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델로 (3) (23/200)

오델로 (3)2021.11.23.

정치판이란 오델로와 같다. 대한당과 민국당이 서로 섞일 수 없는 흑백처럼 섞일 수 없는 것만 같아도. 놓는 수 하나에 모든 게 뒤집어질 수 있다. 물고 물리며 어떻게든 연결고리가 이어져 있는 곳이야 말로 정치판이니까. 흑백의 구분 따윈 필요 없다. 내 아군인지, 적군인지. 그리고 내 손을 잡을 사람인지, 잡지 않을 사람인지. 그 모든 건 나의 수에 달려 있으니까. 내가 어떤 카드를 꺼내느냐에 따라, 내 주변을 흑으로 만들지, 백으로 만들지가 정해지는 법이지. 내가 송병준 의원의 부정선거 핵심 증거 자료들을 직접 터뜨리지 않고 민중구 의원에게 넘긴 것도 이와 같은 이치다. 어차피 광주는 대한당의 땅. 내가 나서서 송병준을 무너뜨린다고 한들, 나에게 떨어지는 것은 없다. 물론, 이치현 의원의 체면이 올라가는 것과 민국당의 어깨가 올라가는 것 정도야 있겠지만, 그건 일개 의원실 비서인 나에게는 큰 이득은 없는 법이지. 당연히 광주에다가 민국당의 깃발을 꽂는 건 불가능하고. 그렇다면 오히려 그 자리를 간절히 원하는 민중구에게 빚을 지게 만들어서 후일을 도모하는 게 낫다. 이뿐만이 아니다. 여기서 내가 아무리 이치현 의원을 통해서 공표한다고 한들, 이미 오동렬 장관을 박살낼 때부터 내 영향이 컸다는 소문이 알음알음 퍼지고 있는 상황. 애써 존재감을 지우기 위해 형제들끼리 싸움을 부추겨 뒀는데 벌써 나서서 형제들의 견제를 받을 필요는 없으니까. 또한, 대한당을 적으로 돌리고 싶지도 않고. 아무리 대한당이 적폐, 독재라고 한들 나의 아버지가 이끄는 당이다. 언젠간 돌아갈 수 있는 여지는 남겨 둬야 하니까. 마지막으로 내가 움직이게 되면, 결국 나와 손잡은 마돈나가 나설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다. 당연히 송병준 의원의 타깃은 마돈나, 임지현 비서관이 될 터. 고의든, 미필적 고의든 간에 이미 한 번 죽이려고 했었던 전적이 있는 인물에게 두 번은 어렵지 않을 테니까. 이번 선거 자료엔 송병준 의원의 정치적 목숨이 달려 있기도 하고. 임지현 비서관을 죽음 끝까지 몰아갔던 범인조차 아직까지 잡히지 않은 상태니 더욱 더 위험하지. 그녀의 능력을 증명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이미 부정선거 자료들을 확인해 본 결과, 내용물은 짱짱하기 그지없었다. 어느 정도 능력에 대한 사이즈는 나온다는 것이지. 또한, 추가로 마돈나의 능력을 검증할 수 있는 기회는 앞으로도 많다. 굳이 위험성을 무릅쓸 필요가 없다는 뜻. 그래서 임지현 비서관은 민중구 의원에게 자료를 넘기고 이번 사건에서 빠져 잠적한 느낌을 주기로 결정한 것이다. 나와 함께 손잡기로 결정한 이상, 단순히 지금 한두 건의 임팩트보다도 앞으로의 미래를 봐야 하는 법이니까. 이처럼 단순해 보이는 정치 활동에는 수많은 이유가 담겨 있다. 촘촘한 먹이사슬로 엮여진 약육강식의 정치판에서는 그렇지 못하면 살아남지 못하니까. 그렇기에 나는 앞으로도 그저 오델로를 하듯, 수를 하나하나 놓으면서 존재감을 죽인 채로 천천히 국회를 나의 편으로 잠식해 나가면 된다. 그동안 형제들은 서로 열나게 싸우고 있으라지. 나중에 피투성이가 되어 있으면 한 번에 집어삼켜 버릴 테니까. * * * -안녕하십니까, 민중구입니다. TV 화면 속 민중구 前의원은 큼지막한 서류 봉투를 품에 안고 검찰청 앞에 섰다. 서류 봉투의 겉면에는 ‘고발장’이라는 글자가 대문짝만 하게 적혀 있었다. -며칠 전, 저희 사무실로 익명으로 제보가 도착했습니다. 송병준 의원의 부정선거에 대해 조사해달라며 관련 자료들을 보내 주셨죠. 제보자는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이미 도망을 친 상태였습니다. 그는 정의감이 묻어나오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저희 측으로 들어온 자료를 확인해 본 결과, 이건 너무나도 명백했습니다. 부정선거. 아니, 그걸 넘어서 이건 선거가 아니라 사기 그 자체였습니다. 저는 오늘 이 부정선거에 대한 자료를 검찰에 고발하여 부정선거의 진상을 낱낱이 밝히려고 합니다. 그의 목소리는 TV로 생중계되었다. -같은 지역구에 출마했던 경쟁자이자, 한 명의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광주광역시의 시민으로서 부당한 행태를 지켜볼 수 없기에……. 민중구 의원은 한참동안 검찰청 앞에서 법적 철퇴, 올바른 선거, 공정한 기회를 줄줄이 읊으며 허울 좋은 명목을 드러냈다. 사실, 보여주기식이다. 정치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선거법은 단순히 증거 자료로만 판결이 판가름 나는 게 아니라, 국민의 의견이 굉장히 크게 반영이 된다. 그런 면에서 생각해 보면, 민중구는 여론을 흔들기에 아주 최적화된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것이지. 저 정도 자료에, 전직 4선 의원의 노련한 여론 흔들기까지. 국민들의 분노에 2심 일정은 당겨질 것이고. 아마 오래지 않아 송병준 의원은 배지를 내려놓게 될 터. 가만히 앉아서 지켜보기만 하면 된다. 지이잉. 휴대폰에 전화가 걸려 왔다. 평소에 사용하는 휴대폰이 아닌, 2G폰. 발신인은 한 명밖에 없다. “어, 나야.” -도련님, 지금 잠깐 통화 가능하십니까? 휴대폰 너머에선 마돈나, 임지현 비서관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어, 말해.” -지시하셨던 대로 평소 살던 집은 처분했습니다. 당분간은 경기도 일산에 있는 오피스텔에서 지내도록 하겠습니다. “가족들은?” -잠깐 쉰다고 연락해 뒀어요. 장소는 말하지 않았고 부모님도 딱히 별 말씀 안 하셨고요. 다른 사람들도 아니고, 부산에서 내로라하는 유지라고 들었으니 송병준 의원 사람들이 찾아가서 위협하는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지. “그래. 당분간 몸 숨기고 지내고 있어. 조만간 연락할게.” -알겠습니다. 필요하시면 언제든 말씀해 주세요. “쉬어.” -들어가십시오. 나는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이 정도면 마돈나와 송병준 의원의 일은 일단락되었고……. 다음 타깃을 노릴 시간이다. 리모컨을 돌리자, 마이크를 들고 있는 기자와 그 옆에 앉아있는 정장 남성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얼마 전에 ‘재벌가 집단 마약 투약 사건’을 해결한 최준용 검사님을 만나보겠습니다. 우선 한 명의 시민으로서……. * * * 경상북도청, 도지사실. “형님. 이거 아무래도 분위기가 심각합니다.” 셋째 최지곤은 심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버지께서 아무래도 슬슬 구도를 굳히려고 하시는 것 같아요.” 이 사무실의 주인, 첫째 최지만은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 “갑자기 왜?” “제가 엊그저께 막내 녀석을 만나 봤거든요?” “지훈이?” “예.” “그 녀석 얼마 전에 국회 들어갔다면서.” “맞습니다. 그래서 한 번 만나봤는데…….” 최지곤은 한숨을 푹 내뱉었다. “아무래도 지훈이도 이용당한 것 같더라고요.” 그러나 첫째 최지만은 쉽게 설득당하지 않았다. “막내 놈이 그렇게 단순하진 아닐 텐데. 무려 수능에서 만점 받고 전국 수석을 한 녀석이야. 영악한 녀석이라고” “아니에요, 형님.” 셋째 최지곤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막내가 어렸을 때부터 공부만 해서 사회 물정을 아예 모르더라고요.” “그러면 수능을 그렇게 잘 봐 놓고 대학은 왜 안 간 건데?” “제가 슬쩍 이야기해 봤는데, 막연한 반항심 같은 거였더랍니다. 어렸을 때부터 매일 공부만 하면서 아버지께 한국대, 한국대 소리만 듣다 보니 한 번 반항해 본 것 같더라고요. 근데 막상 그러고 나니까 아버지가 워낙 두려워서 어머님께 한 소리 듣고 군대를 간 것 같아요.” “……그래?” “예. 일단 아버지도 자기 말씀을 들었으니까 막내를 따로 내치지 않은 거고요. 그림이 딱딱 그려지잖아요?” 최지만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싸한 이야기였다. 셋째 최지곤은 당연히 최지훈에게 들은 내용이었고. 첫째는 최지만은 형제들 중에서 그나마 최지곤을 제일 믿고 있었기도 하며. 의심스럽긴 하나, 셋째가 이렇게 어필할 정도면 자신에게 말하지 못해도 확신할 만한 다른 이유가 더 있다는 뜻으로 볼 수 있었으니까. 최지만은 자세를 고쳐 잡으며 물었다. “그나저나 대체 뭘 했는데 이용당했다는 거야?” “아버지께서 막내를 국회로 보내신 이유에 대해 제가 들었어요.” 최지만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사실, 그전에 제가 청와대에서 슬쩍 흘러나온 정보를 들었어요. 어쨌든 간에 지훈이가 머리가 기발한 건 사실이니 나중에 둘째 형을 보필하도록 하기 위해 국회로 보냈다고요.” 예상치 못한 말에 첫째의 눈가가 떨려 왔다. “……뭐?” “그래서 지훈이한테 물어보니, 사실이라고 하더라고요.” 최지만의 얼굴에 노여움이 피어올랐다. 동생의 말이 진실이라면, 아버지는 둘째를 자신의 후임으로 거의 확정한 것과 다름없었으니까. 물론, 둘째가 권좌를 이을 유력한 후보라는 건 최지만 본인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허나, 본인이 정치에 늦게나마 뛰어들었고. 아버지의 후원 없이 도지사 선거에서 당당하게 당선되었다. 게다가 자신은 장남이다, 장남.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자고로 왕의 핏줄은 첫째가 잇는 게 당연한 사실. 그렇기에 시간이 흐르면 언젠간 아버지가 자신 쪽으로 돌아서리라고 믿고 있었다. 허나, 상황이 지금처럼 돌아간다면, 왕좌에 오르는 건 자신이 아닌 둘째 동생이 될 터. “형님. 아버지 나이가 올해 일흔 하나입니다, 일흔 하나. 아버지도 예전 같지 않으실 겁니다. 이제 슬슬 저희도 준비해야 돼요.” “후우우.” 첫째 최지만은 눈을 감고 깊게 숨을 내뱉었다. 조용히 아버지의 간택을 기다릴 시간은 지났다. 이제 슬슬 움직이지 않으면 둘째가 권좌에 올라 자신의 모가지를 날리는 걸 손가락 빨며 지켜보는 수밖에 없을 테니까. “그래.” 최지만은 눈을 번뜩 떴다. “준비해야지.” 그는 최대한 가슴을 가라앉히며 말했다. “어차피 최지원 그 녀석을 한 방에 몰아내는 건 불가능해.” “맞습니다. 이미 그쪽에 붙은 사람도 많고, 기반이 꽤 탄탄하게 쌓여 있는 모양새니까요.” 오래 전, 둘째가 사법고시에 패스했을 때부터. 첫째가 의학도의 길을 걸을 때부터 최지원은 아버지의 후임으로 점찍어져 있었으니까. 어차피 시작선이 다르다. 권좌에 오르기 위해서는 극복해야만 한다. “우선은 최지원 그놈의 평판부터 날려야 돼.” “예. 그게 우선이죠.” 셋째 최지곤은 주먹을 꽉 쥐며 물었다. “지훈이도 함께 준비시킬까요?” 최지만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 녀석은 우선 보류해 둬.” 막내는 아직 믿을 수 없다. 머리가 워낙 비상하기에 어떤 생각을 품고 있을지 모르니까. 물론, 그렇다고 해도 아직 위협이 되지는 않았다. 야심을 품고 있더라도, 어차피 이제 막 국회에 입성한 녀석이다. 정치에 정 자도 모르는 풋내기는 도움이 되지 않을뿐더러, 굳이 데리고 있으면서 자신의 전략을 보여줄 필요 또한 없으니까. 그렇다고 해서 눈앞에 있는 셋째 최지곤도 100% 믿는 건 아니었다. 녀석이 야망을 품고 있다는 건 누구보다 본인이 제일 잘 알고 있으니까. 다만, 둘째라는 큰 산을 넘기 위해서는 힘을 합쳐야만 한다. 그만큼 둘째는 아버지의 총애를 한 몸에 안고 있으니까. “우리끼리 진행하다가 필요할 때 부르자고.” “알겠습니다.” 첫째 최지만은 사나운 눈빛을 과감하게 드러냈다. “우선은…….”  

16557366858856.jpg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