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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가리면 (2) (60/200)
  • 눈을 가리면 (2)2021.12.30.

    똑똑. 노크소리와 함께 신혜지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비서관님. 커피 한 잔 드릴까요?” “좋죠.” 신혜지는 머그컵에 따끈한 커피 한 잔을 타 와 가져왔다. 나는 스크롤을 넘기며 그녀에게 물었다. “기사 봤어요?” “아침에 신문으로 봤습니다.” [속보! 남파 간첩 리정화…… 영화처럼 사랑을 이용한 공작원] -국정원에서 긴급 체포 후 수사 중인 남파 간첩 리정화에 대한 조사 내용이 한 기자의 취재로 인해 세상에 밝혀졌다. 리정화는 탈북자로 위장하여 한국에 입국하였으며, 무려 7년 간 국내에서 군사 자료를 중심으로 각종 시설들에 대한 자료를 북송하다가 덜미를 잡혔다. 북한의 직파 간첩을 검거한 것은 최준석 정부 들어 처음 있는 일이다. 리정화는 국정원과 검찰의 합동 수사를 통해 검거되었는데, 당사자는 모든 혐의를 자백하고 수사에 협조를 약속했다고 한다. ……. 한편, 현재 북한에서는 공식적으로 리정화는 간첩이 아니라고 부인하고 있지만, 지금까지 북한은 단 한 번도 간첩의 실체에 대해 인정한 바 없다. -체크일보 홍성택 “어제 비서관님이 올리신 보고서죠?” “맞습니다.” 나는 커피를 홀짝이며 슬쩍 보고서를 들었다. “혜지 씨도 한 번 보실래요?” 그녀는 눈을 빛내며 물었다. “봐도 될까요?” “그럼요.” 나는 책상 위에 있던 종합 보고서를 그녀에게 건넸다. 차마 언론에는 공개하지 못했지만, 내부에서 파악한 자료는 훨씬 더 기가 막혔다. 간첩 리정화는 교제 중인 남자만 무려 4명이었다. 그 4명이 모두 최전방에서 근무하는 장교들. 애초에 군사 기밀을 빼내기 위해 장교들에게 접근한 것일 테지. 보고서에는 세세한 사항도 적혀 있었다. 그녀가 끼고 있는 커플링이 있었는데, 양다리인 걸 들키지 않기 위해 일부러 자신이 반지를 맞추고 똑같은 디자인으로 사이즈만 다르게 남성용으로 4개를 맞춰 교제 중인 남자들에게 건넸다고 한다. 그것만 봐도 얼마나 영악한지 알 수 있었다. 또한, 의심을 피하기 위해 매월 셋째 주 목요일마다 지하철역 물품보관함에 수집한 자료를 넣어두고, 이를 북한 보위부 소속의 공작원이 가져가는 방식으로 정보를 전달했다고 한다. “이런 내용은 처음 보네요.” 신혜지는 신기한 듯 눈을 땡그랗게 뜨며 보고서를 읽어 나갔다. “비서관님은 이런 거 전부 알고 계셨나요?” “저도 생소한 내용입니다.” 일반적으로 간첩과 관련된 내용은 정무수석도 거치지 않고 국정원에서 대통령에게 직통으로 보고한다. 그렇기에 내가 아무리 청와대에서 몇 년을 살았어도 간첩과 관련한 내용은 거의 듣지 못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는 워낙 상황이 특수해서 내가 중간에 확인을 할 수 있었던 것이지. “확실히 옛날보다 발전한 방식인 건 맞는 것 같습니다.” 리정화가 검거된 것처럼, 누군가가 걸렸을 경우를 대비해 서로의 신상을 모르고 활동하는 것만 해도 꽤나 발전되었다고 봐야지. 실제로 리정화는 한국에서의 조력자는 전부 이름을 댔지만, 북한과 연결하는 인물들은 한 명도 이름을 대지 못했다고 한다. 정말 모르는 건지,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건지는 더 조사를 해 봐야 알겠지만. “맞아요.” 신혜지는 눈꼬리를 휘며 말했다. “모스부호로 전보를 치거나, 특별한 통신기기를 사용할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너무 영화를 많이 보셨네.” “그런가요?” 그녀는 볼을 긁으며 수줍게 미소를 지었다. 나는 모니터를 돌리며 넷상 반응을 신혜지에게 보여 주었다. “여론도 상당히 긍정적으로 형성되고 있어요.” 당연한 말이지만, 시민들은 북한에 대해 분개하기 시작했다. 이용당한 장교들이야, 군인으로서 직무를 유기하고 작전을 유출한 것이니 벌 받아 마땅하다고 하나, 사랑이라는 감정에 속아 이용당한 것이라고 봐야 하니까. 스파이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고는 하나,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장난친 것은 비인간적이며 비인륜적이기에 비판 받아 마땅하니까. 덕분에 공산주의에 대해 힐난하는 여론도 더 강하게 형성되기 시작했고. 이번 NLL 순찰정 포격 사건에 대해 대한민국의 대응 사격을 칭찬하는 여론도 형성되고 있었다. 북한에 대한 반감을 키우니 의도했던 대로 정부를 지지하는 의견이 힘을 받을 수밖에. 한편, 민국당에서는 그녀가 진짜 간첩이 맞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있었다. 이미 대중들의 관심이 포격 사건보다도 리정화 간첩 사건으로 쏠리고 있었으니, 이쪽에서 어떻게든 발악해 보려고 하는 것이지. “그나저나 리정화가 훈련받았다고 하는 목록이 굉장히 생소하네요.” “아, 저도 조금 듣고 갸웃거려지더라고요.” 리정화가 북한에서 한국으로 침투하기 전, 815훈련소에서 받았다는 훈련 내용들이 의심스럽긴 했다. ‘육연투척검’, ‘맹독 다트 던지기’, ‘땅굴 파기’ 등 현실에서 정말 쓸모가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으니까. 그 외의 공작비 지급 방식에도 적지 않은 의문이 있었다. 자료를 넘기는 지하철의 물품 보관함을 열어 보면, 늘 그곳에 공작비가 들어 있다고 말했는데, 이런 식으로 지급받는 건 꽤나 옛날 방식이라고 들었으니까. “자세한 건 국정원에서 파악해 주겠죠.” “네. 저도 그럴 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끄덕이며 보고서를 내려 두고는. “궁금했는데 잘 봤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러면 추가로 들어오는 소식 있으면 업데이트 드릴게요.” “네. 쉬어요.” 꾸벅 인사를 하며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신혜지가 나가면서 잠깐 열린 문틈으로 문득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닫힌 문을 열었다. 자신을 따라 나왔다고 생각했는지,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나를 올려다봤다. “필요한 거 있으세요?” “아니요. 방금 지나가신 분 국정원장님 아니세요?” “아, 네. 맞는 것 같아요.” 국정원장이 향한 곳은 정무수석 오지태가 있는 사무실. “꽤나 얼굴이 굳어 있었죠?” “예. 심각해 보이긴 했습니다.” 무슨 일이지? 국정원장이 정무수석실에 오는 일은 드물다. 이번 리정화 간첩 사건 때문에 연관이 있다고는 해도, 표정을 보니 뭔가 심상치 않은데. 한 3분쯤 지났을까. 문이 벌컥 열리며 국정원장과 함께 정무수석이 동시에 빠져나왔다. 이번엔 오지태 정무수석 또한 마찬가지로 굳은 얼굴. 그들은 주변에 눈길도 주지 않은 채, 곧장 여민관을 빠져나갔다. 창문으로 슬쩍 보자, 그들이 향하는 곳은 다름 아닌, 청와대 본관. “아무래도 집무실로 가는 것 같은데요?” 신혜지의 목소리에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무슨 일 있는지 한 번 확인해 봐요.” “알겠습니다.” 다시 사무실로 들어가려는 찰나. 지잉지잉-. 짧게 두 번, 특유의 진동음이 울렸다. 왠지 불길한 느낌. -보낸 이: 33 -동영상. 지금으로부터 10년 뒤의 일. 나는 곧장 문을 닫고 사무실로 들어가 커튼까지 내린 채 책상 앞에 앉아 동영상을 재생했다. -안녕하십니까, 신준민입니다. -리정화입니다. 테이블을 두고 한 명의 아나운서와 남파 간첩 리정화가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마이크가 놓여 있는 걸 보면, 뉴스 혹은 TV 시사 프로그램 같았다. 먼저 입을 연 건 신준민 아나운서. -오늘 양심 고백을 할 게 있으시다고요? -맞습니다. 그녀는 특유의 북한 사투리를 쓰며 말을 시작했다. -10년 전, 저는 남파 간첩이라고 자백하며 언론에 스파이로 알려졌습니다. 하지만 저는 순수한 탈북민일 뿐, 절대 북한의 지령을 받아서 특별한 행동을 했다거나, 한국으로 들어온 이후에 북한과 내통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하지만 리정화 씨는 당시에 모든 혐의를 자백하셨고, 그로 인해 징역도 살다 오신 걸로 확인이 되거든요. -맞습니다. 당시에 첩보가 있어서 구속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래지 않아 무혐의가 밝혀질 예정이었죠. 그런데 당시에 저는 4명의 남자친구와 교제를 했습니다. 양다리를 걸친 거죠. 리정화는 고개를 떨군 채 입을 열었다. -잘못된 행동인 건 인정합니다. 당시 저는 금전적인 도움이 필요했고, 군인이라는 직업의 특성상 자주 만나지 않아도 교제가 가능했기에 그들에게 의지하고자, 접근을 했습니다. -양다리와 허위 간첩 자백이 연관이 있나요? -제가 한창 간첩에 대한 혐의로 조사를 받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그런데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제가 양다리를 걸치고 있다는 걸, 다른 애인 하나가 알게 되었고, 저를 혼인빙자사기죄로 고소하겠다고 하더군요. 그게 무서워서 벌벌 떨고 있는데, 문득 당시에 수사관님이 이야기하셨던 게 떠오른 겁니다. -어떤 거였나요? -계속 잡아떼다가 재판을 가면 무기징역이지만, 솔직하게 자백하고 인정하고, 북한에 대한 정보를 넘기면 형량 조절이 가능하다고. 리정화는 손톱을 뜯으며 말을 이었다. -고민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알아보니, 혼인빙자사기죄는 10년까지 징역을 받을 수 있다더라고요. 하지만 수사관님은 모든 사실을 인정하고 협조하면 3년만 징역을 살아도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어쩔 수 없이 간첩이 되기로 선택을 했습니다. -아…… 그렇게 된 거였군요. -예. 그런 결심을 한 상황에서 제가 살기 위해서는 제 진술의 신빙성을 위해 조력자들을 언급해야 했습니다. -그 목록으로 리정화 씨와 교제했던 남성 장교들의 이름을 댄 거군요? -맞습니다. 또 그래야 제가 혼인빙자사기죄로 잡혀가지 않으니까요. -충격적인 사실이 아닐 수 없네요. 아나운서는 일목요연하게 상황을 정리했다. 그리고는 다시금 리정화를 향해 물었다. -당시 이 사건은 국정원과 서울서부지검이 합동 수사를 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이 사실을 밝히지 못한 두 곳 모두 책임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아마 그들은 알았을 겁니다. 제가 실제 간첩이 아니었다는 걸요. 신준민 아나운서는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큐시트를 본 뒤, 다시 리정화에게 물었다. -꽤나 힘든 결정이셨을 텐데, 양심 고백을 결심하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요? -2년 전, 한 남자가 찾아왔습니다. 제가 당시에 교제했던 4명의 장교 중 한 명이었어요. 그 친구가 말하더군요. 너 때문에 내 인생이 망가졌다. 저 때문에 빨간 줄도 그어졌고, 불명예 전역을 해야 했다. 그걸 듣고 나니, 머리가 띵하더라고요. 내가 몇 명의 인생을 망쳤구나. 그 생각밖에 들지 않았어요. 그녀는 부끄러운 듯 주먹을 꽉 쥐었다. -하지만 두려웠습니다. 저도 이미 3년이라는 형을 살고 나왔고, 또한 제가 밝힌다면 다시금 혼인빙자 사기죄로 잡혀 들어갈 가능성이 있었으니까요. 아나운서는 안경을 올려 쓰며 물었다. -2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뒤에서야 마음이 변하게 된 이유는요? 혼인빙자 사기죄의 공소시효가 10년인데, 법적 처벌을 받는 게 두려우셨던 건가요? -아니요. 그것보다는……. 리정화는 잠깐 고민하나 싶더니, 입술을 달싹이다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어제 장례식에 다녀왔습니다. -장례식이요? -네. 제게 찾아온 그 남자가 결국 자살했다고 하더군요. 아나운서는 당황하며 몸을 들썩였다. -아, 그렇군요……. 그러니까 리정화 씨와 교제하셨던 그 장교분 중 한 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다는 거죠? -예. 혼인빙자 사기죄의 공소시효가 10년인데, 그 시효가 지난 탓에 더 이상 제게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없게 된 것에 낙담하여 타계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리정화 씨는 본인의 거짓 자백으로 피해를 입으신 그분들께 사과하기 위해 방송에 나오길 결정했다, 이렇게 생각해도 될까요? -맞습니다. 하지만 또 그들의 앞에 서는 건 두려워 카메라를 통해 대신 사과하려고 합니다. 또한, 당시에 많은 혼란을 일으킨 점에 대해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서 이 자리에 오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말을 끝으로 영상은 종료되었다. “……이런 미친.” 내 입에선 육성으로 욕이 터져 나왔다. 젠장. 어쩐지 아까 국정원장과 정무수석의 표정이 심각하더라니. 순식간에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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