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미줄 (2) (25/200)

거미줄 (2)2021.11.25.

집무실엔 여전히 침묵이 내려앉아 있었다. 아무리 당 대표에게 의뢰받은 일이라고 한들, 이치현 의원도 우리의 입장에서 쉽게 나설 수 없다는 걸 알기에 강요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렇기에 더욱 누구 하나 먼저 입을 열지 못하고 엄숙한 분위기만 이어지는 상태. 그사이, 나는 다른 이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은밀하게 휴대폰을 만졌다. 보낸 이 47의 음성 메시지. 지금까지의 미래 문자 특성상, 재생한다고 한들 아무도 듣지 못할 게 분명했다. 조심스럽게 손을 움직여 재생 버튼을 눌렀다. -벌써 25년 전 일이지. 휴대폰의 스피커를 통해 들려오는 목소리. 내 귓가에는 선명히 들리고 있었지만, 다른 이들은 여전히 이치현 의원의 눈치만 볼 뿐, 누구 하나 반응을 보이는 인물은 없었다. 예상대로 다른 이들에겐 들리지 않는다. 나는 다시금 음성 메시지에 귀를 기울였다. -그 친구를 만난 건 내가 인생에서 했던 최고의 선택 중 하나라고 생각해. 목소리에 집중하자, 나도 모르게 미간이 움찔했다. 처음엔 익숙하다고 생각했는데, 익숙한 정도가 아니다. 이건 내 목소리다. 지금보다 훨씬 중후하고 말투도 훨씬 점잖게 변했지만, 부정할 수 없는 확실한 내 목소리. -팩트체커의 김태원 사장 말씀하시는 거죠? 뒤이어 들려온 목소리는 마돈나, 임지현 비서관이었다. -그래, 맞아. 그때는 한정일보에서 기자로 일하고 있었지. -어렴풋이 기억나는 것 같긴 해요. 아마 저한테도 한번 알아보라고 지시하셨던 것 같습니다. -기억력이 좋네. -의원님께서 지난 총선 중에 한 번 더 확인해 보라고 하셨으니까요. -참, 그랬었지. 스피커를 통해 나의 여유로운 웃음소리가 슬쩍 흘러나왔다. -그때부터 인연이 이어지고 있는 건가요? -그렇지. 서로 돕고 도우며 버틴 게 벌써 25년이야. 내가 믿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친구지. -대단하네요. 특히 지난 선거에서는 그분의 활약이 대단했으니까요. -아마 그 친구가 아니었으면 이 국회의원 자리에 내가 앉아 있지 못했을 수도 있어. 진심이라는 듯 목소리에선 진한 여운이 묻어나왔다. -새삼스럽지만, 관계라는 게 참 대단한 것 같아요. 누군가를 대통령으로 밀고, 다른 한 사람을 낙선시키려고 노력하는 이유가 그저 사람과의 인연 때문이라는 거잖아요. 일국의 운명이 정해지는 건데. -참 신기한 일이지. 나도 사람간의 관계라는 게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대단한 의미라고 생각해. 단순히 지난 총선뿐만 아니라, 그 친구 덕분에 내 목숨까지도 건졌으니까. -그때 그 일 말씀하시는 거죠? -그래, 맞아. 자칫하다간 완전히 정치 인생이 끝날 뻔했지. 20대에는 형제들에게 휘말려서 구치소까지 다녀왔으니까. -다시 생각해도 그 일은 진상이 밝혀져서 잘 마무리 되었으니 다행인 것 같습니다. 오히려 도움이 되었기도 하고요. 당시엔 어찌나 당황스러웠는지……. 그런 면에 있어서 의원님께서는 모든 선택에서 늘 최선의 결과를 이끌어내시는 것 같습니다. 특히 사람에서는 더욱더 그렇고요. -그래서 내가 자네도 얻었지 않나. -하하, 감사합니다. 그 대화를 끝으로 음성 메시지가 종료되었다. 허.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나올 뻔했다. 이번 문자에는 굉장히 많은 정보가 담겨 있었으니까. 그러나 지금 상황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이러한 회의를 하는 도중에 방금과 같은 메시지가 도착했다는 건 이유가 정해져 있으니까. “자자.” 이치현 의원은 침울해 있는 보좌진을 보며 애써 무겁지 않은 척 목소리를 냈다. “고민해 보고 할 수 있으면 오늘 퇴근 전까지 이야기해 줘. 늦기 전에 다른 의원실과 이야기해 봐야 하니까. 그렇다고 강요하는 건 아니니까 부담 갖지 말고.” “알겠습니다.” “그래. 나가서 다들 일 봐.” 그 말을 끝으로 회의가 마무리되려는 찰나. “제가 하겠습니다.” 내가 입을 열었다. 일어나려던 김치호 비서관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굳은 채 화들짝 놀라 나를 바라보다가 다시 엉덩이를 붙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한유라 보좌관과 강선우 보좌관 및 다른 비서들은 물론이고 이치현 의원까지 눈이 휘둥그레진 채 내게 시선을 고정했다. 그래. 놀랄 수밖에.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중에서는 대한당과 가장 긴밀한 인연이 있는 내가 그쪽을 공격하겠다고 목숨까지 걸고 나선 것이니까. 허나, 이 문자의 음성 메시지를 들은 순간, 이 일은 내가 맡을 수밖에 없었다. “진심이야?” “예. 은밀하게 처리하겠습니다.” 이치현 의원은 내 눈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지훈이만 남고 나머지는 다 나가 봐.” 다른 보좌진들은 여전히 당황스런 얼굴로 나를 곁눈질하다가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둘만 남은 사무실에서 이치현 의원은 무거운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지훈아.” “예, 의원님.” “너에게 부담 주려고 꺼낸 이야기가 아니야. 절대 강요하고 싶지도 않고.” “알고 있습니다.” “네가 하지 않아도 돼. 아무리 네가 최준석 대통령의 아들이라도 이번 일이 발각되면 위험해질 수 있어.” 혹시나 내가 아버지와 집안 때문에 억지로 떠맡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양. 나는 고개를 저었다. “각오하고 있습니다. 다 알고 결심한 거고요.” 내 눈빛을 본 이치현 의원은 마지막으로 물었다. “그래. 후회는 없겠지?” “물론입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굳게 닫힌 서랍을 열어 책상 위로 서류를 올려놓았다. “이번 법안 세부 내용이야. 환노위에 엊그제 상정된 거라 다른 의원들도 자세히는 모르고 있어. 일단 여기서 우리 당에서 주시하는 건…….” * * * “할 수 있겠어?” “예. 빠른 시일 내로 처리하겠습니다.” “그래. 진행되는 대로 보고해.” “알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꾸벅이고 집무실 밖으로 나왔다. “이야기는 잘했어?” 상황이 상황인지라, 김치호 비서관도 걱정스러운지 조심스런 목소리를 냈다. “예. 저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어, 그래.” 나는 집무실을 뒤로하고 홀로 화장실에 들어가 문을 걸어 잠갔다. 혼자만의 공간. 방해하는 사람이 사라지자, 머릿속엔 이치현 의원에게 들었던 법안 내용과 진행사항을 뒤로 미뤄두고는, 미래 문자를 통해 들었던 음성 메시지의 내용을 되짚기 시작했다. 이번 문자는 단순히 내가 국회의원의 자리에 오른다는 사실만을 알려 준 게 아니었다.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방대한 자료가 담겨 있었으니까. 처음에 언급되었던 팩트체커의 김태원 사장. 마돈나와 나눈 대화를 확인해 보면, 그는 내가 평생을 두고 믿을 수 있는 인물 중 하나라는 게 분명하다. 그리고 현재 그는 한정일보에서 기자로 근무하고 있으며. 지금 상황에서 문자가 도착한 걸 생각하면, 이번 건을 믿고 맡기기에 최적화된 인물이라는 뜻. 이뿐만이 아니다. 음성 메시지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마돈나에게 했던 말이었다. -그래, 맞아. 자칫하다간 완전히 정치 인생이 끝날 뻔했지. 20대에는 형제들에게 휘말려서 구치소까지 다녀왔으니까. 굉장히 중요한 사실이다. 내가 20대에 구치소를 다녀올 만한 위기가 찾아온다는 것. 이제 22살이니 올해로부터 8년 내에 분명 심각한 일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것도 형제들 때문에. 어지간한 사건 하나 때문은 아닐 것이다. 내가 쉽게 당하는 성격은 아니니까. 아마도 오래도록 함정을 파고 기다렸겠지. 엮이고 엮였을 가능성이 크니, 머지않아 형제들이 움직일 가능성도 있다. 그리고 이러한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인물이 김태원 기자라는 사실. 단순히 이번 일을 맡기는 것 외에도 그와 친분을 쌓고 오래도록 관계를 유지해야 할 만한 필요성이 생겼다. 아니, 반드시 해야만 한다. 또한, 미래에도 마돈나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 말인즉슨, 그녀의 능력이 출중한 것은 물론, 충분히 믿고 함께할 수 있을 만한 인물이라는 뜻까지 내포하고 있다. 임지현 비서관을 택한 내 선택이 옳았다는 걸 증명하는 셈이지. 그리고 그녀는 나를 ‘의원님’이라고 부르고 있다. 내가 미래에 국회의원이 된다는 건 예상했던 결과기에 놀랍지 않다.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밟아야만 하는 과정이니까. 국회의원이 되는 것과 ‘대통령’이 될 수 있느냐, 없느냐는 천지차이다. 중요한 건 ‘언제 당선되느냐’인데 그걸 알 수 없다는 게 아쉬울 따름. 마지막으로 하나 더. 이번 문자의 보낸 이는, 지금까지의 20 주변을 머무르던 숫자와 크게 달라졌다. 무려 47. 처음 보낸 이를 보았을 때만 해도 정보에 크게 혼동이 오는가 싶었지만, 담고 있는 내용은 그간의 정보들을 모두 모은 것과 비교해도 손색없을 수준이었다. 보낸 이 47과 영상에서 내가 말했던 25년 전. 그 25년 전은 내가 살고 있는 지금을 뜻하고 있다. 이를 기반으로 생각하면, 이제는 보낸 이의 정체에 대해서 어느 정도 가늠이 가기 시작했다. 지금까지의 도착했던 일련의 문자들에서 보았던 사건들이 일어난 시기를 비교해 보면 거의 확실하다고 볼 수 있지. 여태껏 추측했던 홀수, 짝수 등의 다른 패턴은 모두 버려도 된다. ‘그것’ 하나면 보낸 이의 정체에 대해서는 모두 일치하게 되니까. 물론, 99%의 확신이 든다고 해도, 1%의 가능성을 버려서는 안 된다. 아직 내가 찾지 못한 추가적인 패턴이나 다른 뜻이 담겨 있을 수도 있으니까. 그렇다고 자만해서는 안 된다. 확신을 갖고 있을 때 가장 위험해지는 법. 몇 개의 미래 문자를 더 받아 보면 아마 확실해지겠지.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혔다. 벌써부터 미래를 두려워하며 걱정할 게 아니라, 그 미래를 대비해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나는 화장실에 다른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하고는 2G 휴대폰을 꺼내 마돈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임지현입니다. “어, 나야.” -예. 도련님. 최준용 검사 관련 사안이라면……. “아니야. 최준용 검사 건은 미뤄 두고 우선 한정일보의 김태원이라는 기자에 대해 한번 알아봐 봐. 최대한 상세하게.” -네,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나와 거울 앞에 섰다. “후우.” 옷매무새를 정돈하고 입술 근육을 풀며 다시금 차분한 얼굴로 돌아갔다. 아무 일 없던 듯이. 늘 그랬던 대로. 마음을 가라앉히고 태연하게 의원실로 돌아갔다. 사무실에 들어가는 순간. “최 비서.” 기다렸다는 듯이 한유라 보좌관이 내게 다가왔다. “예, 선배님.” “나랑 잠깐 이야기 좀 하지.” 한유라 보좌관은 차가운 얼굴로 먼저 의원실을 빠져나갔다.

16557367010776.jpg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