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약 (6)2021.12.08.
“……최지훈 도련님?” 의한회에서 제일 먼저 나를 발견한 건 국정원 기획조정실의 임진묵 실장. 그는 놀란 눈을 한 채 내게 다가왔다. “여긴 어떻게…….” “아, 실장님. 오랜만에 뵙네요.” 대답은 내가 아닌, 옆에 있던 우태직 의원이 대신했다. “도련님은 제가 모셔 왔습니다.” “우 의원님께서요?” “예. 도련님이 지금 민국당에 계시잖습니까? 그렇다고 100% 민국당도 아니고. 여기 오시면 좋을 것 같아서 딱 모셔 왔지요.” “아아…….” 뭔가 이상하다. 분명 반겨야 할 만한 상황이라고 생각했으나, 임진묵 실장의 얼굴을 보아하니, 적잖이 당황한 걸 숨기는 듯한 얼굴. 그뿐만이 아니었다. 뒤늦게 우리를 발견한 다른 인물들도 놀란 얼굴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장내가 술렁이는 건 순식간이었다. 상황이 잘못된 것 같은데. “태직아.” 그때, 한 남자가 중저음의 목소리를 내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경제부총리를 맡고 있는 홍길성. 우태직을 3선 의원까지 끌어올린 인물이다. “아, 총리님.” 우태직은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네가 도련님 모셔온 거야?” “예, 맞습니다.” “반갑습니다, 도련님.” 그는 웃으며 내게 악수를 건넸다. “네.” 나는 짤막한 대답만 뱉었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하기 전까진 섣불리 움직이는 게 오히려 독이 될 테니까. “태직이는 나랑 잠깐 이야기 좀 할까?” “아, 네.” 우태직 의원은 나를 보며. “도련님, 편하게 즐기시면 됩니다. 여자는 없지만, 술은 종류별로 무한하게 있으니까요.” 말을 남기고 홍길성 경제부총리와 함께 구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임진묵 실장을 통해 상황을 파악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던 무렵. “최 비서관.”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본 곳엔 머리가 하얗게 샌 국회의원이 하나 서있었다. 보통 국회의원이 아니다. 얼마 전에 나와 독대를 했던 민국당의 당 대표, 백태성 의원. “오랜만이야.” “아, 의원님.” 나는 꾸벅 인사를 했다. “우리 최 비서관 나랑 이야기 좀 할까?” “그러시죠.” * * * 홍길성 경제부총리는 구석에 위치한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우태직 의원을 향해 소리쳤다. “어떻게 된 거야?!” “예?” 아직 영문을 파악하지 못한 우태직 의원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가 혹시 뭐 잘못했습니까?” “아니, 최지훈 도련님 어떻게 오신 거냐고.” “그냥 같이 술 한잔하다가 마침 화요일이라…… 게다가 도련님께서는 지금 민국당에 계시니까 이곳에 오면 좋으실 것 같아서 오자고 했습니다.” “……잠깐만. 네가 오자고 한 거라고?” “예. 무슨 문제가 있는 겁니까?” “아이고…….” 홍길성 경제부총리는 이마를 붙잡았다. 자신의 실수였다. 우태직 의원의 성격 자체가 정치로 파벌 싸움을 하거나 교묘하게 누군가에게 줄 서는 타입이 아니다. 그러니 당연히 사교활동을 다니거나 인맥을 넓히는 스타일도 아니다. 가끔씩 홍길성 경제부총리가 부를 때만 이곳에 들러 얼굴을 비추는 정도. 그렇기에 홍길성도 그에게 최지훈을 데려오면 안 된다는 이야기를 해 주지 않았었다. 당연히 그럴 리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니까. “막내도련님을 데려오면 어떡해?” “아…… 최지훈 도련님은 안 되는 거였습니까?” “최지훈 도련님뿐만 아니라, 청와대 일가는 전부 안 되는 거야. 고태욱 비서실장님처럼 대통령 각하 최측근도 안 되고.” “특별한 이유라도…… 아!” 그제야 우태직 의원은 깨달음의 탄식을 내뱉었다. 이 모임에는 단순히 대한당 의원들만 있는 게 아니라, 민국당 의원도 있을뿐더러 기업가들도 있었으니까. 다시 말해 대한민국이 아니라, 오로지 저들을 위한 모임이라는 뜻이지. 당연히 최준석 대통령의 귀에 들어가게 된다면, 그 뒤는 안 봐도 뻔하다. “죄송합니다.” 우태직 의원은 허리를 접으며 사과했다. 허나, 이미 엎질러진 물을 담을 수는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제가 도련님께 못 본 척해 달라고 할까요? 아직 어리시니까 잘 타이르면…….” “아니, 그건 불가능해. 다른 형제들도 아니고, 막내 아드님이라고. 머리 회전이 얼마나 빠르신데.” “그러면 저희는…….” “어쩔 수 없지.” 홍길성 경제부총리는 고개를 저었다. “백태성 의원님이 잘 이야기하셨길 바라는 수밖에.” “만약에 이야기가 잘 안 되면 어떡합니까?” 우태직 의원의 물음에 홍길성 의원은 고개를 저었다. “배지 내려놔야지. 너뿐만 아니라, 나도 옷 벗어야 되고. 여기 있는 사람들 전부 모가지 날아가는 거야.” “……죄송합니다.” “이미 벌어진 걸 어쩌겠어. 우선 다른 사람들에게도 상황 설명해야 되니 나가서 기다리자고.” “알겠습니다.” * * * 나는 백태성 의원을 뒤따라 구석에 있는 작은 방에 들어왔다. 회의실 구조 형태로 테이블과 의자 몇 개가 놓여 있었다. 문이 닫히자, 밖의 왁자지껄한 소리가 단번에 사라졌다. 방음 처리가 보통이 아닌 모양. 하긴. 모이는 사람이 보통이 아닌 만큼, 매번 대화하는 논제도 어지간한 사안이 아닐 테니까. 은밀한 이야기가 필요할 땐 이곳으로 모이는 거겠지. 먼저 입을 연 건 백태성 의원. “다시 볼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빨리 만나게 될 줄은 몰랐네.” 그의 얼굴엔 민망한 기운이 드러났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난번 독대 이후, 내가 총선에 나가기 전에 꼭 만나리라고는 생각했지만, 나도 이렇게 빠르게 재회할 줄은 몰랐다. “다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것 같지는 않아 보이네요.” “자네도 눈치를 챘나 보네.” “못 챌 수가 없죠.” 나는 테이블 위로 몸을 기울이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어떻게 된 건지, 이 모임이 왜 존재하는지, 또 무슨 역할인지. 그리고 왜 다들 당황했는지 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백태성 의원은 더 끌 생각이 없다는 듯 바로 대답했다. “어디까지 듣고 왔나?” 애초에 나한테 이 상황을 설명해 주기 위해서 온 것일 테니까. 민국당의 당대표 정도 되는 인물이면, 이 모임에서도 꽤나 파워가 있는 인물일 터. 분명 이곳에서의 대화가 앞으로의 큰 물결과 흐름을 좌지우지할 것이다. “아는 게 없습니다. 이 모임의 이름이 ‘의한회’라는 것 외에는요.” 우선은 솔직하게 나갔다. 지금 상황에서 내 카드는 없다. 블러핑을 치더라도, 손에 든 게 있어야 칠 수 있는 법이니까. 허나, 다른 이들의 당황한 얼굴을 보면, 내가 이곳의 존재를 안다는 것만으로도 그들에겐 위협이 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조급하게 나갈 필요가 없었다. “우태직 의원 때문에 ‘우연히’ 온 건가? “예. 저는 생각도 없었는데 먼저 가자고 하시더군요. 제가 가면 좋을 만한 곳이 있다고.” “허허…….” 그는 조소를 흘렸다. 잠깐의 고민 끝에 백태성 의원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의한회(義韓會). 뜻 그대로 올바른 한국, 의로운 한국을 만들자는 모임이라네.” “모인 취지는 그렇고, 실제로는 다르겠죠?” 나는 찡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대한당 의원님들과 민국당 의원들 그리고 기업가와 그 외 인사들도 있는 걸 보면, 대충 가늠은 되더군요.” “생각하시는 그대로일세. 서로 끌어주고 밀어주기 위해 존재하는 곳이지.” 백태성 의원도 숨길 생각은 없어 보였다. 여기서 거짓말을 했다가 들통 나기라도 하면, 청와대에 직속으로 유출되는 꼴이라고 생각했을 테니까. 대한당과 민국당이 함께 공존한다. 그들이 추구하는 정치적 이념이 정반대의 길이라는 걸 생각하면, 결론은 간단하다. 특정 집단의 이득. 즉 자신들을 위해서 활동을 하고 있다는 뜻이지. 그리고 이는 대통령 최준석이 추구하는 대한민국의 이상향과는 다른 길이다. “아버지는 모르시겠군요.” “그렇지.” 그는 솔직하게 말했다. “대통령 각하뿐만 아니라, 최지원, 최지만 등 자네의 다른 형제들도 모르고 있다네.” 이유는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그들은 100% 대한당이다. 정치적 이념 또한 완전한 대한당 마인드. 그런데 특정 이득을 위해 민국당과 손을 잡는다? 그들의 입장에선 용납할 수 없을 수밖에. “최 비서관.” “예, 의원님.” “혹시 말할 생각인가?” “아버지나 형제들에게 말입니까?” 그는 긴장한 얼굴로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왜 알리겠습니까?” 나는 태연하게 입꼬리를 비틀었다. “이 좋은 모임이 없어지면 안 되겠지요.” 아버지의 이념과 다르다는 걸 다시 말하자면. 이 모임의 존재가 아버지 귀에 들어가는 순간. 소속원들을 향한 칼춤을 추실 게 분명하다는 뜻이다. 즉. 지금 내가 이곳에 온 것은. ‘천재일우의 기회’라고 볼 수 있다. 아버지의 도움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다른 형제들을 앞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기회. 물론, 그렇다고 이 ‘의한회’에 있는 인물들이 모두 내게 줄서는 건 아니다. 다른 형제들도 이 모임의 존재를 모른다는 건. 이곳의 사람들도 각각 다른 인물들에게 줄을 섰다는 뜻을 증명하는 셈이니까. 허나, 내가 이 모임의 존재를 알고. 또 이 ‘의한회’에 합류하는 순간, 그들은 나를 의식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이곳에 왔다는 사실을 다른 형제들한테 말할 수도 없는 노릇. 이러한 모임이 있다는 걸 지금까지 숨겼다고 방증하는 셈이 될 테니까. “그렇다면 자네는…….” “저도 의한회에 들어오겠습니다.” 나는 가볍게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물론, 받아 주신다면 말이죠.” 이미 발을 빼기엔 늦었다. 너무 많은 사람이 내 얼굴을 봤으니까. 오히려 발을 빼는 게 더 위험하다. 내가 이곳을 떠난다면, 오히려 내가 입 여는 걸 두려워해서 형제들에게 나에 대한 위험성을 제고할 가능성이 생긴다. 그러면 결국 내가 정치에 커다란 야망이 있다는 걸 깨닫게 하는 셈이나 다름없는 법. 그럴 위험성을 안을 바엔, 차라리 이곳에 남아 사람들을 감시하며 정보를 얻고, 하나씩 내 편으로 돌리는 게 낫다. 우선, 이 모임에 남는다는 것부터 ‘운명 공동체’처럼 보이며 친근감을 심어 줄 수 있으니까. 또한, 다른 인사들에게 훨씬 더 접근하기 쉬워지기도 하고. “자네를 받지 않을 이유가 있나. 우리야 환영이지.” 백태성 의원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걸렸다. “다행일세. 우리 최 비서관이 오픈 마인드를 갖고 있어서.” 그제야 그의 얼굴엔 안도감이 피어났다. “다른 도련님들이라면 위험한 결과가 나왔을 거야.” “저는 다른 형제들과 다르니까요.” “그렇지.” “그러면 간단하게 설명해 주겠네. 우선 의한회는…….” 간단하게 백태성 의원에게 모임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현재 의한회에 몸을 담고 있는 인물들부터 시작해서. 의한회에 소속된 인물의 소개를 통해서만 들어올 수 있는 구조 및 매주 화요일마다 모임이 열리는 것까지. “세세한 사항은 최 비서관이 오다 보면 알게 될 걸세.” “알겠습니다.” “매주 올 필요는 없어. 다들 바쁘지 않으면 와서 얼굴 도장이라도 찍고 가는 거지. 물론, 자네는 굳이 얼굴 도장을 찍을 필요는 없겠지만.” 백태성 의원은 홀가분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면 나갈까? 밖에도 아마 정리되었을 거야.” “예. 그러죠.” 나는 옷을 정돈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위기는 곧 기회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반대로 말하면 기회는 곧 위기가 될 수도 있다. 이곳에 들어온 건 자의가 아니었지만, 의한회로 합류한 결정을 내린 순간부터, 대권을 향한 외줄타기가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다. 여기서 미끄러지는 순간, 형제들에게 보복을 당하는 건 물론이고 정계에서 쫓겨나는 것까지 각오해야만 한다. 그렇기에 정신 똑바로 차리고 움직여야만 한다. 살아남아야 대한민국의 권좌에 오를 수 있을 테니까. 그래야만 내가 원하는 정치를 펴고, 내가 원하는 대한민국을 만들 수 있을 테니까. “가자고.” “예. 높으신 분들 좀 만나 봐야겠네요.” 백태성 의원이 문고리를 여는 그 순간. 지잉지잉-. 휴대폰에 진동이 울렸다. -보낸 이: 22 -동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