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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줄 (1) (24/200)
  • 거미줄 (1)2021.11.24.

    자고로 정치에서 진정한 힘이란, 국회의원 배지, 서울시장이라는 타이틀 따위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정계는 물론, 재계 및 각종 단체에 널리 퍼져 있는 거미줄과도 같은 촘촘한 인맥. 그리고 언제든 나를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는 심복. 이 모든 게 있어야만 정치에서 제대로 힘을 쓸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되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한들 모두가 정계에서 힘을 가질 수 있는 건 아니다. 인맥과 심복은 진정한 힘을 갖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일 뿐, 그 이후부터가 진짜 싸움이니까. 다만, 그 기반이 깨져 버릴 경우, 쌓아 두었던 견고한 성은. 탄탄하기 그지없어 보이던 천하제일의 요새는 파도 앞의 모래성처럼 허망하게 무너져 버린다. ‘피고인에게 벌금 500만 원 및 당선 무효형을 내린다.’ 송병준은 항소심에서 무참하게 패배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임지현 비서관의 공로였다. 자신의 심복이라고 믿고 있었던 마돈나의 마음을 확실히 잡지 못했고. 그녀가 배신하도록 내버려둔 탓. 그게 송병준의 패착이었다. 물론, 자신의 실수를 무마하기 위해 임지현 비서관의 목숨 줄을 끊으려했으나, 어쨌건 간에 시도는 실패로 끝났으니까. 송병준 의원은 항소심이 끝난 직후, 바로 상고했다. 그러나 그 희망은 오래가지 않았다. 증거는 너무나도 확실했고. 대한당에서도 커버할 수 없었으니까. 마돈나가 가져온 자료들 사이엔, 단순히 부정선거의 증거만이 있는 게 아니라, 그간의 온갖 부정부패의 증거까지 담겨 있었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대법원에서는 상고를 기각했고. 그대로 송병준 의원은 금배지를 내려놓고 前 국회의원 신세로 전락했다. 거기서 끝나면 좋았겠지만, 다른 부패의 냄새를 맡은 검사들은 송병준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대한당의 가호도 사라진 마당인지라, 오래지 않아 그의 성추행 범죄들을 비롯한 온갖 더러운 일들이 까발려지겠지. 사필귀정이다. 송병준이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던 광주광역시 남구는 자연스레 공석이 되었다. 그 자리의 주인공은 보나마나 민중구가 차지할 터. 지난 총선에서 공천 결과에 불복하며 탈당 후, 무소속으로 출마까지 했던 그였지만, 벌써부터 대한당에서 그의 복당을 허용하자는 이야기가 돌고 있으니, 더 말할 것도 없지. 내년에 펼쳐질 보궐 선거에서 공천은 민중구가 받을 테고, 그는 5선 의원으로 화려하게 부활하며 여의도에 얼굴을 비칠 것이다. 모든 게 계획대로 흘러간다. 송병준 의원은 더 지켜볼 필요도 없었다. 사건 자체가 마무리되었고. 다음 타깃은 지난 TV 인터뷰에서 보았던 최준용 검사. -생각보다 훨씬 더 깔끔했습니다. 마돈나, 임지현 비서관에게 최준용 검사에 대한 조사를 맡겼었다. 정치판에서 누군가와 긴밀한 관계가 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약점을 손에 쥐는 것만큼 쉬운 방법이 없으니까. 다만, 결과는 원하던 바와 조금 달랐다. -청렴하다고 알려지긴 했어도, 분명 털다 보면 먼지가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아예 없는 거야?” -구태여 흠을 잡으려 한다면 잡을 수 있겠지만, 워낙 자잘한 것들이라서 큰 효과는 없을 것 같습니다. 마돈나는 송구스러운 건지, 분한 건지 입술을 깨문 듯한 발음으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아니야. 어느 정도 예상은 했어.” 마돈나도 흠을 발견하지 못했다라……. 오히려 이게 전화위복이 될 수 있다. 마돈나의 정보 발굴 능력은 어지간한 정계 고위층 인물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다시 말해, 쉽게 흠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건, 다른 사람들도 파악할 수 없다는 뜻이다. 결국 워낙 결백하기에 도리어 누군가가 접촉을 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 때가 많이 묻은 윗분들이 탐낼 만한 인재지만, 그럴수록 더 깨끗한 최준용 검사에게 잘못 접근했다가 흔적이라도 남기면 후일에 큰 코 다칠 수 있으니까. 그리고 그간 그의 행적을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얼마 전, 재벌가 집단 마약 투약 사건을 비롯해 어느 분야건 간에 모두 ‘성역 없는 수사’를 하며 존재감을 뽐내고 있었으니까. 그에게 약점이 있었다면, 오히려 재벌가는 물론이고 다른 높으신 양반들이 이미 최준용 검사의 목줄을 잡고 흔들고 있었겠지. “이러니까 더욱 끌리는데.” 재벌, 정치인들을 무서워하지 않고 모두 때려 부수고 뒤엎을 수 있는 검사. 그리고 그러한 과정을 통해 이미 국민적 인기를 얻은 인물. 후일, 내가 더 큰물로 나아가려면 최준용 검사처럼 청렴하고 강직한 이미지를 가진 사람과 손을 잡아야 한다. 또한, 약점이 없기에 다른 누군가를 무덤으로 보내기도 훨씬 더 수월할 테고. 생각하면 할수록 더 탐이 난다. 하지만 이런 인물은 단순히 내가 손을 뻗는다고 잡을 만한 스타일이 아니다. 본인이 원했다면, 진즉에 정치 검사가 되었을 테지. 그는 그럴 만한 능력과 자질을 갖춘 인물이니까. 그렇다고 포기할 생각은 없다. 내 손을 잡지 않으려고 한다면. 어떻게 해서든 내 곁에 설 수밖에 없도록 만들면 되는 법이니까. 지금까지 내게 갖고 싶은 게 생기면, 어떠한 수단을 동원해서든 늘 손에 넣었었다. 아버지의 총애를 받기 위해 10년이 넘도록 뼈가 빠지도록 공부해서 수능 만점을 받았고, 그 노력의 결실을 포기하고 군대에 간 것은 물론. 아버지를 대신해 총까지 맞았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원하던 걸 손에 넣었던 게 나다. 늘 그래왔었기에. 이번에도 그럴 것이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왕좌에 앉는 그날까지. “주변 인물에 대해 알아봐. 친구, 친척, 사돈의 팔촌까지 상관할 것 없이 관련된 인물이라면 전부 훑어.” -네, 알겠습니다. * * * 벌컥. 의원실의 문이 열리며 이치현 의원이 모습을 비췄다. 우리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찰나. “지금 급한 업무 처리 중인 사람 있어?” 그가 심각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뇨, 없습니다.” “그러면 다들 들어와 봐. 아, 태용이랑 한나는 들어오지 말고.” “예.” 나는 곧장 메모장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일 있나요?” 8급 오태용 비서가 조심스런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아니요. 저도 잘 모르겠네요.” 김치호 비서관을 포함한 보좌관들의 표정을 보아하니 그들도 피차일반이었다. 분명 무슨 일이 있긴 있는 것 같은데……. 보좌관들과 함께 집무실에 들어가자, 이치현 의원이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다들 이번 원자력 발전소 추가 건설 사업 관련 법안 내용은 확인했지?” “예, 확인했습니다.” 강선우 보좌관이 먼저 입을 열었다. “문제가 조금 많던데요.” 나와 같은 의견이었다. 원자력 발전소 추가 건설 사업 법안. 얼마 전, 대한당에서 발의한 법안으로 원자력 발전소를 추가로 건설하고 기존의 시설들을 보수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고용 불안이 심하고 실업률이 높은 현재 상황에서 확실하게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는 법안이었다. 다만, 문제는 그 법안으로 인해 원자력 발전소 건설 환경에 대한 규제가 꽤나 널널해질 수도 있다는 것. “이대로 통과되면, 환경 파괴가 장난 아닐 것 같던데요.” “맞아.” 이치현 의원은 답답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무리 일자리 창출에 기업들이 큰 역할을 한다지만, 기업들한테 너무나도 유리한 법안이야.” “대한당이 기업 측으로부터 로비를 받은 겁니까?” “그럴 가능성이 크지.” 집무실엔 무거운 분위기가 내려앉았다. 대한당에서 발의했고. 현재 여당에서 과반을 넘게 차지한 국회의 상황을 생각하면, 아마도 법안은 통과될 가능성이 굉장히 높다고 봐야 했다. “우리 민국당에서 일단 필리버스터를 걸 거야.” 국회선진화법을 통해 당장 통과되는 건 지연시킬 수 있다. “하지만 오래 가진 못할 거야.”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지금 대한민국의 실업률은 21세기 들어 최고 수치를 기록하고 있다. 민국당에서는 이번 법안이 통과되는 걸 저지하는 이유가 환경 파괴가 극심하기 때문이지만, 대한당은 분명 언론 플레이를 통해 민국당이 시간 끄는 걸 국민들에게 일자리 주기를 방해하는 것처럼 보이도록 만들 게 뻔하다. 당연한 말이지만,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정당은 살아남을 수 없다. 그러면 결국 여론의 성화를 이기지 못하고 민국당도 필리버스터를 종료하는 데 동의할 테고. 이번 법안은 환경 파괴를 막는 규제들을 완화하는 초안 그대로 통과될 것이다. 결국 민국당만 민심도 잃고, 환경도 잃으며 망가지는 것이지.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까?” 한유라 보좌관의 물음에 이치현 의원은 집무실의 문이 닫힌 걸 확인하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안 그래도 방금 백태성 의원님 뵙고 왔거든.” 백태성 의원. 민국당의 수장이자, 당대표로 있는 인물. 듣자마자 보통 건이 아니라는 직감이 왔다. “언론에 미리 법안 내용을 흘리라고 하시더라고.” “…….” 이거 아무래도 생각보다 꽤 위험한 일이다. 이치현 의원은 환노위, 환경노동위원회에 속해 있다. 그렇기에 우리 의원실이 미리 법안을 파악할 수 있었던 것이지. 그리고 중요한 건. 이번 건은 이치현 의원이 직접 움직일 수 없다. 만에 하나, 그가 움직였다는 게 걸리는 이상, 그의 의원직까지 위협될 수 있는 상황이니까. 즉. 여기 있는 우리들 중 누군가가 행동해야 한다. “법안이 정식으로 공개되기 전에 미리 알려서 논란으로 이끌 생각인 거죠?” “그렇지.” 집무실엔 침묵이 내려앉았다. 언론에 법안 내용을 흘리는 건 어렵지 않다. 정보를 얻으려고 안달 난 기자들은 이미 줄을 섰으니까. 허나, 문제는 그 다음이다. 이번 법안은 나의 아버지, 최준석 대통령이 지지하고 있다. 법안이 통과되지 못하고 폐기될 경우, 대한당에서는 당연히 책임을 묻기 위해 정보의 출처를 찾을 테고. 어지간한 기자들은 대한당 고위 간부의 협박을 이기지 못하고 출처를 발설하게 될 터. 그러면 결국 그 정보를 제공한 인물은 대한당에게 제대로 각인되고 만다. 아무리 민국당에서 일하며 앞으로도 민국당에 충성한다고 한들, 대한당 160명의 의원들의 눈에 찍히는 건 차원이 다른 일이다. 정식으로 선거에 입후보하기도 전에 정치적으로 사형 선고를 당하는 것과 같다. 찍힌 인물이 특정 지역구에 출마한다면, 그를 찍어 누르기 위해 대한당은 압도적인 인물을 보내고 그를 전폭적으로 지지할 테니까. 그러면 보나마나 결과는 뻔하지. 대한당은 늘 그래 왔다. 그렇기에 거대 여당으로서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지. 즉. 한 마디로 정리하면. 만에 하나, 출처가 공개되어 정체가 발각되더라도 이치현 의원에게 책임을 떠넘기지 않고 홀로 모든 걸 안고 의원실을 떠날 각오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치현도 이처럼 무거운 목소리로 말하는 것이겠지. “혹시 자원할 사람 있나?” 역시나 모두가 시선을 피했다. 천하의 한유라 보좌관이라고 해도, 벌써부터 거대 여당에게 찍히는 건 두려울 수밖에 없으니까. 나 또한 마찬가지다. 지금 당장 믿을 수 있는 기자도 없을뿐더러. 아무리 대통령의 아들이라고 해도 이번 일이 발각되는 순간, 아버지의 눈 밖에 날 게 뻔하니까. “그래. 쉽지 않은 일이야. 이해해.” 이치현 의원도 이해한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정 안 되면 어쩔 수 없지.” 그런데 그 순간. 지잉지잉-. 휴대폰에 진동이 울렸다. 문자가 올 때 특유의 진동음. 회의실에 들어오기 전, 분명 무음 모드로 바꿔 놓았다. 그런데 진동 소리가 울렸고. 회의실에 있는 그 누구도 이 진동 소리를 의식하지 않았다. 마치 못 들은 것처럼. 아니, 못 들은 게 확실하다. 그 말인즉슨. 이 알림은 평범한 게 아닐 가능성이 굉장히 크다는 것. 나는 다른 이들의 눈에 보이지 않도록 슬며시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보낸 이: 47 -음성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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