건만은 대통령의 책임을 피할 수 없었다. “이거 사실을 아는 놈이 몇 명이야?” “서부지검장이랑 저희 제외하고는 실무진뿐입니다.” “실무진은 몇 놈인데?” “총 7명입니다.” “7명…….” 그는 사나운 눈빛으로 국정원장을 노려보았다. “확실하게 입단속 시킬 수 있어?” “예. 할 수 있습니다.” 고태욱 비서실장은 결심한 듯 비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거 묻자.” 정무수석과 국정원장은 침을 꿀꺽 삼켰다. “덮어야 돼. 이거 공개되면 큰일 난다.” 언론에 막 공개가 된 시점이라면 모를까, 이제는 이미 퍼질 대로 퍼져서 수습할 수가 없다.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국정원장의 물음에 고태욱 비서실장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거 알려지면 넌 최소 모가지야. 감당할 수 있어?” “……어떻게든 묻겠습니다.” 고태욱은 정무수석을 바라보며 말을 덧붙였다. “너도 한 소리 들을 거야. 대통령 눈 밖에 나고 싶어?” “아닙니다.” 고태욱 비서실장은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최근 들어 청와대가 꽤 뒤숭숭했잖아. 지금은 지지율 올릴 때야. 이럴 때일수록 국민들 단합시켜야지. 안 그래?” “맞습니다.” “그래. 그렇게 진행하는 걸로 해.” “알겠습니다.” 그들은 꾸벅 고개를 숙이며 비서실장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고태욱 비서실장은 유선전화를 들고는 비서실에 바로 지시했다. “지금 바로 서부지검장 들어오라고 해.” * * * 지이잉-. 나는 마돈나의 전화를 받았다. “나야.” -통화 괜찮으세요? “어, 확인해 봤어?” 일단 현 상황부터 알고 움직여야 한다는 생각에 이번 리정화 사건에 대해 조사를 맡겼었다. -사안이 사안인지라, 그쪽에서도 언론에 공개된 자료 외에는 잘 알려 주지 않으려고 하더라고요. 오성복 검사도 중앙지검 소속이라서 자세한 내용까지 파악은 못 했다고 합니다. “아는 것만 일단 말해 봐.” -현재 장교들은 대부분 혐의를 부정하고 있다고 합니다. “대부분?” -4명 중 3명은 혐의를 부정했고, 1명은 인정했다고 합니다. “인정했다고?” 리정화는 간첩이 아니다. 그녀와 교제했던 4명의 장교들에게 씌워진 혐의는 국가보안법 위반. 그중에서도 편의 제공, 불고지 등이 있겠지. 그런데 그들은 무고했다. 리정화가 간첩이 아니니, 당연히 그들이 잘못을 저질렀을 수가 없지. 사실이 아닌데 인정을 했다는 건……. 아마 동영상에서 리정화가 말했던 것처럼, 그들도 수사관들이 형량 거래를 하자고 한 것이겠지. 혐의를 인정을 하지 않으면 오래 징역을 살아야하지만, 인정하고 협조하면 줄여 주겠다는 등의 회유. 그들은 선량하다고 한들, 간첩인 리정화에게 유죄가 인정된다면, 저지르지 않은 간첩의 공범이 되고 말기에 어쩔 수 없이 살 길을 모색한 것이겠지. 이미 리정화가 자신을 도와준 게 그들이라고 말한 이상, 혐의는 쉽게 지울 수 없을 테니까. 게다가 지금 언론과 여론의 상황을 보면, 장교들에 대한 비난 여론도 만만치 않기도 했고. 그들에겐 방법이 없었던 것일 터. “하아…….” 머리가 더욱 아파지기 시작했다. “추세는 어떤데?” -4명의 장교들은 검찰이 아닌, 헌병들과 기무사를 통해 조사를 받고 있는데, 아마 나머지 3명도 결국 혐의를 인정하는 방향으로 진행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혹시 물적 증거나 증인도 나온 건가?” -그것까지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만, 추측컨대 아마 리정화의 자백이 결정적이지 않았나 싶습니다. “일단 알겠어. 고생했어.” -또 필요한 거 있으면 연락 주십시오. “그래.” 나는 전화를 끊고 진지하게 고민에 빠져들었다. 이건 무언가 조치를 취해야만 한다. 6개월 남짓이기는 하나, 나 또한 짧게나마 군대에서 간부 생활을 해 봐서 안다. 군인에게 가장 중요한 건 명예다. 전문하사인 나도 그렇게 느꼈는데 장교들은 오죽하겠는가. 그러니 자신의 명예를 되찾기 위해 10년을 기다리다가 실패하자, 스스로 목숨까지 잃은 것이겠지. 게다가 다른 것도 아니고, 간첩의 공범 혐의다. 군인으로서는 씻을 수 없는 치욕인 것이지. 그렇기에 그들을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허나, 진실을 공개하자면, 청와대와 정부는 꽤나 큰 타격을 받게 된다. 게다가 그걸 터뜨린 게 나라는 걸 알게 되면, 모든 건 되돌릴 수 없게 될 터. 아버지를 위험에 빠뜨렸으니, 당연히 후계 구도에서도 제외되겠지. 최대한 몸을 숨긴다고 해도, 어느 정도 한계가 있는 건 사실이다. 이미 형제들의 시선이 내게 주목되어 있고. 내가 청와대로 옮기자마자 이러한 사건이 터지면 안 된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고태욱 비서실장이 날 눈여겨보고 있다는 사실. 누구에게 말하지 못했지만, 감으로 어느 정도는 이미 파악하고 있다. 여기서 독단적으로 결정하고 움직인다면, 분명 의심을 살 수밖에 없을 터. 애초에 이 사건의 실체에 접근할 수 있는 건, 대한민국에 몇 명 되지 않으니까. 아무리 내가 미래 문자를 통해 알았어도, 처음 이 사건을 정무수석에게 보고한 게 나이기에 용의선상에 오를 수밖에 없는 것이지. 그렇다고 외면할 수는 없었다. 눈을 가린다고 잊을 만한 사안이 아니었으니까. 한참의 고민 끝에 결정을 마친 뒤, 몸을 일으켰다. 지금 상황에선 이게 최선이다. 청와대를 지키고, 아버지와의 결속을 끊지 않는 일. 내가 향한 곳은 청와대 본관. 그곳에서도 아버지의 집무실이 아닌, 비서실이었다. “비서실장님 안에 계십니까?” “예. 전달할 사항 있으세요?” “아니요. 제가 직접 말씀드리겠습니다.” 나는 비서실 직원을 만류하며 직접 사무실 앞에 섰다. “후우.” 심호흡을 몇 번이나 하고 나서야 겨우 문을 두드릴 수 있었다. 똑똑. “들어와.” 고태욱 비서실장의 굵직한 목소리를 들으며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도련님?”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쩐 일로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나는 비장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긴히 말씀드릴 게 있어서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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