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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약 (3) (35/200)

도약 (3)2021.12.05.

“김치호?” 국정원장의 보고를 들은 최준석 대통령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몇 급이라고?” “6급 비서관입니다. 이치현 의원실 소속이었습니다.” “허허…….” 최준석 대통령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고작 6급 나부랭이가…….” “이전에도 금품을 몇 번 상납받았던 전적이 있었는데, 이번에도 돈에 눈이 멀어서 정보를 흘려 준 것 같습니다.” “정부에 대한 생각은?” “김치호가 처음 국회에 입성했을 때부터 민국당 소속이었기에 대한당에 반감은 있었으나, 주의할 만한 수준은 아니었습니다.” “결국 돈 때문이라는 거지?” “예, 맞습니다. 이번에는 각하께서 직접 힘을 준 큰 건이라서 명품 시계를 받았다고 하더군요.” “후우우.” 최준석 대통령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깟 거지같은 놈 때문에…….” 명품 시계 하나 때문에 야심차게 준비했던 정책이 허사로 돌아갔다는 사실에 허탈함이 찾아왔다. 허나, 정치라는 게 워낙 변수가 많기에 한두 번 겪는 일은 아니었다. 그는 다시금 고개를 들었다. “한정일보 기자 그 자식은?” “저희 요원들을 통해서 경고했습니다. 또한, 다른 언론사와 기자들에게 전체적으로 주의를 줬고요. 한정일보에는 고태욱 비서실장님이 직접 나서서 사장과 따로 이야기까지 했다고 하니 걱정하시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그래. 김치호 그놈 뒤처리는 끝났고?” “각하께서 신경 쓰시지 않도록 전부 조치해 두었습니다.” “내가 알아야 할 사항은 없지?” “예. 모르시는 게 낫습니다.” “그래. 잘 처리하라고. 가 봐.” “예, 각하.” 국정원장은 깍듯하게 허리를 접고는 대통령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홀로 남은 최준석 대통령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향했다. 특수 코팅된 탓에 밖에서는 전혀 볼 수 없지만, 안에서는 훤히 보이는 창문. 최준석은 드넓은 잔디밭을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이치현 의원실이라…….” 그의 머릿속에 몇 가지 상념이 피어오르기도 잠시. 똑똑. “어, 들어와.” 문이 열리며 고태욱 비서실장이 꾸벅 인사를 하며 들어왔다. “각하. 저번에 말씀드렸던 보궐선거 후보자 목록입니다.” 최준석 대통령은 서류를 펼쳐 빠른 속도로 읽기 시작했다. “부산이랑 대전만 눈여겨보면 되겠지?” “예, 맞습니다.” 대전은 어차피 대한당의 땅. 지난 지방 선거에서 당선된 대전시장이 성매매 의혹으로 사퇴하긴 했으나, 대전이라는 지역 자체에서 최근 몇 년 동안 대한당의 득표율이 80%에 육박했기에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우리 쪽에서는 대전에 최한길이 나오네?” 최준석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조금 약하지 않나?” “그렇긴 합니다만, 민국당에서는 김성택이 출마할 예정이라 충분할 것 같습니다.” 최준석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어차피 대전에서는 싸움이 안 될 것 같아서 버리는구먼.” “예. 오히려 부산에 힘을 주는 것 같습니다.” 그는 서류를 넘기고는 움찔하며 손을 멈췄다. “부산은 오형민이네?” 민국당 오형민. 부산 토박이로 부산에서만 무려 4선을 해먹은 의원이다. 지난 총선에서는 야심만만하게 종로에 출사표를 내던졌다가 대한당의 상징과도 같은 전상국 의원에게 깨지고 말았다. 그럼에도 여전히 거물로 불리는 인물임에는 틀림없는 사실. 지난 총선에서 떨어진 걸 오히려 발판삼아 부산시장으로 도약해 경상도에 깃발을 꽂아 보려는 속셈이다. 대한당의 베이스는 경상도라고 하나, 누가 나오든 대한당을 찍고 보는 대구 경북과 달리, 경남과 부산에는 최근 들어 민국당의 지지세가 확산되고 있다. 지난 지방 선거에서는 대한당의 부산시장이 55:45라는 차이로 이전까지에 비해 꽤나 격차가 줄어들었으니까. “우리 쪽에서는 백하성이 나간다고?” “예, 맞습니다. 아무래도 저희 쪽에서 만만한 인물을 내보냈다가는 오형민에게 잡아먹힐 수도 있다는 판단을 내린 것 같습니다.” “백하성 정도면 나쁘지 않지…….” 3선 의원 출신이지만, 지난 총선에서는 내부 정치로 인해 공천에서 떨어져, 총선에 출마조차 하지 못했던 인물. 짧은 공백이 있긴 하지만, 부산에서 대한당 버프가 있다면 충분히 당선될 수 있을 터. “진행하라고 할까요?” “그래. 나쁘지 않네. 변동 사항 있으면 보고하고.” “알겠습니다.” 고태욱 비서실장은 최준석 대통령을 향해 꾸벅이고는 서류를 품에 들었다. “아, 그리고 각하.” “왜?” “코리안 뉴딜 말입니다.” “어, 조금 전에 국정원장한테 보고받았어. 이치현 의원실에 있던 비서관 놈이라며?” “예, 맞습니다.” 고태욱 비서실장은 씁쓸한 미소를 삼키며 말했다. “막내 도련님이 별꼴 다 보셨습니다. 하필 그 의원실에서 나올 줄이야…….” 최준석 대통령은 묘한 얼굴로 고개만 끄덕였다.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최준석 대통령과는 그 누구보다도 자신이 제일 가깝다고 생각했지만, 이번만큼은 전혀 읽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얼굴도 잠시. “조만간 아들놈들 불러서 식사나 한 끼 해야겠어.” “도련님들께 전달할까요?” “응. 스케줄 체크해서 다음 달 중에 부른다고 해.” “알겠습니다.” “그리고 고 실장.” “예, 각하.” 최준석은 슬쩍 목소리를 낮췄다. “그 돈은 어떻게 됐어?” 그가 숨겨 둔 해외 비자금. “현재 미국 네바다 주에서 조금씩 빼내고 있습니다. 조만간 스위스를 거쳐 파나마로 갈 예정입니다.” “진행되는 대로 보고해.” “예, 알겠습니다.” * * * “불기소처분?” 대통령의 첫째 아들, 최지만은 짜증 섞인 목소리를 내뱉었다. “그게 어떻게 불기소처분이 나와?” “저도 어떻게 된 영문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방금 확인한 바로는 분명 최지원 판사는 증거불충분으로 기소하지 않는다고…….” 몇 달 전, 대통령의 둘째 아들 최지원 판사는 작지 않은 논란에 휩싸인 적이 있다. 송병준 의원과 최지원 판사의 통화 내용이 유출되며 송병준 의원이 최지원에게 뇌물을 공여한 정황이 발견된 것. 이를 기회로 삼아 첫째 최지만과 셋째 최지곤은 적극적인 공세를 펼치며 언론전을 벌이려 했으나, 최준석 대통령의 제재로 순식간에 덮여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 결과는 불기소처분. “이런 제기랄.” 최지만은 주먹으로 책상을 쾅 내리쳤다. 불기소처분. 그것도 증거불충분으로 인한 불기소처분이면, 결국 ‘무혐의’와 같은 것이다. 최소한 기소유예는 바랐다. 그러면 어쨌든 간에 혐의점은 인정이 된다는 것이고, 기소유예의 특성상 5년 안으로는 얼마든지 다시 최지원의 발목을 잡을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불기소처분이면 아예 그런 희망조차 없다는 것이다. “대체 수사를 어떤 식으로 했기에 이따위 결과가 나와?” 그는 짜증 가득한 목소리로 비서를 추궁했다. 대통령이 언론은 잠재웠어도, 첫째 최지만이 뒤에서 경찰에 전폭적인 지원을 했었으니까. “아무래도 최지원이 현직 판사잖습니까? 연수원 동기에서 이어진 연줄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것만으로 불기소처분이 나오진 않아.” “예. 그리고 둘 다 소환을 했는데, 송병준 의원도 뇌물을 준 적이 없다고 잡아뗐답니다. 통화 내용만으로는 더 추측이 불가능하고요.” “아…….” 최지만은 낮은 탄식을 뱉어냈다. 안 봐도 뻔했다. 송병준이 자폭하려 했을 테지만, 최지원이 후일 그를 도와주겠다는 약속을 하면서 송병준 의원의 입을 막았을 터. “처음부터 경찰이 아니라, 검찰과 접촉했어야 하는데…….” 그럴 수 없다는 상황이 안타까웠다. 대통령의 총애를 받는 최지원이 현직 판사로 있는 이상, 검찰을 포함한 법조계는 첫째 최지만보다 둘째 최지원에게 호의적일 테니까. 앞으로도 지금처럼 흘러가면 결국 최지만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경찰들은 힘을 못 쓰게 된다. 기소권 자체가 최종적으로 검찰에만 있는 상황이니까. “검경 수사권 조정 관련 법안 통과를 재촉해야겠어. 그래야 최지원이 그놈이랑 싸워 볼 만하지.” “맞습니다.” 최지만은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기댔다. “셋째한테 연락해. 조만간 한 번 밥이나 한 끼 먹자고.” “예, 알겠습니다.” * * * “좋은 아침입니다.” “어, 다들 굿모닝.” 이치현 의원은 활기차게 인사하며 사무실로 들어왔다. 표정을 보아하니, 기분 좋은 일이 있는 모양. 아니나 다를까. “다 들어와 봐.” 그는 손짓을 하며 집무실로 들어갔다. 이치현 의원은 자리에 앉으며 거침없이 말했다. “오늘 새 직원이 하나 올 거야.” “아, 그렇습니까?” “응. 7급 비서로 뽑았는데, 국회법상 보좌진으로 7급은 한 명밖에 둘 수 없잖아?” 자연스레 시선이 내게 쏠렸다. 8급 오태용 비서는 깜짝 놀란 얼굴로 내게 물었다. “그러면 최지훈 비서님은 이직하시는 겁니까?” 그건 나도 전해들은 바가 없다.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판단이 되지 않아 나도 갸웃거리던 그때. “이직이 아니라, 승진이지.” 이치현 의원이 피식 미소를 지었다. “6급 비서관으로 올라갈 거야.” “예?” “사실, 이렇게 빨리 승진하는 건 흔치 않은 일이긴 한데, 지훈이 업무 능력은 너희도 다 알잖아. 선우야, 그렇지 않아?” “예, 맞습니다.” 강선우 보좌관은 차분하게 동의를 표했다. “국회라는 곳이 연차를 따져서 돌아가는 곳은 아니니까요.” “그래. 맞아.” 이치현 의원은 흡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언제까지 비서관 자리를 공석으로 둘 순 없는 일이잖아.” 그것 또한 맞는 말이다. 국회에서 인가하는 6급 비서관은 2명. 그런데 김치호 비서관의 사표로 인해 의원실의 비서관 자리가 모두 공석이니 업무에 지장이 있을 수밖에 없는 상태니까. “그래서 오늘부로 지훈이는 비서관을 맡으면 돼. 유라, 네가 서류 처리해서 올리고.” “알겠습니다.” “그래. 그러면 이상. 다들 나가서 일 봐.” “예.” 집무실을 나오면서도 어안이 벙벙했다. 이렇게 승진을 한다니. 나한테 따로 언질을 주지도 않았던지라, 당황스러울 따름. 다만, 충분히 납득은 갔다. 이번 정책 유출을 담당해서 이치현 의원과 민국당에 피해가 가지 않는 선에서 깔끔하게 해결했고. 이전의 활약도 적지 않았다. 게다가 그가 했던 말대로 비서관 자리를 공석으로 둘 순 없는 법이니까. “축하드립니다.” “축하드려요.” 오태용 비서와 김한나 비서가 환하게 웃으며 내게 엄지를 치켜들었고. “축하해.” “축하한다.” 한유라 보좌관과 강선우 보좌관도 가볍게 박수를 쳐 주었다. “감사합니다.” “오늘 지훈 씨가 승진 턱 쏘는 건가?” “아, 그럼요.” 나는 호탕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 턱 쏘겠습니다. 소고기 먹으러 가시죠.” “좋지.” 한창 기분 좋게 덕담을 주고받은 지 얼마나 지났을까. 문득 8급 오태용 비서가 시계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나저나 신입 비서는 언제 온답니까? 아까 의원님 말로는 9시 조금 넘어서 오라고 했다는 것 같은데…….”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어, 왔나 보네요.” 9급 김한나가 잰걸음으로 다가가 문을 열었고. 깔끔한 양복 차림의 남성 하나가 의원실로 들어오며 깍듯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그리고 그를 본 순간. “……어?” 나도 모르게 그 자리에 멈춰 선 채 얼어붙고 말았다. “오늘부로 함께 일하게 된 7급 비서 광석현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잠깐만. 저 사람이 신입 비서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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