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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략 (1) (39/200)

계략 (1)2021.12.09.

“최 비서관.” “아, 네.” 백태성 의원을 따라 회의실 밖으로 나오자, 어느새 연회장은 내가 처음 왔을 때처럼 자유로운 분위기로 변해 있었다. 물론, 내가 오기 전과 똑같지는 않았다. 다른 이들이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행동하고 있어도, 나를 신경 쓰고 있다는 건 느껴졌으니까. 흘긋흘긋 바라보거나 뒤쪽에서 바라보는 시선들만 봐도 알 수 있다. 몇몇 이들은 걱정스런 얼굴을 하다가도 이내 백태성 의원의 득의양양한 얼굴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곤 했다. 내가 의한회에 들어오기로 한 걸 구태여 말할 필요도 없다. 우리 사이에서 풍겨지는 분위기만 보더라도 일이 잘 마무리되었다는 건 알 수 있었을 테니까. “내가 차근차근 소개해 주겠네.” 백태성 의원은 가까이 있던 남자에게 다가갔다. “여기는 통일정책실 실장 박건하. 내년 초에 통일부 차관으로 올라갈 거야. 이쪽은 알지?” “아, 그럼요. 최지훈 비서관님이시죠?” 그는 반갑게 손을 내밀었다. “예, 맞습니다.” 나는 가볍게 악수를 했다. 박건하는 자연스럽게 말을 시작했다. “제가 예전부터 꼭 한 번 뵙고 싶었는데…….” “실장님.” 나는 조심스럽게 그의 말을 끊었다. “죄송하지만 제가 먼저 인사드리고 싶은 분이 있어서요.” 박건하는 멈칫하며 한 발 물러났고. “아, 네.” 백태성 의원은 얼굴에 물음표를 띄웠다. 그리고 나는 거침없이 발걸음을 옮겨 구석진 자리에서 홀로 와인을 홀짝이고 있는 여성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십니까.” 나는 깍듯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최지훈입니다.” 여자는 짐짓 놀란 눈빛을 감추며 와인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천선화입니다.” 그녀뿐만 아니라, 나를 곁눈질하던 다른 이들도 의외의 선택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천선화는 교육부 차관. 의한회에서 추구하는 진정한 힘, 권력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으니까. 실제로 차관급이기에 의전상 꽤 높다고는 하나, 생활에 전반적인 영향을 두루 미치는 분야는 아니다. 게다가 이곳엔 천선화보다 높은 인물이 훨씬 더 많기도 하고. 저쪽에 있는 법무부 장관을 포함해 국정원장 등 진짜 힘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으니까. 화려한 별들 속에서 보잘 것 없는 천선화에게 제일 먼저 다가가 인사를 한 건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을 터. 그녀 또한 마찬가지인지, 새침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다른 분과 인사도 마다하고 저에게 온 이유가 있나요?” “당연히 있죠.” 나는 다른 이들이 듣지 못하도록 목소리를 낮췄다. 그리고는 거칠게 입꼬리를 휘었다. “당신이 이 모임의 진정한 실세니까.” * * * 천선화. 교육부 차관이라는 높은 직위로 명예를 갖고 있지만, 실제 ‘정치’에서는 큰 힘을 쓰지 못한다. 교육부라는 부서의 한계상 투표권이 없는 학생들에게 영향을 끼칠 뿐이기도 하고, 애초에 큰 틀을 바꿀 수가 없기에 그들이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으니까. 아무리 자녀 교육에 관심이 많은 학부모들도 교육부까지 관심을 갖지는 않기도 하고. 화려한 권좌를 꿈꾸는 이들에게 교육부는 요양원과 같은 곳이다. 의전은 화려하지만 정치권에서 서서히 잊히다가 결국 사라지는 위치니까. 그러나 천선화는 달랐다. 그녀의 남편이 법무부 장관 민종근이었으니까. 정치권에 있다면 어느 정도 아는 이야기지만, 현재 대한민국에서 법무부 장관의 지위는 일개 장관급이라고 볼 수 없다. 장관 그 이상. 어지간한 부총리들보다도 훨씬 더 힘이 세다고 볼 수 있지. 그도 그럴 것이 현재 대통령인 최준석이 검사 출신이다. 당연히 검찰을 챙길 수밖에 없고, 자연스레 대한민국에서 검찰의 힘은 아주 막강하기 그지없을 정도까지 올라왔다. 논외로, 검경 수사권 조정에 대한 논제가 화두에 올라도 늘 경찰이 패배하는 것도 같은 이유고. 게다가 대부분의 검찰 주요직 인사들 중 대부분을 정부에 충성하는 인물로 뽑으니, 자연스레 법무부 장관의 힘은 더욱 세지는 것이다. 또한, 법무부 장관은 정무직 공무원이기에 법률적으로 임기가 정해져 있지 않다. 최준석 대통령이 쫓아내지 않는 이상, 평생 그 자리에 눌러앉을 수 있다는 뜻. 실제로 그는 3년 넘게 법무부 장관을 역임하고 있으며 헌정 사상 가장 오랫동안 법무부 장관의 자리를 지킨 인물로 남겨져 있으니까.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부끄러운 사실이지만, 어지간한 정치인들 중 털어서 먼지가 나오지 않는 인물은 많지 않다. 그렇게 정치인들을 털 수 있는 건 대한민국에서 검찰이 유일하다. 법무부 장관을 최준석 대통령의 ‘칼’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지. 그러니 그의 힘이 셀 수밖에. 허나, 여기서 가장 중요한 건 민종근이 혼자만의 힘으로 법무부 장관이 되었느냐? 그건 절대 아니다. 그의 아내인 천선화가 있었기에 민종근이 검찰 총장까지 역임한 뒤 법무부 장관이 될 수 있었다는 건 지나가던 일개 평검사도 아는 사실. 그도 그럴 것이 민종근이 사법고시에 패스하고 연수원에 있던 시절에 천선화와 결혼을 했다. 그런데 천선화의 집안이 보통이 아니었다. 주옥그룹이나 대현, 봉성 그룹까지는 아니어도. 재계 서열 10위권에서는 늘 위치하는 ‘천화’ 그룹 오너의 일가였으니까. 무엇보다 중요한 건, 천화 그룹은 최준석이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그를 후원했던 기업이었다는 사실. 그러니 그 후광을 받아 법무부 장관의 위치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니까. 그렇다고는 해도, 민종근의 힘이 없는 건 아니었다. 공식 석상은 물론, 사교 모임에서 보여 준 민종근은 가부장적인 인물 그 자체였으니까. 천선화 또한, 어지간해서는 사교계에 얼굴을 내밀지 않으며 중요한 일이 있더라도 민종근의 선택을 존중하는 것처럼 보여 주었다. 하지만 내가 받은 미래 문자는 달랐다. -보낸 이: 22 -동영상. 화면의 어둠이 걷히고 드러난 장면은 다름 아닌, 화장실. -어, 지금 논의하고 있어. 법무부 장관 민종근이 홀로 서서 전화를 받고 있었다. -응. 코리안 뉴딜. 잠깐만, 지금 문자로 보낼게. 그는 정책에 관한 내용을 문자로 전송했다. 수신인은 ‘아내.’ -방금 보냈어. 확인해 봐. 잠깐의 정적 후, 그가 입을 열었다. -안 돼? 통과시키면 위험해? 민종근 장관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 정책 통과 시에 천화 그룹에 위험하구나. ‘천화 그룹’은 천선화의 가족이 이끄는 그룹. 코리안 뉴딜이 통과될 경우, 천화 그룹의 경쟁 업체가 큰 이득을 보며 천화 그룹의 힘이 빠지게 된다는 뜻. -어. 백태성 의원한테 그렇게 지시하고…… 또, 한종길 대표한테 슬쩍 언급해? 알겠어. 그렇게 할게.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끝나는 대로 연락할게. 당신이 말하는 거 다 이해했어. 응. 이따 봐. 민종근 장관은 전화를 끊은 뒤, 옷매무새를 정돈하고는 회의실로 향했다. 내가 백태성 의원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던 그 회의실. 민종근 장관은 근엄한 얼굴로 자연스레 상석에 앉았다. 그리고는 조금 전, 화장실에서 아내와 대화를 나눈 대로 지시하기 시작했다. 짧은 회의를 끝으로 동영상은 종료되었다. 내 입가에 자연스레 미소가 지어졌다. 그런 거였어? 이 모임에도 당연히 리더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실세는 법무부 장관 민종근. 하지만 그는 허수아비일 뿐. 실제로 이 의한회를 움직이는 건 민종근의 아내 천선화였다. 다시 말하자면, 이곳의 실질적인 권력자는 천선화라는 뜻이지. 이건 전혀 예상치 못한 그림이었다. 애초에 민종근 장관이 아내 천선화의 말대로 움직인다는 건 다른 이들도 모르고 있을 테지. 청와대에서도 모르는 사실을 여타 다른 정재계 인사들이 알 리가 없으니까. 그렇기에 회의실에서도 백태성 의원을 비롯한 다른 인물들이 민종근 장관의 말을 따랐던 것일 테고. 그리고 또 하나. 코리안 뉴딜이 왜 통과되지 못했는지에 대한 진짜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단순히 대한당과 민국당의 환경과 경제를 두고 벌인 정치 싸움이 아니라, 경쟁 그룹이 성장하는 걸 견제하기 위해 천선화가 공작을 펼친 것이다. 그래. 이게 정치지. 이제야 진짜 정치를 알아가는 듯한 느낌이 든다. “최 비서관.” 그때 백태성 의원이 회의실을 나서며 나를 불렀다. “가자고.” 나는 씨익 입꼬리를 휘며 그를 따라 나갔다. “예. 높으신 분들 좀 만나 봐야겠네요.” * * * 이러한 이유로 내가 연회장에 나오자마자 제일 먼저 천선화에게 다가갔던 것이다. “당신이 이 모임의 진정한 실세니까.” 아니나 다를까, 이 말을 들은 천선화의 얼굴이 굳어졌다. “둘이 아는 사이인가?” 어느새 다가온 백태성 의원이 놀란 얼굴로 우리에게 물었다. “예. 맞습니다.” 나는 태연하게 미소를 지었다. “굉장히 오랜만에 뵙네요. 그렇죠?” 천선화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순식간에 표정 관리를 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러네요. 여기서 뵐 줄은 몰랐는데.” 백태성 의원은 의외라는 듯 연신 감탄을 내뱉었다. “어떻게 아는 사이야?” “그냥 오다가다 몇 번 뵌 적이 있습니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제가 의원실에서는 아직 말단이라서 돌아다닐 일이 많거든요.” “아, 그렇겠네.” 백태성 의원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눈웃음을 지으며 돌아섰다. “그러면 다른 분들도 소개 좀 해 주세요.” “그러자고. 우선은 저쪽에 기획재정부 사람들이 있는데…….” 나는 그의 말을 들으며 자연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천선화와 원래 아는 사이인 척 연기한 이유는 하나. 다른 사람들로부터 하여금 의심을 피하기 위해서다. 초면인데도 그녀에게 다가갔다는 걸 아는 순간, 다른 이들은 천선화에 대해 궁금증이 생길 테니까. 그렇게 되면, 일부러 민종근의 배후에서 얼굴을 숨긴 채 움직이는 천선화에게 치명적이게 될 터. 그녀가 배후란 걸 많은 사람이 알아서 좋을 건 없는 법이니까. * * * “그런 이야기 저한테 하셔도 됩니까?” “혹시 안 되는 이유라도 있습니까?” “저 지금 민국당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하하하하. 그건 또 그러네요. 그러면 못 들은 척해 주십시오.” 두어 시간쯤 지났을까. 의한회에서 다른 사람들의 얼굴을 익히며 자연스레 그들 사이로 녹아들었다. 국회에서 일하며 발로 뛸 때보다도 훨씬 더 영양가 있는 정보들을 얻을 수 있었다. 그래. 이러니 개천에서 용이 날 수가 있나. “최 비서관님.” 그때, 양복을 입은 남성 하나가 내게 다가왔다. 아까 만났었는데……. “오 검사님 맞으시죠?” “예, 맞습니다.” 중요한 인물은 아니다. 그는 꾸벅이고는. “잠깐 괜찮으실까요?” 옆쪽으로 팔을 뻗으며 안내했다. “예.” 오 검사는 나를 구석에 있는 작은 소파로 안내했다. 그는 자연스럽게 발걸음을 옮겼고. 그곳엔 천선화가 홀로 앉아 있었다. 주변에 다른 인물은 없었다. 회의실로 들어가면 의심을 받으니, 오히려 연회장에서 구석진 곳으로 나를 끌어들인 모양. 나는 자연스레 그녀의 맞은편에 엉덩이를 붙였다. “누가 불렀나 했더니, 차관님이셨군요.”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아서요.” 그녀는 소파에서 등을 떼어내며 입을 열었다. “저는 일개 교육부 차관에 불과합니다. 실세는 제가 아니라, 남편이죠.” “그 남편을 마음대로 좌지우지하는 게 차관님이시고요.” “착각이십니다. 아직 정계에 입문하신 지 얼마 안 되셔서 모르나 본데, 저희 남편이 가부장적으로 유명하거든요.” “그건 쇼윈도에 불과하다는 걸 잘 알죠.”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덧붙였다. “실권은 당신에게 있다는 걸 압니다. 이미 알고 있으니 변명하려 해도 소용없으니 괜한 힘 빼지 마시죠.” “…….” 짧은 침묵이 이어진 뒤. “후우.” 천선화는 옅은 한숨을 내뱉으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내가 블러핑이 아니란 걸 깨달은 이상, 말해 봐야 시간 낭비니까. 그리고 그제야 그녀는 본모습을 드러냈다. 천선화는 날카롭게 눈꼬리를 치켜들며 나를 향해 눈을 빛냈다. “청와대 정보력이 만만치 않네요. 남의 집안 가정사까지 들여다볼 줄이야.” “청와대가 아니라.” 나는 방긋 입꼬리를 휘었다. “최지훈의 정보력이죠.” 천선화는 흥미롭다는 듯 와인잔을 내려놓으며 팔짱을 끼었다. “누가 각하 아들 아니랄까 봐, 똑 부러지시네.” “칭찬 감사합니다.” “탐색전은 이쯤에서 각설하고.” 그녀는 오래 끌 생각이 없다는 듯 바로 본론을 꺼냈다. “그래서 원하는 게 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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