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그림 (2)2021.12.21.
“우선 잡혀 있는 행사들은 취소하고…….” 지이잉-. 최준석 대통령의 넷째 아들 최지성의 휴대폰에 전화벨이 울렸다. -발신인: 지만이 형님 예상외의 인물에 최지성은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어, 일단 취소하고 있어. 내가 다시 부를게.” “알겠습니다.” 그는 직원을 내보내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어, 지성아. 잘 지내고 있어? 발신인은 최지만, 첫째 형이었다. 그것도 굉장히 사근사근한 목소리. 생전 전화를 걸지 않던 인물이 갑자기 먼저 전화를 걸다니. 최지성은 경계심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답변했다. “나는 뭐 늘 정신없지.” -어유, 그렇겠네. “형님은 어떻게 지내는데?” -난 늘 똑같지. 정치가 뭐 특별한 게 있나. “요즘도 경상도에 있어?” -그럼. 경상북도 도지사인데 여기 있어야지. 최지만은 근황 대화를 나누다가 은근슬쩍 대화를 돌렸다. -그나저나 요즘 엔터 사업 많이 빡세다며. 행사도 못 하잖아. “그렇긴 해. 스케줄도 거의 안 잡히거든.” -그러면 예산 좀 부족하지 않아? 형이 자금줄 좀 끌어다 줄까? 최지성은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갑자기 웬 자금줄이야.” -아니, 내가 우리 동생 도와 주려고 그러는 거지. 피를 나눈 형제끼리 당연히 도와야 되는 거잖아? “……뭐 있으면 좋기야 한데.” -그렇지? 최지만은 기다렸다는 듯이 물었다. -그러면 부탁 하나만 들어줄 수 있어? “뭔데? 혹시나 해서 말하지만, 우리 애들 데리고 정치적인 활동은 절대…….” -아니야, 아니야. 날 어떻게 보고 그래? 정말 사소한 거야. “일단 말해 봐.” -조만간에 청와대에서 가족끼리 식사 한 번 하기로 했잖아? “응. 나도 오라던데.” -올 거지? “가야지. 오랜만에 어머니도 뵙고 할 겸.” -그때 막내한테 하나만 물어봐 줄 수 있어? “지훈이?” -응. 이거만 알아 와 주면 내가 한 5억 정도는 끌어다 줄 수 있거든? 간단한 거야. 5억은 우선 투자 개념으로 해서……. * * * “지만이 형이 엊그제 갑자기 전화가 왔더라고.” 넷째 형 최지성은 목소리를 낮춘 채 이야기를 시작했다. “너랑 내가 친한 걸 아니까 좀 캐 봐 달라고 했거든.” “어떤 건데?” “강…… 뭐더라, 강성현이었나?” “강성철 의원?” “어, 맞아. 강성철.”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강성철 의원이랑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또 오혁철 의원이랑 혹시 무슨 관계가 있는 건지 떠봐 달라고 하더라.” 최지만 이 응큼한 인간.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넷째 형을 시켜? 안 그래도 사업 중이라 돈 때문에 쪼달리고 있는 걸 이용해서? “너 보고 말해 달라는 거 아니니까 오해하지 마. 도와 달라는 것도 아니고.” 최지성은 오해하지 말라는 듯 덧붙였다. “지만이 형이 널 신경 쓰고 있는 것 같으니까 조심하라는 의미로 말한 거야. 형한테 난 안 한다고 했으니까.” 확실히 위험하긴 하다. 최지만이 나를 신경 쓰기 시작했다는 건. 그것도 강성철 의원과 오혁철 의원과의 관계에 대해 물어보기 시작했다는 건. 민국당의 움직임에서 이치현 의원실만이 아니라, 그 중에서도 나를 주시한다는 명백한 증거니까. “고마워. 내가 5억짜리 빚을 졌네.” “그래, 인마.” 넷째 형은 웃으며 내 팔을 툭 쳤다. “그러니까 앞으로 잘해.” 미안한 감이 없진 않았다. 현재 상황에서 넷째 형에게 5억은 적지 않은 돈일 테니까. 그때, 문득 머릿속에 기가 막힌 아이디어가 하나 떠올랐다. 잠깐만. 이거 역으로 이용하면 꽤 괜찮은 그림이 그려질 수도 있겠는데? “형, 내가 또 빚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잖아.” “뭐 어떻게 하려고?” “다음에 연락해서 슬쩍 말해. 돈이 필요해서 어쩔 수 없이 접촉했다고. 그리고 지훈이 통해서 들었는데, 오혁철 의원은 우리 의원실에서 비리 자료를 캐내 가지고 먼저 접촉했고, 강성철 의원은 천선화 때문에 알게 되었다고.”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그걸 사실대로 말해도 돼? 네가 위험해지는 거 아니야?” “아니, 당연히 페이크지.” 오혁철 의원은 사실 크게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강성철 의원. 의한회에 대해서 최지만에게 알릴 생각은 없다. 여기서 중요한 건 천선화 부부가 최지만에게 후원을 한다는 사실. 그런데 내가 천선화에 대해 언급을 해 놓으면 최지만은 천선화 부부가 단순히 자신만을 믿는 게 아니라, 다른 쪽에도 발을 걸치고 있다는 의심을 하게 되는 법. 잔잔한 수면에 작은 돌을 하나 던져 놓는 것이지. 그로 인한 파장은 긴 시간이 흐르면 작은 균열을 만들 수 있을 터. 정치에서 불신이란 게 그토록 무서운 법이니까. 그때 가서 상황에 따라 천선화 부부를 흡수하든지, 아니면 최지만과 힘을 합쳐 천선화 부부를 박살낼 수도 있다. 뭐가 됐든 내게는 이득이다. 천선화 부부를 데려온다면, 의한회를 내 편으로 잠식시키기 좋고. 의한회에서 중심이 사라진다면, 새로운 판을 꾸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니까. “형은 그런 식으로만 전해.” “알겠어.” “그리고 요즘 재정난이 있어서 다음에도 도울 수 있다는 뉘앙스를 풍겨. 노골적으로는 하지 말고.” “나보고 스파이가 되라는 뜻이지?” “중간에서 돈 챙겨서 나쁠 건 없잖아?” 최지성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았다.” “천천히 내려와. 먼저 간다.” 그는 먼저 방을 빠져나갔다. 나는 의자에 앉아 천천히 머리를 식혔다. 우선, 넷째 형이 내 손을 잡은 덕에 판이 괜찮아지긴 했으나, 지방에 있는 최지만이 이러한 의심을 시작했다는 건 좋지 않은 징조임은 분명했다. 물론, 서울에 첩자를 심어 두긴 했겠지만, 그가 의심했다는 건 다른 형제들도 충분히 의심을 하려면 할 수 있다는 뜻이니까. 최근 들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다 보니, 너무 많이 노출이 된 모양. 특히나 얼마 전, 기관사를 구하며 언론에 드러났던 게 치명적이었다. 사실, 정치판에서 내 입지를 키우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노출이 될 수밖에 없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있을 수만은 없다. 그렇더라도 마냥 나쁜 상황은 아니다. 최지만이 넷째 형한테까지 접근했다는 건 그의 자력으로 파악하기가 힘들기에 다른 형제에게 손을 뻗은 것이니까. 스스로 조사한 것만으로는 실체를 파악할 수가 없었던 것이겠지. 그럴 수밖에. 미래 문자는 당연히 그들이 알 리 없고. 마돈나와의 관계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으니까. 그렇더라도 일단은 한동안 조금 사려야겠는데……. 똑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들, 이제 슬슬 내려와.” “예. 지금 내려갈게요.” * * * “어, 지훈이 와 있었네?” “오랜만이다. 잘 지냈어?” “응.” 나는 간단하게 대답하며 식탁 앞에 앉았다. 최지만을 비롯해 다른 형제들도 모두 도착해 식탁에 엉덩이를 붙이고 있었다. 그 중에서 제일 가증스러운 건 최지만. “요즘 유명하더라?” 넷째 형을 통해 뒷조사를 시켜 놓고서는 푸근한 가면을 쓴 채 태연하게 묻고 있다. 나는 적당히 대꾸했다. “뭐, 어쩌다 보니까.” “잘했다, 아들.” 그때 어머니가 입을 여셨다. “시민을 구한 건 잘한 일이야. 하지만 너도 위험했어. 알지?” “……예.” “앞으로는 위험 부담을 지진 마라. 하나뿐인 막둥이 잃고 싶지 않으니까.” “그럴게요, 어머니.” 최은실은 뜨거운 찌개를 밥상으로 옮겨왔다. “찌개 다 됐는데 아버지는 언제 오신대요? 이거 식기 전에 먹어야 맛있는데…….”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문이 열리며 아버지가 들어오셨다. “오셨어요?” 아버지가 등장하자,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 왔구나.” 그는 우리를 스윽 훑어보고는 곧장 식탁의 상석에 앉았다. “밥 먹자.” 아버지가 먼저 숟가락을 들고 나서야 우리도 식사를 시작했다. “아버지. 이것도 드셔 보세요.” 최은실이 슬쩍 집게를 들어 반찬을 아버지의 앞접시로 올려 주었다. “저희 남편이 완도까지 내려가서 직접 사 온 전복이에요. 제가 장을 담갔는데…….”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네 남편은 뭐 하는 놈이길래 수원시의회에서 일한다는 녀석이 완도까지 놀러가?” 아버지는 버럭 호통을 쳤다. “차기 지방 선거에서 수원시장 출마한다며. 정신 안 차려? 안 그래도 조심해야 될 시국에.” “……죄송해요.” “첫째, 둘째, 셋째. 너희도 마찬가지야. 네 짝들도 관리 잘해.” 아버지가 화를 낼 만했다. 얼마 전, 셋째 형의 아내가 백화점에서 명품을 구매하다가 사진을 찍혀 국민이 힘든 시기에 사치를 부린다고 기사에 나기도 했었으니까. “하나같이 내로라하는 집안의 사람들이랑 결혼을 했는데, 어떻게 다들 정신을 못 차려?” 순식간에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그리고 막내.” 아버지는 젓가락까지 놓고 나를 바라보았다. “예, 아버지.” “아무리 혈기왕성한 나이라지만, 네 목숨은 하나야. 아무리 현대 과학이 발달했어도 불구되면 못 고쳐. 조심해.” “알겠습니다.” 어머니는 슬쩍 무언가 말을 하려고 입을 달싹이다가 이내 멈추었다. 아버지가 오시기 전에 나보고 잘했다는 말을 하셨던 걸 생각하면, 위험했어도 잘한 일이었다고 말하려고 하셨던 것일 터. 그러나 아버지의 성격 상 지금 말해 봤자 좋을 게 없기에 말을 꺼내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리고 지만이, 지원이.” “네.” “예.” “너희 둘은 슬슬 차기 서울시장 선거 준비해.” “……서울시장이요?” 첫째의 눈이 휘둥그레졌고. 둘째는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숟가락을 꽉 쥐었다. 아버지는 첫째 최지만을 바라보며 말하셨다. “언제까지고 지방에만 박혀 있을 거야?” “예, 아버지!” 그는 기뻐하며 답했다. “그리고 지원이.” “네.” “아무리 정의가 좋다고 해도, 나라를 이끌려면 국내외 정세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또 정치를 어떻게 하는지 알아야 하지 않겠어?” “맞습니다.” 차기 지방 선거는 2년 뒤. “둘 중 하나가 서울시장에 오르거라.” 아버지의 말씀은 모든 형제에게 다른 느낌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첫째 최지만에게는 일종의 기회였다. 이미 둘째에게 쏠려 있는 판을 뒤집을 수 있는 기회. 그리고 둘째 최지원에게는 시험과 같았다. 아버지가 밀고 있지만, 자신의 자리를 이어받을 수 있다는 최소한의 능력은 증명하라는 시험대. “아버지, 저는요?” 셋째 최지곤은 흔들리는 동공을 부여잡으며 물었다. “저는 어떻게 할까요?” “넌 잠자코 국회에나 있어.” “…….” 셋째에게는 감히 형들의 밥그릇을 탐내지 말라는 엄포였다. “그리고 막내.” “예.” “막내는 낄 생각 말고 한동안 정치 공부나 열심히 해.” 그는 무심하게 말을 덧붙였다. “언젠간 형들 보필해야 되니까.” “알겠습니다.” 나는 피어나오는 웃음을 꾹 삼키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건 내게도 기회였다. 안 그래도 지금 주목이 쏠려 있는 상황에서 나에 대해 쏠린 시선을 다시 돌릴 수 있는 기회. 게다가 첫째 형과 둘째 형은 필시 서울시장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 서로를 잡아먹으려고 들 테지. 본격적으로 둘이 싸우면 서로에게 타격이 갈 수밖에 없다. 뿐만 아니라, 나에 대해 신경을 쓸 여력이 없어질 터. 그들끼리 서로를 신경 쓰다가 힘이 빠지게 되는 것이지. 다시 말하자면. 이건 아버지가 나를 위해 판을 깔아 주신 것이다. “밥 먹자.” 첫째와 둘째는 머릿속으로 지방 선거의 판을 그리며 서로를 견제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셋째 형은 허망하게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사이 아버지는. “많이 먹어라.” 내 숟가락 위에 전복장 한 점을 올려 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