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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그림 (3) (52/200)

큰 그림 (3)2021.12.22.

“잘 먹었습니다.” 내가 그릇을 치우려 하자. “내버려 둬.” 최은실은 손짓을 하며 나를 막았다. “내가 치울게.” “그래?” “응. 오늘은 내가 정리하고 싶어서.” “그러면 그렇게 해.” 나는 그대로 수저를 내려두고 식탁에서 일어났다. 사실, 치우든 말든 별 관심 없다. 누나가 평소엔 요리조차 안하는 사람이라는 걸 잘 알고 있으니까. 그녀가 사는 집에 가정부만 두 명이라고 들었다. 이것도 전부 아버지께 점수를 따기 위함이겠지. “막내야.” 그때, 아버지께서 나를 불렀다. “예.” 아버지는 말을 잇는 대신 손짓을 하며 자신의 서재로 들어가셨다. 무언가 할 이야기가 있는 모양. 나는 그를 따라 방 안으로 들어왔다. 아버지는 널찍한 의자에 앉으시며 입을 열었다. “국회는 어때?” “할 만합니다. 생각했던 것보다 일도 잘 맞고요.” “그래?” 그는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요즘 다른 이들의 눈에 띄고 있다는 건 알고 있겠지?” 무슨 말을 하려고 불렀나 했더니, 역시나 그 이야기다. “……예.” “밖으로 나도는 직위라 그런 거냐?” 솔직히 말하자면, 그런 감도 없진 않다. 비서관이라는 직급 자체가 국회의원 대신 발로 뛰어야 하는 직군이었으니까. “다음 주부터 정무수석실로 옮겨라.” 나는 잘못 들었나 싶어 되물었다. “……네?” “당분간 청와대 정무수석실로 가 있으라고.” 아버지는 냉정한 목소리로 말을 이으셨다. “민국당에서 배울 건 충분히 배웠지 않느냐?” 나는 책상 밑으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내 자리에 오고 싶다고 했지?” 아버지는 서재 책상 위로 손을 얹었다. “이제부터 청와대에 와서 제대로 배워 보거라. 진짜 정치가 무엇인지.” 청와대 정무수석실. 실제로 대한민국을 움직이고 살필 수 있는 위치. 게다가 국회의원의 뒤에서 그들이 빛나도록 도울 수 있는 직위가 아닌. 진짜 내 이름을 걸고 움직일 수 있는 자리다. “감사합니다.” “당분간은 몸 좀 사리고 있어. 그리고 좀 잠잠해지면…….” 아버지는 나를 보고 눈을 빛냈다. “다음 총선 준비해.” 총선! 누군가의 보좌관이 아닌, 내 이름 석 자를 걸고 국회의사당에 입성하라는 뜻. “나는 돕지 않을게다. 네 손으로 직접 금배지를 얻어내라. 그러면…….” 뒷말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진정한 내 능력을 인정해 주신다는 거겠지. 아버지가 내게 내 주는 첫 번째 시험이다. “알겠습니다.” “그래.” 아버지는 책상 위로 나를 향해 몸을 기울이셨다. “지훈아.” “예, 아버지.” “이 자리에 오를 수 있는 건 단 한 명밖에 없어.” 그는 열렬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너는 단 한 번이라도 정도(正道)에서 어긋나서는 안 된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래.” 아버지는 그제야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가서 지곤이 들어오라고 해라.” “예, 아버지.” 나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서재를 빠져나왔다. 거실로 향하는 길에 마침 베란다에서 담배를 태우고 들어오던 최지곤을 마주치고는. “지곤이 형.” 서재로 손짓했다. “들어오라셔.” “막내부터 순서대로 부르나 보네?” 아마 넷째 형을 제외하고 모두를 부르겠지. “그런가 봐.” 그는 내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는 서재로 들어갔다. 나는 홀로 베란다로 빠져나왔다. 담배는 당기지 않았다. 니코틴이 없어도 머릿속은 여느 때보다도 훨씬 더 맑았다. 청와대 정무수석실이라……. 나를 비서관까지 승급시킨 이치현 의원에게는 미안하지만, 내게는 잘된 일이었다. 안 그래도 형제들이 나를 주목하기 시작한 바람에 최대한 피해야만 했으니까. 의원실을 떠나는 건 아쉽긴 하지만, 사람에겐 타이밍이라는 게 있는 법이다. 지금으로서는 아버지의 말에 따르는 것이 내게 최선의 선택이지. 그리고 또 하나. 문제는 다음 지방 선거다. 서울시장 선거에서 첫째 형과 둘째 형 중 누가 승리하느냐에 따라 앞으로의 미래도 굉장히 크게 흔들리겠지. 아마도 대한당의 공천을 받는 사람이 승자가 될 가능성이 높을 터. 대한당의 많은 의원들과 인맥이 있는 둘째 형이 유력하긴 하지만. 이미 경상북도에서 도지사에 당선되며 힘을 증명한 첫째 형도 만만치 않은 상대라는 건 확실한 사실. 유심히 지켜봐야만 한다. 그리고 그 소용돌이 속에서 내가 캐스팅 보트를 쥐는 것이야 말로 최고의 시나리오겠지. “담배 태우나?” 그때 베란다로 첫째 형이 구수한 사투리를 쓰며 들어왔다. “경상도 사람 다 됐네.” “써야 할 때 쓰는 거지.” 언제 사투리를 썼냐는 듯, 최지만은 태연하게 표준어를 구사하며 베란다 문을 닫았다. 그는 앞주머니에서 담배 한 대를 꺼내 내게 건넸다. “땡큐.” 담배를 한 모금 내뱉자, 베란다 옆을 지나가던 둘째 형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 모습을 본 최지만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지원이 저놈은 너무 샌님이야. 담배도 못 피우고 술도 제대로 못 마시잖아. 주량이 소주 반 병이라 했나?” 누나인 최은실을 제외하고 우리 형제 중 유일하게 담배를 피우지 않는 인물이다. 술도 마실 수만 있다뿐이지, 거의 마시지 않고. “막내야.” 최지만은 능청스레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나랑 한번 손잡아 보는 게 어때?”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되물었다. “무슨 손?” “에이, 모르는 척은.” 그는 능글맞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지곤이는 어차피 나와 함께할 거야.” 예상했던 사안이다. 셋째 형이야 둘째 형에게 대항하기 위해 늘 첫째 형에게 붙었으니까. “내가 아버지 자리 물려받아서 너에게 좋은 자리 하나 줄게.” “무슨 자리?” “장관이든, 비서실장이든 뭐든 간에. 넌 똘똘하니까 뭐든 잘해낼 거 아니야?” 그는 달콤한 문장으로 나를 회유하기 시작했다. “아버지 벌써 일흔하나다. 살면 얼마나 더 사시겠어? 기껏해야 10년이야. 이제 우리가 물려받아야지. 그런데 지원이 저놈이 물려받게 둘 거야? 난 저 녀석 눈 볼 때마다 털이 곤두선다니까. 사백안이야, 사백안.” 최지만은 내게 더 가까이 붙어 목소리를 낮췄다. “지원이가 권좌에 오르면 신났다고 칼춤 출 거야. 너한테 뭐 하나 줄 것 같아? 절대 아니야. 저 녀석은 절대 안 그래. 어렸을 때부터 그랬잖아. 이기적이고 제 것만 챙길 게 뻔해.” 최지원은 다른 형제들과 달랐다. 잠깐 엇나가기도 했던 다른 형들과는 달리 늘 FM이었으니까. “막내야. 너랑 나랑 18살 차이다. 네 전성기 때 난 이미 뒷방 늙은이 될 거라니까. 내가 저기 집무실 따뜻하게 데워 놓다가 때가 되면 너한테 넘겨줄게.” 까놓고 말해서 나쁘지 않은 제안이긴 하다. 그와 나의 나이 차이를 생각하면 충분히 그럴듯하니까. 물론, 내가 그와 손잡을 생각이 없다는 게 문제지만. 나는 도리가 아니라는 듯 되물었다. “셋째 형은 어쩌고? 형이랑 함께 간다며.” “지훈아.” 그는 슬쩍 뒤를 돌아보고 다른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한 뒤 말을 이었다. “걔는 대통령 감이 아냐. 왕후장상의 씨는 따로 있잖아. 너랑 나야.” “…….” “지곤이 좋은 동생이지. 근데 걔가 대통령이 되면 나라가 어지러워져. 국가원수는 똑똑한 사람이 해야 돼. 그 녀석은 다혈질이잖아. 정치에 안 맞아.” “일단 생각은 해 볼게.” 나는 고민하는 척 말했다. “아버지께서 둘 싸움에 끼지 말라는 말씀도 있으셨으니까.” “그래. 천천히 생각해 봐.” 최지만은 이 정도 답변도 흡족스럽다는 듯 입꼬리를 휘었다. “우리 함께 가야지. 형은 길게 가는 거 안 좋아한다. 인생은 짧고 굵어야지. 대한민국 대선은 40대부터잖아. 너 40대에 난 60대야. 그 나이면 은퇴해서 쉬어야지. 안 그래?” 드르륵. 그때 베란다 문이 열리며. “둘이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은밀하게 해?” 어느새 아버지와 이야기를 마쳤는지, 셋째 최지곤이 들어왔다. “별 이야기 안 했어.” “지원이 형 이야기했구나.” 최지곤의 똥촉에 최지만은 걸렸다는 듯 능청스레 받아쳤다. “눈치는 빠르네.” 나는 빠르게 화제를 돌렸다. “아버지랑 무슨 이야기했어?” “별 이야기 안 했어. 형들 잘 도와주라고 그러지.” 그는 오자마자 담배를 꼬나물었다. “아무래도 난 관심도 없나 봐.” “지곤아. 형이 있잖아. 나랑 같이 가면 된다니까?” 최지만은 셋째에게 라이터를 건네며 내게 눈을 찡긋했다. * * * “들어가려고?” “응. 자야지.” 형들과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11시를 훌쩍 넘겼다. 그렇다고 대단한 이야기를 한 것도 아니다. 어머니와 함께 앉아서 과일을 깎아 먹으며 손주가 보고 싶다, 언제 한 번 볼 수 있느냐, 명절에 삼성동 저택에 올 것이냐는 둥 이런저런 사소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으니까. 형들과 누나들은 넷째 형과 나를 제외하고 모두 결혼해서 아이까지 있었지만, 나는 워낙 먼 이야기였기에 슬쩍 빠져나와 방으로 향했다. “지훈아 잘 자라.” “다들 잘 자. 어머니도 안녕히 주무세요.” “그래. 아들 좋은 꿈 꿔.” 나는 방으로 들어와 기지개를 쭉 켜며 침대에 앉았다. “흐아암…….” 그러나 그것도 잠시. 똑똑. 노크소리와 함께 둘째 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훈아. 안 자면 잠깐 들어가도 되니?” “어, 들어와.” 나는 책상에 붙어 있던 의자를 꺼내 그를 앞으로 옮겼다. “네 방에 들어오는 건 엄청 오랜만인 것 같네.” “형은 나 어렸을 때 출가했으니까.” “그렇지.” 그는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리며 의자에 앉았다. “아까 첫째 형이랑 오래 이야기하는 거 봤어.” 굳이 변명하진 않았다. 대충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는 안 봐도 뻔한 내용이었으니까. “지훈아.” 최지원은 진지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지방 선거를 포함해서 앞으로 나를 도우라고는 하진 않을게. 너에게 무언가 바라지도 않을 거야.” 그는 조금 더 합리적인 제안을 건넸다. “대신 첫째 형이 너에게 오퍼를 하면, 나에게 알려 주기만 해라.” “그렇게 되면 나는 첫째 형을 적으로 돌리게 되는데?” “그렇겠지. 그래서 내가 제안할 수 있는 건.” 그는 신중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언젠간 네 부탁을 한 번 들어줄게.” 부탁이라. 사실 구미가 당기지 않는 제안이었다. 믿을 수가 없었으니까. 다른 정치인 같으면, 한 번 도와줬다가 배신을 당했을 때 보복을 하면 되지만. 둘째 형의 입지를 생각하면, 현재의 나는 그에게 무언가 해코지를 할 수는 없다. 결국 입 싹 닦고 모른 척해도 소용없다는 것이지. 남들이 보기엔 둘째 최지원은 정석적인 FM이라 거짓말을 하지 못할 것 같지만. 저런 인간일수록 뒤에서 구린내가 진동하는 법이다. 그러니 이미 대한당 의원들 대다수와 손을 잡았고. 비밀리에 그가 수족처럼 움직이는 인물도 굉장히 많으니까. “지훈아.” “왜?” “아버지 아직 정정하셔.” 그는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그동안 내가 너를 도울 기회가 한 번도 없겠어?” 아버지께서 건강하게 권력을 쥐고 있으시다면, 둘째 형은 쉽게 배신하지 못할 것이다. 그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허나, 지금 당장 그의 손을 잡을 필요는 없었다. “일단 알았어. 생각해 볼게.” “그래, 고맙다.” 최지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쉬어라.” “응.” 나는 문을 닫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둘째 형의 저런 착한 사람 가면도 믿지 않는다. 오랫동안 봐 왔기에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최지원이야말로 우리 형제 중에서 유일하게 겉과 속이 다른 인물이었으니까. 얼마 전, 언론에서 불거졌던 송병준 의원과의 커넥션 의혹을 해소하기 위해 자신의 비서 하나를 연탄 자살시켰던 인물이기도 하고. 오히려 다른 형제들보다도 더욱 위험한 사람이다. 더욱더 경계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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