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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그림 (4) (53/200)

큰 그림 (4)2021.12.23.

“이렇게 떠난다니 너무 아쉽네.” “죄송해요. 저도 갑자기 떠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동료들의 말에 나 또한 섭섭한 감정을 드러냈다. “상황이 어쩔 수 없게 되었네요.” 아쉬움은 연기가 아닌, 솔직한 심정이었다. 벌써 반년이다. 이치현 의원실에서 지낸 지 6개월이 넘는 시간동안 이들과 함께 했으니까. 어느새 외투를 챙겨 입고 나온 이치현 의원은 가볍게 웃으며 우리 곁으로 다가왔다. “이대로 끝은 아니잖아. 그렇지?” “맞습니다. 언젠간 또 보겠지요.” “유배 가는 것도 아니고, 좋은 곳으로 가는 건데 우리가 축하해 줘야지.” 그는 내 어깨에 팔을 둘렀다. “마지막이니까 회식할 거야. 오늘은 아무도 빠지는 거 없어. 알지?” “그럼요.” “가자고.” 오늘은 김한나 비서까지 포함해 한 명도 빠짐없이 회식 장소로 향했다. 천천히 걸어서 이동하던 도중, 강선우 보좌관이 문득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최 비서관.” “예, 보좌관님.” “이제 좀 친해지나 했는데, 아쉽네.” “그러게요. 보좌관님이랑 더 가까워지고 싶었는데.” “원래 계획된 거였어?” “아니요. 저도 엊그제 알았습니다. 아버지께서 직접 지시하신 거라서요.” “역시 집안의 힘이 달라.” 그는 씁쓸한 웃음을 삼켰다. 보잘 것 없는 집안에 지방대 출신. 보좌관이 된 것만으로도 개천에서 용 난 남자. 소위 말하는 ‘개룡남’ 소리를 듣는 그였기에 허탈한 감은 없지 않을 것이다. 어쩔 수 없다. 이건 내가 위로하는 게 오히려 그림이 더 이상할 터. “죄송합니다.” “아니야. 사과할 게 뭐가 있어. 세상에 공평한 게 없다는 건 누구보다 우리가 제일 잘 알잖아. 그리고 너는 능력도 되니까 가는 거고. 지방대 출신이랑 수능 만점 출신이랑 비교가 되나?” 강선우 보좌관은 허허롭게 웃음을 터뜨렸다. “까놓고 말해서 나도 이치현 의원님 눈에 안 들었으면 여기까지 올라오지도 못했을 거야.” 그는 슬쩍 앞서가던 무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한유라 보좌관이라면 몰라도 말이야.” 그녀는 명실상부한 능력자였으니까. 명문대 출신에 나름대로 괜찮은 집안. 그래서였는지 강선우 보좌관은 그녀에게 알게 모르게 열등감이 있었던 모양이다. 이 작은 의원실에서도 다양한 사람 군상이 보인다. 강선우 보좌관은 어색해진 걸 느꼈는지, 화제를 전환했다. “청와대로 가면, 계속 거기에 있는 건가? 아니면 다시 돌아오는 건가?” “돌아올 겁니다. 언제일진 모르겠지만.” “그때는 아마 배지 달고 오는 거겠지?” 나는 대답 대신 미소를 지었다. 반드시 그럴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굳이 긍정의 의미를 내보일 필요는 없지. 다음에 올 때는 비례대표와 같은 낙하산이 아니라, 진짜 내 힘으로 지역구를 갖고 국회에 입성할 생각이니까.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재미있게 하세요?” 김한나 비서가 두 손을 허리 뒤로 모은 채 우리에게 다가왔다. “별 이야기 안 했어.” 강선우 보좌관은 방긋 웃으며 물었다. “한나 씨는 계속 국회에 있을 거지?” “저야 당연히 그래야죠.” 이치현 의원이 직접 선택해 특채로 들어온 다른 이들과 달리, 김한나 비서는 공무원 시험을 치고 합격해서 들어온 9급 비서였으니까. “저는 다른 선택지가 없잖아요.” 그녀는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의원실 떠난다고 모른 척하실 거 아니죠?” “그럴 리가요. 언제든 편하게 연락하세요.” “진짜 전화할 거예요.” “그래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사이, 목적지에 도착했다. 오늘 회식 장소는 근처에 있는 돼지갈비 식당. 저쪽 테이블에서는 9급 김한나 비서가 이쪽 테이블에서는 8급 오태용 비서가 땀을 뻘뻘 흘리며 지글지글 고기를 굽기 시작했다. 이치현 의원은 돼지갈비 한 점을 쌈장에 푹 찍어 입에 넣었다. “지훈이는 다음 주에 바로 청와대로 가는 건가?” “아니요. 다음 주는 쉬고 그 다음 주에 갑니다.” “딱 새해부터 가는구나.” “예.” 2021년 새해. 새 출근지에서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을 하면 된다. 국회에 처음 올 때와 달리, 긴장되는 마음은 없었다. 사실, 정치판을 떠난 김치호 비서관을 비롯해 여기 있는 다른 직원들도 대부분 나를 경계하고 견제했던 게 사실이다. 그도 그럴 것이 여기는 민국당 의원실이고, 누가 봐도 낙하산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국회에 있는 짧은 기간 동안 내 능력을 증명했고. 또 청와대에서 일하는 인물들은 전부 다 아버지 사람들이었으니까. 대한당과 대통령을 적대시하는 민국당과는 아예 판도가 다를 수밖에 없다는 뜻이지. 적응하는 건 어렵지 않을 것이다. “저 하나 여쭤 봐도 돼요?” 8급 오태용 비서는 눈을 빛내며 물었다. “말씀하세요.” “청와대로 가시면 대통령님이랑 같이 일하시는 거예요?” “아니요. 아버지는 집무실에서 일하시고, 저는 여민관이라고 실무진들이 있는 곳으로 출근합니다.” “아하. 신기하네요. 청와대는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어서.” 당연한 일이다. 일반인들은 출입이 불가능하기에 건물 이름은 물론, 구조 자체를 모르는 경우가 대다수지. “참, 비서관님.” 그때, 9급 김한나 비서가 내게 물었다. “그러면 여기 오피스텔 빌린 건 어떻게 하시는 거예요?” “한동안 여기서 출퇴근할 것 같습니다. 국회에 들를 일도 가끔 있을 거 같고, 청와대 본채에서 출근하는 건 또 그림이 이상하니까요.” “하긴, 그게 낫겠네요.” “자자, 지훈이 그만 괴롭히고 다들 한잔하자고.” 이치현 의원이 먼저 술잔을 들며 건배사를 외쳤다. “지금까지 고생했고, 앞으로 지훈이가 떠나도 잘하기를 빌자고. 지훈이를 위하여!” “위하여!” 우리는 술잔을 부딪치며 시원하게 들이켰다. 그렇게 부어라, 마셔라 하며 술자리가 무르익고 나서 볼이 벌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할 무렵. “처음 볼 때만 해도 아예 태생이 다를 거라고 생각했어요.” 오태용 비서가 헤헤 웃으며 입을 열었다. “고급 음식만 드시고…… 뭐랄까, 결이 다를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내 술잔을 채워 주었다. “여기서 같이 소주를 기울일 줄이야…….” “어, 맞아. 나도 그랬어.” 강선우 보좌관도 피식 웃으며 동조했다. “라면 같은 거 안 먹을 줄 알았는데, 야근할 때 컵라면 먹는 모습 보고, 다 똑같은 사람이구나 생각했거든.”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다들 저를 어떻게 생각하신 거예요?” “일반인들 인식이 다 이럴걸?” “맞아요, 맞아. 청와대 사람들은 다를 것 같다고요.” “하하핫. 저희도 다 똑같아요.” 우리가 대화를 하는 사이, 이치현 의원은 슬쩍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기다렸다는 듯이 강선우 보좌관이 슬쩍 손가락을 모아 담배를 드는 시늉을 했다. “우린 잠깐 한 대 피우고 올까?” “저는 화장실 좀 먼저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테이블에서 소강상태를 뒤로하고 화장실에 들어가자, 이치현 의원은 자신의 허리춤을 잡은 채 나를 흘긋 바라봤다. “왔어?” “예.” “별로 안 취해 보이네.” “아직까지는 괜찮습니다. 의원님은 어떠십니까?” “나는 살짝 취할 것 같기도 하고.” 그는 부르르 떨고는 세면대로 자리를 옮겼다. 손을 씻으며 허심탄회하게 입을 열었다. “지훈이 네가 지금 나가는 게 타이밍 상 적절하다고 봐.” “그렇습니까?” “그게 맞지. 얼마 전에 코리안 뉴딜 터뜨린 게 우리 의원실이잖아. 자칫하다간 꼬리 밟힐 수도 있으니까.” 맞는 말이긴 하다. 괜히 남아 있다가 엮이기라도 하면 더 골치가 아파지니까. 이쯤에 이치현 의원실에서 빠져나온다면, 아예 연결고리가 사라지니 의심할 여지도 없어지고. “가서도 잘해.” “네, 의원님. 정말 감사했습니다.” 그는 물기를 털어내며 페이퍼 타월을 몇 장 꺼냈다. 이치현 의원은 손을 닦나 싶더니, 무심하게 입을 열었다. “난 아마 이번이 마지막일 거야.” “예?” “대한당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 뭐라 대꾸할 수가 없었다. 의한회와 우태직 의원에게 들어서 나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으니까. 걱정은 했지만, 그도 슬슬 체감하기 시작하는 모양이었다. “어떻게 2선까지는 했는데…… 3선은 영 어렵네.” “제가 도울 수 있으면 돕겠습니다.” “됐어, 돕기는 무슨.” 그는 피식 웃고는 나를 바라봤다. “지훈아.” 이치현 의원은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네 아버지와 굉장히 가까웠던 것 알지?”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검사셨던 시절부터 오른팔과 같은 인물이었으니까. 아마 같은 길을 걸었다면, 지금의 비서실장 자리는 고태욱이 아니라, 이치현이 차지하고 있었을 테지. “너는 각하와 다를 거라고 믿는다.” 그는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는 못 하더라도 너는 할 수 있을 거야.” 이치현 의원은 내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격려했다. “기대하고 있을게.” 뭐라 말할 수 없었다. 이치현 의원이 무엇을 말하는지도 알고. 나 또한 비슷한 생각이었으니까. 허나, 그걸 내 입으로 뱉을 순 없었다. “가자.” 이치현 의원은 나와 함께 테이블로 돌아갔다. * * * 새벽 2시. 자정이 되기도 전에 이치현 의원을 먼저 보내고 보좌진들끼리 한참을 달렸다. 누구 하나 빠짐없이 얼굴에 취기가 올라 있었다. 그리고 나 또한 거나하게 취해 있었다. “자, 3차는 어디로 갈까?” “저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들어가려고?” “예. 더 마시면 실수할 것 같아서요.” 강선우 보좌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는 청와대 가니까 우리랑 같이 놀기 싫다 이거지?” “어유, 아닙니다.” “하하하, 농담이야.” 그는 클클 대며 웃고는 손을 휘휘 저었다. “얼른 들어가 봐.” “오늘 즐거웠습니다.” “종종 놀러오고.” “예.” “조심히 가세요, 비서관님.” “들어가세요.” “멀리 안 나간다.” “가 보겠습니다.” 강선우 보좌관은 오태용 비서와 함께 걸음을 옮겼다. “3차는 가볍게 치맥 한잔할까?” “좋죠.” 그때, 광석현 비서가 이쪽을 바라보며 물었다. “한 보좌관님은 안 오십니까?” “잠깐 이야기 좀 하다 갈게.” 강선우 보좌관이 큼지막하게 외쳤다. “우리 요 앞에 호프집 갈 거야. 왕할머니네. 거기로 와.” “알겠습니다.” 모두가 떠나고 한유라 보좌관만이 남았다. 나는 슬쩍 어깨를 으쓱이며 물었다. “무슨 하실 말씀 있으십니까?” “특별한 건 아니고.” 그녀는 주머니에서 USB 하나를 꺼내 내게 건넸다. “이게 뭡니까?” “청와대 들어간다고 해서 대충 정리해 봤어.” 한유라 보좌관은 바지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별거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정무수석실 사람들 자료야. 어떤 사람들이고, 누구랑 가까운지.” “……정말입니까?” 놀랐다. 오늘 회식 내내 별로 말이 없기에 내가 의원실을 떠나는 것에 대해 배신감이라도 느낀 게 아닐까 걱정하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녀는 내심 서운한 목소리를 감추지 못하고 말했다. “기죽지 말고 잘하라고.” “감사합니다.” “물어볼 거 있으면 전화해. 그렇다고 매일 전화해서 귀찮게 하면 차단한다.” 술기운 때문인지, 늘 철벽같은 평소와 달리 조금은 다른 이미지가 느껴졌다. “다음에 커피 한 잔 살게요.” “커피로 되겠어? 밥이랑 술 사.” “하하, 알겠습니다.” “그래. 간다.” 그녀는 손을 휘휘 저으며 다른 보좌진들이 사라진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조심히 가십시오.” 나는 오랜만에 깍듯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리고 한유라 보좌관이 멀어질 무렵. 지잉지잉. 짧게 두 번. 특유의 진동음이 울렸다. -보낸 이: 26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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