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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줄 (4) (27/200)

거미줄 (4)2021.11.27.

“최 비서, 퇴근 안 해?” “이것만 마무리하고 들어가려고요.” “너무 무리하지는 마.” “예.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김치호 비서관의 퇴근을 끝으로 의원실엔 나 홀로 남게 되었다. “후우.” 그제야 나는 긴장을 풀며 의자에 푹 늘어졌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몸과 달리 마음속엔 불안한 마음이 조금씩 커져 가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국회 도서관에서 만날 인물이 들고 있는 자료를 생각하면 잠시 후의 회동은 절대 만만치 않으니까. 마돈나가 입원한 병원에서 내가 나왔다는 걸 알고 있다는 건, 크게 세 가지의 경우를 예상할 수 있다. 첫 번째, 마돈나에 대해 조사하고 있던 경우. 이건 커다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내가 경찰 조사에서 마돈나와 친분이 있다고 증언한 걸 토대로 의심할 순 있겠으나, 나와 그녀의 커넥션이 있다는 것 외에는 더 추정할 만한 것이 없으니까. 형제들에게 알리면 위험해질 순 있어도, 그럴 생각이었다면 애초에 내게 접근하지 않았겠지. 두 번째, 경찰과의 커넥션이 있는 경우. 이것 또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첫 번째와 두 번째 모두 기자로서 능력이 있다는 걸 증명하는 것일 뿐, 나의 비밀에 대해서는 접근하지 못할 테니까. 마돈나와의 일을 토대로 나에 대해 조사하다가 추가적인 건수를 찾아내 대화를 시도한 것이라면, 충분히 협상의 여지도 있다. 그리고 세 번째, 나에 대해 이미 조사를 하고 있었을 경우. 이게 가장 위험하다. 대통령의 막내아들인 만큼, 나는 언제든 외부인에게 노출될 위험이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 만약 나를 쫓았다면, 사고가 난 장소에서 내가 죽치고 몇 시간이고 기다렸다는 것을 알 수도 있다. 그걸 지켜봤다면, 미리 일어날 사건에 대해서 인지하고 있는 내 능력에 대해서 의심할 수밖에 없겠지. 그렇더라도 미래 문자라는 걸 알아챌 수도 없고, 내 휴대폰을 입수하더라도 알아낼 수 있는 건 없다. 그러나 의심을 사게 되면, 내 행동 반경이 줄어드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세 번째만 아니면 좋겠는데. 만약 이런 경우라면, 오히려 내가 송병준 의원과 커넥션이 있다고 추정하는 게 더 정상적이긴 하나, 이제 막 정계에 발을 들인 상황에서 누군가에게 의심할 여지를 줄 필요성은 없으니까. 물론, 그동안 내가 미행이나 누군가의 추적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건 아니다. 청와대에 살면서 지금까지 미행이나 유괴 시도가 없었던 건 아닌 만큼, 그쪽으로는 감각이 탁월하게 발달했으니까. 이런 것을 토대로 생각하면 아마 세 번째는 아닐 가능성이 높았지만, 그렇더라도 긴장을 늦춰서는 안 된다. 일단, 어떤 경우이건 간에 녀석이 보내 온 사진을 생각하면, 나와 마돈나의 관계에 대해서는 충분히 유추할 수 있는 상황이니까. 돌아가는 상황이 영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현재 나에게 선택지는 없다. 째깍째깍 시계는 빠르게 돌아가 어느새 9시 5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옷매무새를 정돈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차하는 상황을 대비해 준비한 녹음기를 챙긴 뒤, 의원실의 불을 끄고 빠져나왔다. * * * 국회도서관 뒤의 산책로. 역시나 늦은 시간대에다가 의사당내에서도 외진 장소라 인적은 전혀 없었다. 어둡게 밝혀진 가로등으로 그저 주변의 형체만 구분될 뿐. 한 5분쯤 기다렸을까. 어두운 그림자 사이로 모자를 푹 눌러쓴 한 사람이 내 곁으로 다가왔다. 키는 나보다 조금 작은 175cm 남짓. 덩치나 걸음걸이를 보아하니, 남자인 건 알 수 있었으나 얼굴은 식별되지 않았다. “최지훈 씨.” 낯설지 않은 목소리. 분명 어디선가 들어봤는데. 내게 가까이 다가온 그는 세 걸음 앞에서 멈춰 섰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들자, 남자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입가에 피어나려던 미소를 꾹 참았다. 그 남자다. 미래 문자에서 보았던 기자. 나와 20여 년간 끈끈한 관계를 맺으며 믿을 수 있는 남자. 그리고 마돈나에게 조사를 맡겼던 인물. 김태원 기자다.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미래 문자가 여기까지 내다본 건가? 아니, 그건 아닐 것이다. 문자가 도착했던 당시의 상황으로 보면, 그저 믿을 수 있는 기자를 알려 준 것일 테니까. 내가 먼저 찾아가려 했는데, 이렇게 접근할 줄이야. 복이 넝쿨째 들어왔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이겠지. “늦은 시간 불러내서 죄송합니다. 저는…….” “한정일보의 김태원 기자님이시죠?” 말을 가로채자, 당황했는지 그의 동공이 흔들렸다. 나는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놀라실 필요는 없습니다. 정계에 몸을 담는 입장으로서, 여의도에서 내로라하는 사회정치부 기자님들의 얼굴은 다 익혀 뒀으니까요.” 약간의 허세를 섞어 주었다. 다만, 그의 입장에선 허세로 느낄 수 없을 테지. 아무런 정보도 제공하지 않은 상황에서. 그것도 본인이 먼저 접근했고, 장소와 시간까지 직접 제시한 상황에서 본인을 알아봤다는 건, 내가 말한 게 아니면 설명이 불가능하니까. “보름 전에 보도하셨던 ‘박현성 의원 통화 사건’ 기사는 잘 봤습니다.” 물론, 이건 마돈나가 알려 준 정보. 최근에 김태원 기자가 보도한 내용 중에서 가장 임팩트 있었던 기사였다. 그는 본인의 의도가 간파당했다고 느꼈는지, 표정 관리도 하지 못하고 입을 꾹 닫았다. 그리고 표정을 보면 확신할 수 있는 건. 내가 걱정했던 세 번째 상황은 아니라는 사실. 미래 문자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추측을 했다면 저렇게 당황스러워 할 리는 없을 테니까. 오기 전까지만 해도 그가 갑, 내가 을이었지만, 이제 상황이 달라졌다. 동등하진 않더라도, 테이블을 엎을 수 있는 여지가 충분히 생겼지. “그래서 무슨 이유로 여기까지 불러내셨을까요?” 그는 천천히 숨을 골랐다. 그리고 다시금 태연한 표정으로 돌아온 뒤, 입을 열었다. “지훈 씨와 파트너십을 맺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에 자신감이 차 있을 리 만무했다. “파트너십이라…….” 나는 어젯밤, 그가 나의 집 우편사서함에 꽂아 두었던 사진을 꺼냈다. “이건 파트너십이라기보단, 협박에 가까웠던 것 같은데요.” “이게 없었다면, 지훈 씨가 나오지 않으셨을 테니까요.” 그는 주도권을 내주지 않겠다는 듯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 예상치도 못하게 내가 정체를 파악하고 있어서 한 방 먹은 듯했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그도 아쉬울 게 없다는 걸 깨달은 모양. 그래. 지금 상황에선 끌려가지 않는 것만 해도 나쁠 게 없다.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틀린 말은 아니니까요.” 그의 말대로 이 사진이 아니었다면, 나는 오늘 이곳에 없었을 것이다. 집에 가서 발 뻗고 잠이나 푹 자고 있었겠지. “그래서 무슨 파트너십을 원하시는 겁니까?” “생각하시는 것 그대롭니다. 지훈 씨는 저에게 정보를 주시고, 저는 기사를 내는 거죠.” “그건 파트너십이라기보단 노예 계약 같은데요?” “지훈 씨가 원하신다면, 실제 정보가 아니어도 기사를 내 드릴 수 있습니다. 원하시는 언론 플레이가 있다면, 얼마든지 해 드리죠.” “그 정도 능력이 있는지 모르겠는데요.” “아니요, 아실 겁니다.” 그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눈을 번뜩 떴다. “제가 지금까지 쓴 기사를 보셨다면, 모를 수가 없죠.” 그의 눈빛에서 자신감을 충분히 회복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래. 김태원 기자의 기사들을 보면, 그가 유능하다는 건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언론을 통해 여론을 이끄는 방향을 알고 있는 기자라는 건 기사 첫 줄만 봐도 눈에 보이는 법이니까. 다만, 이번엔 그가 먼저 내게 찾아왔다. 아쉬운 건 내가 아니라는 것이지. 물론, 그가 찾아오지 않았다면, 미래 문자 때문이라도 내가 먼저 접근했겠지만, 그러한 사실을 김태원 기자가 알 리가 없으니까. 그렇기에 쉽게 손을 잡을 필요는 없다. 상대방의 입장에선 더욱 애타고 간절해야 손을 잡을 때 더 짜릿한 법이지. “제가 거부한다면 어떻게 되죠?” “손에 들고 계신 사진들을 내일 전 국민이 함께 보게 되겠죠.” 한정일보는 전국적으로도 손에 꼽히는 신문사다. 그의 말은 허언이 아니다. “공개되어도 저에게 타격은 없습니다. 기껏해야 열애 중이라는 의혹, 스캔들이나 나겠죠. 송병준 의원 측에서 알아차려도 이미 늦어서 손쓰긴 힘들고요.” “그렇죠. 송 의원은 이미 배지를 떨어뜨린 것이나 다름없으나 감히 지훈 씨한테 터치를 할 수는 없을 테니까요.” 김태원 기자의 입꼬리가 가볍게 휘어졌다. “다만, 형제들은 다르게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역시 보통내기가 아니다. “국회에서도 그렇게 유능한 마돈나를 손에 넣었다는 사실을 다른 형제들이 알게 되면 어떻게 생각할까요? 그것도 이렇게 은밀하게 접촉을 했다면 말이죠.” 훌륭하다. 본질을 꿰뚫고 있다. 내 최종 목적이 결국은 형제들과 싸워서 권좌에 오르는 것이고. 지금 내게 가장 필요한 건 ‘시간’이라는 사실을 알아야만 나올 수 있는 대답. 그래. 이 정도 냉철함은 가지고 있어야 나와 손을 잡을 만하지. 미래 문자에서 내가 그와 오랜 친구였다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물론, 초면에 사실대로 인정할 필요는 없었다. “저는 권좌에 욕심이 없습니다.” “그럴 리가요.” 그는 내게 한 발자국 더 다가왔다. “넷째 최지성 씨 빼고는 형제분들 모두 정계에 몸을 담고 계시잖습니까? 셋째 쌍둥이인 최은실 씨도 남편을 통해서 걸치고 있고요. 그런데 단순히 늦게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양보한다?” 김태원 기자는 고개를 저었다. “절대 그럴 리 없죠. 적어도 제가 아는 최지훈 씨라면 말이죠.” “저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것처럼 들리네요.” “제가 아무것도 모르고 지훈 씨께 접근했을 것 같습니까?” 그의 입가에 여유로운 미소가 걸렸다. “처음엔 그저 의문이었습니다. 수능 만점을 받고 대학 대신 군대를 간 이유가 무엇일까. 그리고 돌연 국회에 들어온 건 무엇 때문일까. 그래서 지훈 씨의 학창시절부터 군인 시절까지 전부 조사했습니다. 그리고 깨달았죠. 아, 정치를 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구나. 그리고 청와대 막내아들이 정치를 한다면, 그 목표는 당연히 대통령이겠죠.” “팩트는 없고 오로지 추론이군요.” “맞습니다. 제 추측이죠. 증거는 없습니다. 하지만 제가 감이 꽤나 좋거든요.” 대화하면 할수록 더 마음에 든다. 내 곁에 있으면 분명 큰 힘이 될 터. 이제 더 이상 간을 볼 필요는 없다. “그러면 이렇게 여쭤보죠.” 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왜 접니까? 이 사진은 다른 형제들에게 가져가도 분명 덕을 볼 수 있을 텐데요.” “최종 승자는 지훈 씨가 될 것 같았거든요.” 김태원 기자는 말을 덧붙였다. “당연히 대통령을 뜻하는 겁니다.” 그의 목소리는 진지하면서도 자신감이 가득 담겨 있었다. “형제들 중 가장 머리가 비상하고. 명문대로 청와대 수뇌부를 가득 채울 만큼 학벌주의이신 최준석 대통령을 거역하고 대학을 포기한다? 이건 어지간한 간덩이로는 불가능하거든요.” 이 기자,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날카롭다. “판을 엎을 수 있는 능력. 다른 형제들에게는 없는 그 능력을 그걸 갖고 있어야만 비로소 권좌에 오를 수 있으니까요.” “그렇다고 칩시다. 내가 당신을 어떻게 믿습니까?” 그는 주머니에서 메모리칩을 꺼냈다. “이게 그 사진의 원본입니다.” 바닥에 툭 떨어뜨렸다. 그리고는. 콰직! 구둣발로 아주 세게 짓밟았다. “사본은 없습니다.” “이것만으로는 부족한데요.” 그는 피식 웃으며 한 걸음 물러섰다. “내일 한정일보 1면.” 김태원 기자의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가득 담겨 있었다. “기사를 보시면 알게 되실 겁니다. 저를 믿을 수 있다는 걸 말이죠.” “기대해 보겠습니다.” “내일 전화 드리죠.” 그 말을 끝으로 그는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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