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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략 (2) (40/200)

계략 (2)2021.12.10.

“그래서 원하는 게 뭔데요?” “원하는 거요?” 천선화의 물음에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원하는 게 있다면 이렇게 대놓고 찾아오진 않았겠죠.” “…….” “그저 저라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고 계셨으면 하는 마음으로 온 것뿐입니다.” 나는 아직 본론으로 들어갈 생각이 없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대화의 주도권을 내줄 생각이 없다는 듯 다시금 대화를 이끌었다. “그거 알아요?” 그녀는 의뭉스런 목소리를 냈다. “난 최지만 씨한테 후원하고 있어요.” 나의 첫째 형이자, 경상북도 도지사를 맡고 있는 최지만. 이건 좀 의외였다. 이런 모임의 실세까지나 되는 양반이면, 당연히 둘째 형 최지원에게 줄을 설 것이라고 생각했으니까. 물론, 이 대화에서 그러한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 이야기를 왜 꺼냈냐는 것. “사람이 한 번에 두 명의 손을 잡을 수는 없는 법이잖아요?” 천선화는 어쩔 수 없다는 듯한 뉘앙스를 풍겼다. 결국 대권을 바라보기 위해 접근한 것이면, 도와줄 수 없다는 뜻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만에 하나 최지만에서 내게로 돌아섰다가 최지만이 권좌에 오르기라도 한다면, 천선화는 물론이고 그녀의 천화 그룹 자체가 보복당할 테니까. 물론, 그렇다고 물러설 이유는 없다. “사람의 손이 두 개인 건 이유가 있는 법입니다.” 반드시 동아줄을 하나만 잡아야 된다는 법은 없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도 있잖습니까?” 걸리면 문제가 된다. 다시 말하면, 걸리지 않을 경우엔 문제 될 게 없다는 뜻. “최지만 도지사님이 이 대화를 알게 된다면 좋아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만.” 여차하다가는 내가 위험해질 수도 있으니 그만하라는 말이다. 물론, 나는 피식 코웃음을 쳤다. “최지원 판사님이 일련의 사실들을 알면 어떻게 하실 것 같나요?” 나의 둘째 형이자, 가장 강력한 차기 대통령 후보. 최지만에게 후원한다는 사실이 들어가는 순간, 최지원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단순히 천선화가 문제가 아니라, 그녀의 남편인 민종근 장관과 천화 그룹까지 타깃이 되겠지. “어차피 이야기 못 하실 거 아닙니까?” 역시나 이곳의 실세라는 걸 증명하듯 그녀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어차피 상황은 나랑 최지훈 씨랑 똑같은 것 같은데.” “그렇죠. 피차일반이죠.” 나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그저 서로에게 가능성만 열어 놓자, 이겁니다.” 어차피 한선화는 움직일 수 없다. 나에게 보복할 수도 없고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흘릴 수도 없다. 허나, 그녀가 내 편에 선다면 큰 힘이 되리라는 것만은 확실한 사실. 이 모임의 목적이 어떻건 간에, 이곳에 있는 인물들의 정계 위치를 생각하면, 반드시 내 손에 넣어야만 한다. “이 ‘의한회’의 존재는 물론, 실세가 차관님 부부라는 걸 알게 되면 아버지가 어떤 표정을 지으실지 상상이 되지 않네요.” 말 그대로 패가망신이 되겠지. 그럼에도 그녀는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말했다. “우리 둘 모두 남들에게 말 못 할 비밀이 생겼네요.” “둘 모두라니요.” 나는 피식 코웃음을 쳤다. “그쪽은 말하는 순간 자폭이죠. 그에 반해 나는 어떻게든 살아남을 수는 있습니다.” 처지가 다르다는 것이다. 이게 핏줄의 힘이다. 태생부터 왕족으로 태어난 나와 그저 일개 귀족인 천선화는 결코 동등한 처지가 될 수 없는 법. 아니나 다를까, 천선화의 포커페이스가 깨졌다. 싸늘한 얼굴이 된 그녀를 향해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너무 당황하지는 마시고요. 저도 어차피 멀리 봐야 하는데 무슨 짓이라도 하겠습니까?” 천선화는 이길 수 없는 싸움이라는 걸 깨닫고는 숨을 크게 내뱉었다. “그러면 하나만 물어볼게요.” “말씀하시죠.” “나와 남편의 관계. 어떻게 안 거죠?” 민종근 장관을 뒤에서 움직이는 실세라는 사실. 그녀 입장에선 당황스럽고 궁금할 수밖에 없다. 그도 그럴 것이 둘의 상황을 보아하면, 몇 년이고 이러한 관계가 지속되어 왔을 것이고. 이 사실은 그 누구도 알지 못했을 테니까. 나는 조소를 지었다. “영업 비밀입니다.” 당연히 말해 줄 생각은 없다. 설명하고 싶지도 않고. “아, 참. 아까 원하는 게 뭐냐고 했죠?” 그녀는 눈을 치켜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원래는 없었는데, 문득 이곳에 와 보니 영원한 대한당원, 민국당원도 없다는 걸 알게 되었거든요. 그래서.” 나는 씨익 입꼬리를 비틀었다. “조만간 법무부 장관님께 맡길 일이 하나 생길 것 같은데, 미리 이야기 좀 부탁할게요.” “…….” 천선화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이용할 겁니까?” “아니요.” 그럴 생각은 전혀 없다. 한쪽에게 일방적으로 이득이 되는 관계는 반드시 상대방에게 반항감을 심어 주니까. 내게 반발하는 적을 만들 필요는 없다. 의한회를 움직이는 천선화라면 더욱 더. 오히려 내 편으로 만들어야지. “오는 게 있으면, 가는 법도 있는 법 아니겠습니까?” 나는 심려치 말라는 의미로 말을 보탰다. “이번 건은 순수하게 비밀을 지켜 주는 대가입니다.” 민종근 법무부 장관을 뒤에서 움직이는 게 천선화라는 사실. 오로지 그걸 발설하지 않는 조건이다. 나 또한 다음부터는 일방적인 요구가 아니라, ‘거래’를 할 테니까. 그제야 그녀도 안심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이 정도면 서로에게 합리적인 거래다. 천선화는 비밀을 지킬 수 있고. 나 또한 어차피 말하지 않을 비밀을 통해 단발성이긴 하나, 법무부 장관이라는 카드를 얻었으니까. 나는 가볍게 그녀와 손을 맞잡았다. 그때, 문득 사람들 사이로 민종근 법무부 장관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눈인사를 했고. 나 또한 고갯짓으로 화답했다. “너무 오래 있으면 부군께서 걱정하실 테니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또 뵙죠.” * * * “말씀하신 대로 처리하겠습니다.” “그래. 그러면 그렇게 하고…….” 최준석 대통령은 펜을 내려놓으며 고태욱 비서실장을 바라보았다. “거기는 어떻게 돌아가고 있어?” 며칠 전, 그는 막내아들이 있는 이치현 의원실의 근황에 대해 알아보라고 지시를 내렸었다. “당 차원에서 이치현 의원에 대한 보복을 시행하고 있는 중입니다.” 고태욱 비서실장은 숨김없이 현 상황을 보고했다. “아마 임기 채우는 것도 어려울 수 있는 상황이라고 생각합니다.” 최준석 대통령은 대답 대신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럴 만했다. 그쪽 의원실에서 코리안 뉴딜에 대한 정책이 외부로 새어 나갔고. 그 탓으로 인해 대통령이 야심차게 준비한 정책이 빛을 보지도 못하고 사라졌다. 이치현의 의원실에 막내아들이 있기도 하며, 한때 굉장히 아꼈던 후배이기도 하지만. 보좌진을 관리하지 못한 건 어쨌든 국회의원의 잘못이니까. 그래서 이번 보복은 감당해야만 했다. 당 차원에서 나서는 걸 최준석 대통령도 막을 생각은 없었다. 고태욱 비서실장 또한 마찬가지. “이치현 의원은 내버려둬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는 조심스럽게 말을 보탰다. “걱정되는 건 막내 도련님입니다.” “지훈이가 왜?” “이렇게 맹공을 당하시다 보면 결국 대한당과 대립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살아남기 위해서 날을 세운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만에 하나 대한당 의원들과 괜히 척을 지거나 타격을 입기라도 하면, 후일에…….” “그래서.” 최준석 대통령은 냉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지훈이를 민국당에서 빼내야 한다고 생각하나?” “미래를 위해서는 그게 낫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고태욱 비서실장의 말에 최준석은 대통령은 차분하게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틀린 말은 아니다. 이치현 의원이 몰락하는 과정에서 자칫 엮이기라도 하면, 막내아들까지 위험해질 수 있는 법이니까. 허나, 어미 새가 언제까지고 먹이를 가져다준다면, 아기 새는 나는 법을 익힐 수 없다. 짧지 않은 고민 끝에 그가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일단 지훈이 그놈이 직접 도움을 요청하기 전까지는 지켜보자고.” 그는 자신의 책상 위에 있던 가족사진으로 시선을 옮겼다. “정계에 들어선 이상, 어떤 선택을 하고, 그것이 무슨 결과를 불러오는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녀석의 그릇을 가늠할 수 있는 법이니까.” “알겠습니다.” * * * 천선화에게 법무부 장관이라는 카드를 얻어낸 이유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이번 유류 저장 시설 설치와 관련해 대한당으로부터 오는 이치현 의원에 대한 압박을 막아내기 위함. 현재로선 이게 최선의 선택이었다. 내가 민국당에서 조금이라도 더 버티기로 결정한 이상, 이치현 의원에게 힘을 보태 줘야만 했으니까. 그래야 내가 살아남을 수 있다. 민심을 잃은 국회의원은 차기 총선에서 떨어질 게 확실하고, 그러면 결국 남은 임기 동안 여의도에서 그저 거수기로 지낼 수밖에 없게 되니까. 아무리 국회의원이라고 한들, 힘을 쓸 수가 없는 상황인 것이지. 또한, 싸움에서는 ‘기세’라는 게 중요하다. 대한당에서 작정하고서 먼저 치고 들어왔지만, 이걸 완벽하게 막아낸다면, 다음엔 쉽게 엿 먹이려고 생각하지 못할 테니까. 의한회를 알게 된 다음 날. 나는 일산의 한 오피스텔에 들렀다. “안녕하십니까, 도련님.” 내가 만난 인물은 다름 아닌, 마돈나. 임지현 비서관이었다. “정말 간만에 뵙네요. 잘 지내셨죠?” “덕분에. 지현 씨도 얼굴 좋아져서 다행이네.” 지난번, 병원에 입원했다가 도망쳤을 때에 비해 훨씬 더 안색이 좋아져 있었다. “일단 앉지. 해 줄 이야기가 있어.” “예.” 그녀는 따끈한 차를 내 왔고. 나는 어제 겪은 의한회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런 모임이 있었군요…….” 마돈나는 낮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지현 씨도 모르고 있었지?” “예. 가끔씩 정책 통과가 될 때 찬반 투표 결과를 보면, 간혹 이상하게 표를 던지는 의원들이 있었거든요. 개인적으로 로비를 당한 게 아닐까 생각했었는데, 집단적 움직임이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정보력에서 어지간하면 밀리지 않는 임지현도 모를 정도니 국회에서는 알려지지 않는 게 당연했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다. 대통령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은밀한 커넥션을 유지하면서 모임 자체가 드러나지 않도록 온갖 보안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으니까. 오히려 내가 그곳을 알게 된 게 행운에 가깝다고 봐야지. “우선 의한회에 속한 인물부터 차근차근 정리하자고.” “예.” 제일 먼저 정리한 건 국회의원. 벽면 한쪽을 가득 채우는 화이트보드에 의한회의 명단을 차근차근 적어 내려갔다. 그 후, ‘경기도 화성시 을’의 주변에 위치한 지역구를 기반으로 한 의원들의 목록을 정리했다. “도련님.” 임지현은 태블릿 PC를 내게 가져왔다. “여기 오혁철 의원 한 번 보시겠어요?” ‘안산시 상록구 병’을 지역구로 하는 국회의원. 이치현의 지역구 근처는 전부 대한당 의원들이 득세하고 있다. 수원도 근처긴 하나, 그쪽엔 유류 저장 시설을 설치할 만한 지역이 없으니 패스하고. 안산, 화성, 평택, 오산까지 대략 10여명. 그들 중 의한회에 속하지 않은 인물은 5명. 그중에서도 대한당에서 지위가 위태로운 인물이 바로 오혁철 의원이다. “오혁철 의원 지역구에 유류 저장 시설 넘기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 “예. 그렇긴 한데…….” 임지현은 걱정스러운 눈길로 날 바라봤다. “오혁철 의원이 쉽게 혐오 시설을 받을 리가 없을 텐데요.” 당연히 그냥 넘긴다고 그쪽에서 받을 리는 없다. 그런데 어떻게 넘기냐고? “아마 받고 싶다고 할 거야.” 임지현은 내 뜻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설명하는 대신 휴대폰을 꺼내 한 곳으로 전화를 걸었다. “네, 최지훈입니다. 민종근 장관님.” 법무부 장관 카드는 이럴 때 쓰려고 받은 거지. “한 사람 좀 털어 주셨으면 해서요.” 떠안기 싫다면, 강제로 손에 쥐여 주면 되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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