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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략 (4) (42/200)

계략 (4)2021.12.12.

“하아…….” 오혁철 의원의 고심은 깊어져만 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제2 차장검사의 말을 들어보면, 서울중앙지검장보다 더 높은 사람이 지시를 내렸고, 그에 따라 수사가 시작되었다. 다시 말해 검찰에서 작정하고 자신에 대해 파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그 정도 급에서 움직였다면, 오혁철 의원 본인만의 힘으로는 막을 수 없다. ‘최창식 의원님한테 한번 찾아가 봐?’ 잠깐 고민해 봤으나, 이내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5선 의원이고, 자신들의 무리에서 중심을 맡고 있다고 해도, 지금 상황을 역전시킬 수 있을 만한 힘은 없었으니까. 게다가 지금 상황에서는 섣부르게 움직일 수도 없었다. 서울중앙지검장보다 윗사람이라면, 최소한 대검 차장검사 혹은 검찰총장이다. 그에게 지시를 하거나 혹은 부탁을 할 수 있는 정도의 사람. 절대 오혁철 의원이 혼자서 상대할 수가 없을뿐더러. 애초에 누가 이번 건을 지시했는지를 알 수 없으니 대책을 세우는 것도 불가능한 상태. “후우…….” 시간이 갈수록 늘어가는 건 한숨뿐이었다. 그런데 그때. “의원님!” 다급한 노크 소리와 함께 보좌관이 집무실로 들어왔다. “뭔데?” “제가 아는 기자가 얼마 전에 전상국 의원의 뒤를 쫓았다고 했는데…….” 그는 꿀꺽 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지난주에 전상국 의원이랑 검찰총장이 같이 식사를 했다고 합니다.” “……뭐?” “아무래도 이번 건, 전상국 의원이 꾸민 것 같아요.” 헛발이었다. 그러나 보좌관과 오혁철 의원은 그 사실을 알 리가 없었다. “이런, 제기랄…….” “추가적인 정보는 알게 되면 바로 보고 드리겠습니다.” “그래, 알았어.” 보좌관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집무실에서 빠져나갔다. 오혁철 의원은 깊은 탄식을 내뱉으며 담배 한 개비를 꼬나물었다. 평소엔 집무실에서 잘 피우지 않으나, 오늘은 참을 수가 없었다. 자욱한 연기가 의원실을 채우기 시작했다. 그의 머릿속엔 복잡한 생각이 무성하게 떠올랐다. ‘지금이라도 무릎을 꿇어야 하나…….’ 굴복. 절대 하고 싶지 않은 두 글자였다. 판사 시절, 윗선의 압박으로 양심과 다른 판결을 내린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서 국회의원이 되기로 결심했었다. 금배지를 달게 되면, 누군가에게 머리 숙이는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같은 국회의원이라도 급의 차이는 존재했다. 그럼에도 굴복하지 않으려 했으나, 지금 상황에서는 그렇지 않고서야 답이 없어 보였다. ‘지금이라도 석고대죄를 해?’ 굴복은 꿈에도 하기 싫었으나. 권력을 잃는 건 죽기보다 싫었다. 그의 가슴팍에 달려 있는 금배지는 그 어떤 것보다도 달콤했으니까. 고민은 길어졌다. 오혁철 의원은 몇 번의 고심 끝에 다른 의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상국 의원에게 줄을 섰지만, 여전히 오혁철과는 연락을 하며 친분을 유지하는 인물. -여보세요. “박 의원님. 바쁘십니까?” -괜찮아. 무슨 일이야? 아니, 그것보다 요즘 검찰에서 물었다며. 괜찮은 거야? “그것 때문에 몇 가지 여쭤보려고 전화 드렸습니다. 혹시 조금 아시는 사실 없나 해서요.” -에이, 있었으면 진즉에 이야기해 줬지. “전혀 없으세요? 그냥 특이하지 않은 거라도 괜찮은데.” -나는 아예 몰라. 내가 우리 대한당 움직임은 어느 정도 꿰고 있잖아. 그런데도 잘 모르겠는데. “아, 그렇습니까?” -왜. 누가 건드린 건데?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어휴, 그게 누군지부터 찾아야 될 것 같은데. “일단 알겠습니다. 그러면 또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래, 고생해. 전화를 끊자, 고심은 더욱 깊어졌다. 박 의원이 모를 정도면, 전상국 의원이 홀로 움직이는 것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 다른 이들과 연결이 되어 있다면, 그들을 통해서 회유할 여지라도 주는 것일 테지만, 현재 상황은 그렇지 않다. 즉, 본보기로 자신의 목을 치겠다는 소리지. ‘아무래도 이대로는 안 돼.’ 이렇게 허망하게 금배지를 잃을 수는 없었다. 그는 다급하게 활로를 찾기 시작했다. 휴대폰에 저장되어 있는 인물 중 한 명에게 전화를 걸었다. “접니다. 오늘 저녁에 잠깐 시간 괜찮으십니까?” * * * “수고했다.” “고생하셨습니다.” 이치현 의원의 말에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지친 목소리에서 알 수 있듯, 이치현은 물론, 나머지 보좌진들까지 전부 피로에 절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번 첫 공청회 이후, 주민들을 만나가며 설득하고 또다시 2차 공청회를 개최한 게 오늘. 그러나 이번에도 진전은 없었다. 주민들 간의 싸움으로 마무리가 되었던 지난번과 달리, 공청회가 마무리될 때까지 주민들을 붙들어 놓는 데까지는 성공했으나, 결론적으로는 주민들 중 과반수를 훨씬 넘는 사람이 여전히 유류 저장 시설의 설치를 반대하고 나섰으니까. 몇몇 주민들은 데모까지 하려는 각오까지 내비추고 있으니, 세게 나갈 수도 없었다. “다들 먼저 들어가. 나는 위에 잠깐 서류 좀 챙기러 들어가야 되니까.” “예, 의원님.” 우리는 이치현 의원을 향해 인사를 하고는 각자의 집으로 향했다. 근처 오피스텔을 잡아 두긴 했으나, 지하철역까지 가는 길은 비슷했기에 함께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기도 잠시, 나는 슬쩍 멈춰 섰다. “아, 제가 사무실에 외투 두고 온 걸 깜빡했네요.” “날도 아직 선선한데 내일 챙기지?” “아닙니다. 미리 챙기는 게 마음이 편해서요.” “그래. 알아서 해.” “예. 조심히 들어가세요.” 나는 보좌관들을 향해 인사를 하고는 곧장 국회의사당으로 향했다. 물론, 외투를 챙긴다는 건 거짓말이다. 이치현과 대화를 하기 위해서였다. 사실, 법무부 장관에게 오혁철 의원에 대한 조사를 맡겨 둔 건, 무조건 써야겠다는 생각까지는 없었다. 적당한 선에서 수사를 종료한 뒤, 후일, 그 자료를 통해 오혁철 의원을 이용할 수도 있다는 여지를 남겨두었으니까. 허나, 두 번의 공청회에서도 주민들에 대한 설득이 불가능한 지금 상황에서는 그 카드를 아껴 둘 수가 없었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이치현 의원의 입지는 좁아질 테니까. 의원실에 들어서자, 역시나 이치현 의원이 홀로 집무실에 앉아 서류를 보고 있었다. 챙길 게 있다고 하더니만, 혼자서 일을 더 하기 위함이었던 것 같다. 자신이 퇴근하지 않으면 보좌진들 또한 퇴근하지 못할 걸 알고 적당히 둘러댄 모양. “의원님.” 뒤늦게 나를 발견한 이치현 의원은 머쓱한 얼굴로 물었다. “어, 지훈이. 무슨 일이야? 퇴근 안했어?” “말씀드릴 게 있어서요.” 나는 슬며시 문을 닫고 집무실에 들어섰다. “이번 유류 저장 시설 설치 건 말입니다.” “뭐 주민들이 좋아할 만한 건이라도 떠올랐어?” “아니요. 그게 아니라.” 나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 건, 제가 단독으로 막아도 되겠습니까?” “그게 무슨 소리야?” “유류 저장 시설, 저희 지역구에 설치하지 않도록 만들어도 괜찮겠냐는 말입니다.” 그제야 이치현 의원은 평범한 대화가 아니란 걸 깨닫고 손에 들고 있던 펜을 놓고 나를 바라보았다. “무언가 쥐고 있는 거야?” “대답만 해 주십시오.” “…….” 그는 심각한 얼굴로 턱을 매만졌다. “위험한 거니?” “위험하진 않습니다. 다만…….” 나는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의원님이 알면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내가 법무부 장관을 움직인다는 걸 알게 되면, 그 관계에 대해서 궁금증을 품을 수밖에 없을 테고, 이는 그를 위험에 처하게 만들 수 있다. “의원님은 모르시는 게 낫습니다.” “허어…….” 이치현 의원은 살포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오랜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네가 막으면 유류 저장 시설 설치 건이 아예 없어지는 거야?” “아닙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다른 지역구로 넘어갈 겁니다.” “그쪽에서는 받는다고 하고?” “받게 만들 겁니다.” “…….” 어차피 다른 지역구라면, 민국당이 아니라 대한당이라는 건 그도 아는 사실 일터. 이치현 의원은 짧지 않은 고민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그에게 선택권은 하나였다. 애초에 대한당이 아니었다면, 유류 저장 시설이 이치현 의원의 지역구로 결정되는 일 자체가 없었을 테니까. “그래.” 그는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할 수 있다면 해 줘.” 내 카드를 소진하는 건 아깝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이치현이 살아야 나도 산다. 민국당에서 오래 살아남을수록. 그리고 이쪽에서 나를 더 귀하게 여길수록, 아버지가 나의 능력을 더 높이 평가하실 테니까. “알겠습니다.” 이치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각하께서 지훈이 너한테 정치를 좀 가르쳐 주라고 여기로 보냈는데, 오히려 내가 도움을 받고 있네.” “충분히 잘 배우고 있습니다.” “나중에 도움 필요하면 말해.” 그는 농담이 아니라는 식으로 말을 덧붙였다. “내가 신세졌으니, 언젠간 보답할 테니까.” “알겠습니다.” 보답. 받을 수 있을진 모르겠다. 내가 부탁할 때까지 그가 정계에서 살아남아야만 도움을 받을 수 있을 테니까. “그럼 이만 퇴근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들어가. 내일 보자고.” * * * “허허…….” 오혁철 의원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말 그대로 멘탈 붕괴.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손에는 자신에 대한 수사 자료가 쥐어져 있었으니까. 자신의 인맥 제2 차장검사를 통해 몰래 빼내 온 정보. 그것을 본 순간, 확신할 수 있었다. 그가 기소되는 순간. 아니, 그전에 언론에 퍼지자마자 자신의 정치 생명은 끝날 것이라고. 오혁철 의원에겐 더 이상 선택지가 없었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고, 금배지를 내려놓는 건 그의 선택지에 없으니까. 더러운 꼴을 보더라도 국회에 남아 있어야만 삶의 이유가 생기는 법. ‘그래, 가자.’ 그는 결심을 하고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미 검찰들이 자신의 목줄을 옥죄어 오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오혁철 의원이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 이번 일을 벌인 인물을 찾아가 무릎을 꿇는 것. 어떤 모욕과 수모를 당한들, 중요하지 않았다. 일단 살아남아야 후일을 도모할 수 있는 법이니까. 오혁철 의원이 생각하는 이번 일의 배후는 당연히 전상국 의원. 그를 찾아가 항복을 외칠 생각이었다. 무릎을 꿇으라면 꿇을 것이고. 옷을 벗으라면 벗을 생각이었다. 금배지만 지킬 수 있다면 뭐든 할 수 있다는 각오였다. 오혁철 의원은 마음을 비우고 외투를 챙겼다. 그 결심과 함께 집무실을 나서서 주차장으로 향했다. 늦은 시간이지만, 찾아간다고 해서 전상국 의원이 자신을 쫓아내진 않을 테니까. 그리고 차에 오르려던 그 순간. “오혁철 의원님.” 나지막이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높지 않지만, 확실한 여성의 목소리. 뒤를 돌아보자, 기둥 뒤에서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있는 인물이 눈에 들어왔다. 그곳이 CCTV의 사각지대라는 건 눈여겨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누구야?” “전상국 의원한테 가려는 길이죠?” “…….” 오혁철 의원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는 발끈해서 외쳤다. “너 뭐냐고!” “당대표한테 가도 소용없을 겁니다.” 순간, 직감할 수 있었다. 저 여자는 이번 일의 배후와 아주 깊은 연관이 있을 것이라고. 오혁철 의원은 뒷좌석 문을 열고 있는 수행 비서를 향해 말했다. “김 비서.” “예, 의원님.” “저쪽으로 자리 좀 피해 있어.” “알겠습니다.” 수행 비서가 자리를 피한 뒤, 오혁철 의원은 여성을 바라보며 말했다. “타지.” 여자는 순순히 오혁철 의원의 차에 올랐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여성의 정체를 알 수 없었다. 모자를 푹 눌러썼고, 알이 없는 검은 뿔테 안경에 마스크까지 끼고 있는 상태라 전혀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으니까. “누가 보냈어?” 여성은 순순히 답해 주었다. “최지훈 도련님이 보내서 왔습니다.” 물론, 오혁철 의원이 전혀 예상치도 못한 대답이었다. “……뭐?” 그의 동공에 지진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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