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큰 그림 (5) (54/200)
  • 큰 그림 (5)2021.12.24.

    -보낸 이: 26 -동영상 오랜만의 미래 문자다. “후우.” 나는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시며 정신을 환기시켰다. 벽에 기대어 선 채 한 장면도 놓치지 않기 위해 눈에 힘을 주고서는 곧바로 영상을 재생했다. 또각또각. 여자의 하이힐 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려왔다. 영상에는 여성의 상체만이 비춰지고 있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은 채 목 아래까지만의 실루엣. 그녀가 입고 있는 정장의 재킷에는 화려한 금배지가 박혀 있었다. 천천히 카메라가 줌 아웃되며 여성이 걷고 있는 배경이 눈에 들어왔다. 창살. 서늘한 회색빛의 쇠창살이 펼쳐져 있다. 단번에 구치소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금배지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합. 잠시 후 그녀는 투명한 유리창을 앞에 두고 앉았다. 창에는 작은 구멍들이 원형으로 동그랗게 뚫려 있었다. 순간, 섬뜩한 기운이 들었다. 혹시 나와 관련된 건가? 지난번에 받은 미래 문자 덕분에 내가 20대에 구치소에 들어가는 일이 생긴다는 걸 알고 있다. 만약 그것과 연관이 있다면, 반드시 알아야만 한다. 입술을 질끈 깨물며 영상에 집중했다. 그제야 화면이 위로 올라가며 여성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놀란 바람에 나도 모르게 움찔하고 말았다. 한유라. 조금 전, 나와 인사를 했던 한유라 보좌관이었다. 그녀가 배지를 달고 있다는 건 국회의원이 되었다는 건데……. 비례대표일지, 지역구일지는 알 수 없다. 지금까지의 한유라를 생각하면 둘 모두 가능성 있으니까. 문제는 그녀가 누구를 만나러 왔느냐인데……. -2741. 면회. 그때, 교도관의 목소리와 함께 유리창 건너로 죄수복을 입은 남성이 걸어 나왔다. “……미친.” 조용히 보려 했지만, 나도 모르게 육성으로 욕이 터져 나오고 말았다. -안녕하세요, 의원님. -오랜만이네. 그도 그럴 것이 죄수복을 입은 남자는 다름 아닌, 이치현 의원이었으니까.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잘 지냈어? 한유라에게 묻는 이치현 의원의 인상은 크게 바뀌어 있었다. 안 그래도 날카로운 인상이던 그의 얼굴은 더 말라서 핼쑥해진 느낌. 피골이 상접해 있다는 말이 절로 떠오를 정도였다. -저는 둘째 치고……. 한유라는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왜 이렇게 야위셨어요? -밥이 잘 안 맞더라고. 내가 콩을 또 싫어하잖아. 그는 힘없이 웃음을 지었다. -사식이라도 넣어 드릴게요. -됐어. 사식은 무슨. 이치현 의원은 물끄러미 한유라의 가슴팍에 달린 금배지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결국 달았네. -의원님 덕분이죠. 의원님께서 물려주신 지역구인걸요. -내가 물려주긴. 자네 힘으로 얻은 건데. -그래도 의원님이 아니었으면 못 왔을 겁니다. -대한당에서 공천을 받았는데 어떻게 내 덕이겠나? 그는 클클대며 말을 이었다. -한 보좌관…… 아니, 이제 한 의원이라고 해야겠네. -아닙니다. 말씀 낮추세요. -그래, 편한 대로 부를게. -네. -와 줘서 고맙다. -아닙니다. 한유라는 울컥한 듯 주먹을 꽉 쥐었지만. -의원님. 이를 악물며 감정을 눌렀다. -제가 어떻게든 의원님 빼내겠습니다. 의원님 결백을 증명할 만한 자료를 찾고 있어요. 조금 시간이 걸릴 수는 있겠지만, 이 금배지를 걸고서라도……. -유라야. 이치현 의원은 지그시 그녀를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네 정치를 해. 난 신경 쓰지 말고. -하지만……. -괜히 나 신경 쓰다가 너까지 문제 생기는 수가 있어. 한유라는 결국 눈시울을 붉히고 말았다. 하지만 고개를 쳐들어 끝내 눈물은 꾹 참아냈다. -여긴 다시 오지 말고. 금배지 단 사람이 오면 괜히 이상한 소문난다. 대한당에서 책잡힐 짓 하지 마. -……. -얼른 알았다고 대답해. 응? 한유라는 차마 못 이기고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얼른 가 봐. 나도 안에서 할 일이 있어. 한유라는 자리에서 일어나 깍듯하게 허리를 접었다. 그리고는 이치현을 뒤로하고 주차장으로 향했다. 여기서 영상이 끝나는 듯했다. 그런데. -어, 나야. 자신의 차에 오른 한유라는 눈물을 흘릴 뻔했던 기색을 순식간에 지워내고 냉소적으로 돌변했다. -확보했어? 그녀는 생전 본 적 없는 조소를 지으며 거칠게 시동을 걸었다. -폐기해 버려. 어. 그래야 이치현이 구치소에서 못 나오지. 한유라는 차갑게 지시를 내렸다. -처리하고 증거 사진 찍어서 보내. 그 말을 끝으로 동영상이 종료되었다. “……X발. 이게 뭐야?” 순식간에 술이 확 깼다. 저 여자가 내가 알고 있던 한유라가 맞다고? 문득 고개를 들자, 저 멀리 한유라 보좌관이 골목길로 꺾으며 시야에서 사라졌다.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대체 내가 뭘 본 거야.” 이치현을 배신한 건가? 그럴 가능성이 굉장히 높다. 대화 내용으로 보아, 한유라는 이치현 의원의 지역구. 즉 경기도 화성시 을을 기반으로 출마했고, 당선되었다. 거기서 중요한 건 기존의 민국당이 아닌, 대한당에게 공천을 받았다는 것. 앞으로 4년 뒤 일어날 일이다. 정치권 바닥이 아무리 한 치 앞도 예견할 수 없다고 하나, 이건 현재의 흐름과 너무나도 달랐다. 게다가 한유라의 배신이라니. 전혀 그런 낌새도, 기세도 없었는데……. 굉장히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금배지는 사람을 얼마든지 바꿀 수 있는 물건. 그렇기에 마냥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지만, 충격적인 건 사실이었다. 일단 확실한 건 이치현 의원이 구치소에 들어간다는 걸 보면, 무언가 일이 터지긴 터진 모양. 대한당에서 이치현 의원을 공격하려 한다는 건 알지만, 그 수위가 상상 이상인 듯했다. 아무래도 아버지께서 나를 청와대로 부른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겠지. 이치현 의원이 구속될 정도라면, 의원실에 있는 내가 타격을 받지 않을 수가 없을 테니까. 아마 한유라도 그러한 이유로 살아남기 위해 대한당으로 적(籍)을 옮긴 것일 테고. 이 정도의 흐름이라면, 내가 물결을 거스를 순 없을 것이다. 이미 형제들의 시선에 든 상태에서 이치현 의원을 구하려다가는 나까지 급류에 휘말릴 수도 있을 테니까. 웅크린 채 주시하면서 천천히 기다려야만 한다. 문득 주머니에 넣어 둔 USB가 손에 잡혔다. 원래 한유라가 저런 사람인 건지, 아니면 정치가 사람을 변하게 한 건지는 알 수 없다. 그래서일까. 문득 둘째 형이 떠올랐다. 겉으로는 올바르고 정직해 보이지만, 실체는 그 누구보다 악마 같은 인간. 한유라가 그 정도는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 * * 서울중앙지방법원의 한 법정. 그곳에선 대통령의 둘째 아들, 최지원 판사가 근엄한 얼굴로 판사석에 앉아 있었다. “너희들 학교에서 유명한 일진이네?” “아닙니다.” “선생님이 보기엔 어떻게 생각하세요?” 증인석에 나와 있는 담임이라는 작자는 입에 침도 바르지 않은 채 거짓말을 내뱉었다. “제가 보기엔 일진이 아닙니다.” “저 녀석들이 같은 반 학우를 상습적으로 때리고 돈을 뺏었는데 일진이 아니라고요?” “저희가 확인했을 땐 친구 사이로…….” 최지원 판사는 눈을 부릅뜨며 언성을 높였다. “친구들 증언으로 나온 것만 총 58회. 현금만 800만 원을 빼앗아 갔어요. 17살. 고등학교에 입학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아 이런 일이 일어났는데 이게 평범한 친구 사이라는 게 말이 됩니까!” 그는 주먹을 꽉 쥐며 외쳤다. “애가 20층 아파트에서 뛰어내려서 죽었어. 그런데 반성은 안하고, 선생님들이랑 친구들한테 탄원서 써 달라고 부탁이나 하고 있어?” 최지원 판사는 손에 들고 있던 탄원서를 그대로 내던져 허공에 흩뿌렸다. “선생님은 대체 뭐 하신 겁니까? 이런 짓이나 하라고 나라에서 월급 주는 게 아닙니다. 교실에서 선생님이 직접 탄원서를 돌린 게 말이 돼요?” “…….” “애들 공부 잘 시키는 게 다가 아닙니다. 저 친구 전교 1등이고, 잘사는 집안이라서 자소서 꽉 채워서 한국대 준비한다. 그래서 생기부에 문제가 생기면 안 된다. 그게 할 말입니까?” 지적받은 선생은 고개를 푹 숙였다. “선생님은 애들을 올바른 길로 이끌어야 할 의무가 있어요. 그래야 선생인 겁니다.” “현실적으로 어쩔 수가 없습니다, 판사님.” “어쩔 수가 없긴, 뭐가 없습니까!” 그 와중에도 가해자들은 반성하는 대신 고개를 푹 숙인 채 저들끼리 손가락 장난을 하고 있었다. “이건 자살 아니야. 너희가 죽인 거야.” 그제야 학부모들이 일어나 다급하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판사님. 저희가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똑바로 가르치겠습니다.” 그 학부모들의 옷은 명품으로 휘감겨 있었다. 안 봐도 뻔했다. 선생들한테는 촌지를 찔러 줘서 법원까지 나오게 하여 학생을 좋게 포장하고 있었고. 학우들에게는 뭐라도 사 주며 탄원서를 써 달라고 부탁했겠지. “힘 있는 놈들은 살아남고! 힘없는 자들은 도태되고! 이게 대한민국이 말하는 현실입니까?!” 최지원 판사는 버럭 호통을 쳤다. “현실이 그렇더라도, 학교는 그러면 안 되죠. 적어도 학생에게 평등을 가르치고 올바른 관념을 가진 채 사회로 나아갈 수 있도록 보여 줘야 하는 게 학교 아닙니까?” 그는 용서할 수 없었다. 정의를 바로세우기 위해 판결문을 낭독했다. “……하다. 죄질이 악하고 반성하는 태도 또한 부족하다. 검찰이 기소한 살인죄를 인정하여 무기징역에 처해야 하나, 소년법 제 59조에 의거하여 15년 유기징역에 처한다.” 청소년만 아니었다면, 무기징역이나 사형을 때리고 싶었지만, 이게 대한민국의 현실이었다. 그러나 한 학생이 자살을 했는데 그들은 15년형도 많다고 생각했는지 그들은 다급하게 외쳤다. “판사님. 죄송합니다.”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 한 번만…….” 그러나 최지원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형을 확정한 뒤, 법정을 빠져나왔다. 그는 본인의 사무실로 돌아와 숨을 돌리며 머리를 식혔다. “후우…….” 최지원 판사의 감정이 채 식기도 전에. 똑똑. 노크소리와 함께 그의 심복 김 실장이 들어왔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아니야. 뭔데?” 그는 판사복을 벗으며 물었다. “최 실장 관련 건입니다.” 그의 이름에 최지원 판사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송병준 의원과의 커넥션의 책임을 지게 한 뒤, 연탄 자살로 위장시켜 죽인 인물. “그쪽 유가족들이 판사님을 꼭 만나고 싶다고 하는데 어떻게 할까요?” “됐어. 내가 지금 개나 소나 만나고 다니게 생겼어?” 그는 넥타이를 풀며 의자에 몸을 묻었다. “적당히 위로금 주고 끝내.” “알겠습니다.” “쯧. 별 거지 같은 일이 많아, 요즘.” 최지원 판사는 인상을 구겼다. “그리고 대한당 건은 어떻게 됐어?” “말씀하신 대로 대한당 인사들과 함께 만날 수 있는 자리를 마련 중입니다.” “서둘러서 움직여. 첫째 형이 선수 치기 전에 빨리 만나야 되니까.” “알겠습니다. 그런데 요즘 인력이 부족해서…….” “그러면 막내한테 사람 붙였던 거 취소하고, 전부 이쪽으로 모아.”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거기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어. 당분간은 다음 지방 선거에 집중하자고.” “알겠습니다.” * * * “흐음…….” 나는 USB를 만지작거리며 천천히 앞뒤로 살펴보았다. 한유라가 내게 건넨 USB. 평소 같았으면 의심 없이 컴퓨터에 꽂았겠지만, 미래 문자를 보고 나니, 차마 내키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한참을 손에 쥐고 고민하다가 사용하지 않는 노트북을 꺼내 그곳에 꽂았다. 혹시나 모른다는 생각에 청와대에서 사용하는 검사 프로그램을 사용해 봤지만, 다행히 바이러스나 악성 코드는 발견되지 않았다. 추가적인 확인 절차를 끝내고 나서야 그곳에 담긴 파일을 열었다. 정무수석실에는 아버지가 직접 임명한 정무수석을 제외하고 총 3명이 근무를 한다. 정무기획비서관, 정무비서관, 자치발전비서관. 이 중에 내가 정무비서관으로 들어가기에 정무기획비서관과 자치발전비서관의 정보가 적혀 있었다. 검색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그들의 기본적인 프로필부터 시작해서. 경찰들도 알 수 없는 정재계 인사들과의 유착관계. 그것도 아주 세밀하게 적혀 있었다. 자료의 하단에는 추신이라며 작은 글귀가 붙어 있었다. ‘내가 국회에서 일하면서 오랫동안 파악한 자료야. 여기 적은 게 그들의 전부는 아니겠지만, 어느 정도 도움은 될 거야.’ 당연히 한유라가 파악하지 못한 인맥도 있을 터. 그러나 이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이 정도면 단순히 적응하기 쉬운 정도가 아니라, 당당하게 어깨 펴고 다닐 수 있을 테니까. 이 자료를 보면 한유라는 믿을 수 있다. ‘아직까지는’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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