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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략 (6) (44/200)
  • 계략 (6)2021.12.14.

    “일단 공청회는 그러면…….” 광석현의 물음엔 강선우 보좌관이 대신 대답했다. “할 필요 있어? 취소하는 게 낫지.” “아, 그렇겠죠?” “응. 준비하느라 고생 많았는데 조금 아쉽네.” “아닙니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잘 마무리되어서 다행이네요.” “아버님 통해서 다른 면장님들께 알려드려가지고 주민들도 알 수 있도록 전달 좀 부탁드려.” “예, 알겠습니다.” 광석현 비서가 연락을 하러 간 사이, 이치현 의원은 가볍게 웃음을 지으며 주머니에 손을 꽂았다. “이렇게 된 거 오늘 회식이라도 해야 되겠는데?” “좋죠.” “한나야.” 이치현 의원은 9급 김한나 비서를 보며 지시했다. “오늘 퇴근 시간 맞춰서 식당 예약해 둬.” “알겠습니다. 늘 가던 곳으로 하면 될까요?” “그래.” 뒷사정을 아는 이치현 의원을 제외하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탓에 다들 허무하긴 해도 어쨌든 잘 마무리가 되어서 다행이라는 분위기였다. 다들 화기애애한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는 사이, 나는 슬쩍 옥상으로 빠져나왔다. 그리고는 법무부 장관 민종근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최지훈입니다.” 약속한 걸 이행할 시간이다. 오혁철 의원은 내 요구를 들어줬으니, 나 또한 말을 지킬 차례. “오혁철 의원 관련한 수사 모두 종결시켜 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흐으음……. 그의 목소리에서 조금은 심기가 불편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저번과 마찬가지. 내가 요구한 걸 들어줘야 하는 이 상황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았다. -최 비서관. “예, 장관님.” -하나 말해 주자면, 자네가 나와 약속한 건 하나였어. 즉 요구할 수 있는 건 오혁철 의원에 대한 수사를 개시하는 것뿐이었어. 수사를 중지하고 종결하는 건 합의되지 않은 사항이야. “…….” 나도 모르게 안색이 차갑게 굳었다. “들어주지 못하시겠다는 소리입니까?” -들어줄 생각이었는데, 말투를 들으니 별로 당기지 않네. 민종근 법무부 장관이 태클을 걸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가 만약 오혁철 의원에 대한 수사를 다시금 이행한다면, 상황은 골치가 아파진다. 내 카드를 날리는 것은 물론이고, 이치현 의원은 다시금 유류 저장 시설을 떠안을 수밖에 없게 된다. 또한, 천선화를 필두로 하는 의한회를 적으로 돌려야 될 수도 있게 되는 상황. 아버지를 통해 정리하려면 할 수 있겠으나, 이는 분명 내게도 타격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곳에 대한 제보를 최지훈이 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 내가 본격적으로 정치 활동을 하려고 했다는 걸 다른 형제들이 알게 될 테니까. 나는 주먹을 꽉 쥐고 말했다. “수사 다시 진행하실 생각이십니까? 종결하실 생각이십니까? 그것만 말해 주십시오.” 만약 그가 말을 듣지 않는다면, 천선화와 다시 이야기를 해 봐야 한다. -뭐, 일단은……. 그는 인심 쓴다는 말투를 내보였다. -종결시키도록 하지. 다만. 민종근 법무부 장관은 경고하듯 말을 덧붙였다. -내 와이프를 어떻게 구워삶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다음번엔 호락호락하지 않을 거야. 그 말을 듣자마자, 내 입꼬리가 가볍게 휘어졌다. 물론, 통화이기에 그는 보지 못할 터. “이야기 못 들으셨나 보네요.” 나는 여유로운 목소리를 냈다. “이번 건은 일방적인 부탁이 아닌, 거래였습니다.” -……. “저 견제할 시간에 사모님이랑 더 많은 시간을 보내셔야 될 것 같네요.” 천선화에게 전후사정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는 건, 둘이 부부라고는 한들, 모든 걸 공유하지 않는 사이라는 걸 뜻한다. 둘 사이에서 실권을 잡고 있는 게 천선화 차관이라는 걸 아는 이상, 굳이 민종근에게 끌려다닐 필요는 없다. 물론, 그렇다고 굳이 그를 적으로 만들 필요는 없었다. “하나 더 말씀드리자면, 저는 장관님과 한편에 설 겁니다.” 다만, 먼저 발톱을 보였다면, 경고는 해 둘 필요가 있지. “장관님께서 아버지 곁에 꼭 붙어 계실 때까지는 말이죠.” -용무 끝났으면 끊겠네. “예, 고생 많으셨습니다. 빠른 시일 내로 종결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는 대답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민종근 장관은 오래지 않아 사건을 종결시킬 것이다. 천선화와 내가 서로를 공격하지 않는 이상, 민종근 장관은 쉽게 나를 엿먹일 수 없을 테니까.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많은 사람들과 얽히고설키고 있다. 그럼에 따라 자연스레 정계에서 내 보폭이 커지고 있고, 나의 존재감을 느끼는 사람은 점점 더 많아지는 상태. 앞으로는 더욱더 조심스럽게 움직여야만 한다. * * * “고생했다. 우리 보좌진을 위하여!” “위하여!” 이치현 의원의 선창에 우리는 후창을 하며 잔을 높이 들었다. “진짜 예상치도 못하게 해결이 되어서 다행이긴 한데, 조금 놀랍긴 하네요.” 8급 오태용 비서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안주를 집었다. “혹시 저쪽에서 분열이 있었던 걸까요?” “그럴 수도 있지. 대한당이야 워낙 사람이 많아서 자주 혼란이 발생하니까.” 한유라 보좌관은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일단 당분간은 안전할 겁니다. 문제는 그 다음이죠.” “그래, 유라 말이 맞다.” 이치현 의원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맞장구를 쳤다. “대한당에서 이번 건을 끝으로 멈추진 않을 거야. 계속해서 공격해 올 테지.” 물론, 당분간은 공격이 멈출 가능성이 컸다. 대한당에서 느끼기엔 갑자기 오혁철 의원이 노선을 틀어 내부에서 분열이 일어난 것처럼 보일 테니까. 당분간은 현 상황에 대해 조사하고 그걸 수습하고 난 뒤에야 다시 이치현 의원을 공격할 터. “그 사이에 우린 다른 대비책을 세워둬야 해.” 대한당의 움직임을 기민하게 파악하고 미리 수비할 방법을 세워 놔야 이번처럼 휘말리지 않는다. 또한, 우리가 방어 태세를 견고하게 세워 둔다면, 저쪽에서도 쉽게 공격하지 못할 테니까. 사실, 오혁철 의원은 본보기라고 볼 수 있다. 대한당 내에서 조사를 하면, 오혁철 의원은 우리 측의 공격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유류 저장 시설을 자신의 지역구에 가져갔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물론, 오혁철 의원은 그 주체가 ‘나’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이치현 의원이라고 할 테지. 안 그래도 대한당에서 찍힌 상태에서 배신을 한 것과 비슷한 상황이 된 데다가, 마돈나가 내 이름을 언급하지 말라는 협박까지 해 둔 상태. 이미 나에게 목줄까지 잡힌 상태에서 내 이름 석 자를 언급할 배짱은 없을 테지. 애초에 대한당에서 신뢰를 잃었기에 내 이름을 꺼내도 믿어 주지 않을 테기도 하고. 오히려 이치현 의원이 움직였다고 하는 게 신뢰성이 높을 터. 그러면 대한당 쪽에서는 우리를 잘못 건드렸다가는 오혁철 의원처럼 당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섣불리 공격을 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 동안에 내실을 조금 더 다질 수 있고 공격을 대비할 만한 시간을 갖게 되는 것이지. “당분간은 여유 있을 거야. 그동안 확실하게 대비만 해 두자고.” “알겠습니다.” “물론, 그건 내일부터고.” 이치현 의원은 눈썹을 들썩이며 축배를 들었다. “오늘은 마시는 거야.” “예, 의원님.” “건배!” * * * 회식을 끝내고 느지막이 집으로 돌아가는 길. 지이잉-. 낯선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내 개인 휴대폰이 아닌, 2G 휴대폰. 주변을 확인한 뒤, 나는 서둘러 집에 들어간 뒤에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지훈 씨? 휴대폰 너머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 그제야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 기자님이셨군요.” -예, 맞습니다. 김태원 기자였다. 지난번에 한정일보에서 ‘코리안 뉴딜’ 건을 흘렸던 인물. -간만에 전화 드리네요. “네. 어떻게 지내셨어요?” -저는 큰 문제없이 풀려났습니다. 김치호 비서관에게로 책임이 쏠렸어요. 나는 소리 없이 미소를 지었다. “그나저나 어떻게 된 겁니까?” -국정원에서 조사를 받기 직전, 휴대폰을 한강에 던졌어요. 버릴 거라고는 생각했는데 한강이라니. 결단력에 감탄이 새어나왔다. “그래서 저와의 연결고리를 못 찾았나 보네요.” -그렇죠. 애초에 휴대폰만 없으면 연관 지을 수가 없으니까요. “그러면 이 번호는 어떻게 알고 전화하신 겁니까? 메모는 안 해 두셨을 텐데.” 김태원 기자는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외우고 있었습니다. “아.” -이 정도로 중요한 번호는 당연히 외워 둬야죠. “잘하셨습니다.” -바로 연락드리려고 했는데, 며칠 동안 국정원에서 사람을 붙이고 감시를 받았던 탓에 연락하지 못했습니다. “그럴 것 같았습니다. 그쪽에서 쉽게 사람을 놔주는 스타일이 아니니까요.” -미행은 일주일 전에 사라졌는데 혹시 몰라서 조금 더 살펴보다가 완전히 안전해진 걸 확인하고 나서 전화 드린 겁니다. 그리고 이 번호는 저장해 두셔도 될 것 같습니다. 따로 선불폰을 구매했으니 앞으로는 이 번호로 연락하면 될 것 같아요.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러면 늦었는데 얼른 주무십시오. 건수 생기면 연락드리겠습니다. “좋은 밤 되십시오.” 나는 전화를 끊으며 신발을 벗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역시 김태원 기자다. 내가 생각한 것보다 부족하지가 않다니까. 이 정도면 정말 미래 문자에서 본 것처럼 오래도록 함께 가도 되겠어. * * * “흐으음…….” 고태욱 비서실장의 무거운 콧숨소리가 그의 사무실을 가득 채웠다. 그의 책상엔 오혁철 의원의 지역구에 유류 저장 시설이 설치된다는 내용의 보고서가 올려져 있었다. ‘뭔가 이상하단 말이야.’ 민국당의 움직임이 예전과 달라진 느낌이 들었다. 지금까지는 늘 일이 원하는 대로 돌아갔지만, 최근 들어 대한당의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국회의원의 라인업의 변화엔 큰 차이가 없었다. 그런데 요새 들어 상황이 예상과 다르게 돌아가는 경우가 조금씩 생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모든 일에는 이치현 의원이 끼어 있었다. 이치현 의원이라는 사람은 고태욱 비서실장도 잘 알고 있었다. 이치현 의원이 한때 최준석 대통령의 심복이었던 만큼, 고태욱 비서실장도 함께 일한 적이 있었고, 또 따로 조사도 적지 않게 해 왔다. 그렇기에 그의 성격, 심성, 스타일, 능력까지 모두 잘 알고 있었다. 워낙 오래 봐 왔기에 특별히 달라질 사람도 아니었고. 고태욱 비서실장이 아는 이치현 의원은 판을 흔들 만한 힘을 쥐고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게다가 이번엔 오혁철 의원을 공격할 때, 법무부 장관까지 움직였었고. 그에게 직접 들은 바에 의하면, 익명의 제보가 들어와서 움직였다고는 하나, 100% 믿을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또 이치현 의원과 법무부 장관 사이에 연결고리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법무부 장관은 완연한 대한당 사람이었고, 이치현은 절대적인 민국당 사람이었으니까. ‘차근차근 되짚어 보자.’ 그는 다시금 기억을 헤집었다. 이치현 의원의 움직임이 달라진 시기는 올해부터였다. 정확히는 올해 총선에서 당선한 뒤부터. 지난 임기 때와 지금의 임기에서 그의 인맥에 큰 변화는 없었다. ‘보좌진 또한 마찬가지였…… 잠깐만.’ 고태욱 비서실장은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설마 도련님 때문인가?’ 얼추 이치현 의원이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과 시기는 맞아 떨어진다. 하지만 이 모든 상황이 막내 도련님 때문이라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아무리 최지훈의 머리가 비상하고, 청와대의 핏줄이라고 한들, 군대를 전역하자마자 정계에 들어선 인물 한 명의 힘이라기엔 영향력이 너무나도 더 컸으니까. ‘혹시 내가 모르는 다른 카드를 쥐고 있는 건가?’ 그건 알 수 없었지만, 가능성은 높지 않다고 생각했다. 대통령의 최측근인 만큼, 그는 자식들의 행보도 알고 있었으니까. 또한, 국회에 들어가기 전, 최지훈의 행보는 정치와 전혀 관련이 없기도 했고. ‘하지만 내가 알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을 수도 있다.’ 벌써부터 대통령에게 보고할 생각은 없었다. 무언가 특별한 게 있고, 확실한 게 있어야만 대통령께 보고 드리는 게 비서실장의 일이니까. 최준석이 신경 쓸 필요가 없다면, 본인 선에서 확인하고 끊는 게 고태욱의 임무였다. ‘아무래도 조금 더 주시해 봐야겠어.’ 그때,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어, 들어와.” 조심스레 문이 열리며 비서실 직원이 들어왔다. “실장님.” “무슨 일이야?” “이걸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는 인터넷 기사가 떠오른 화면을 켠 태블릿 PC를 고태욱에게 건넸다. -속보) 서울 교통 공사 지하철 노조 파업 단행, 이번 주 수요일부터 지하철 운행 중단……. 고태욱 비서실장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눈썹을 찌푸렸다. “……이거 골치 아파지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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