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델로 (2)2021.11.22.
“알겠습니다. 제가 식당 예약하고 장소 알려 드리도록 하죠.” 최지훈과의 전화를 마친 민중구는 차의 시트에 몸을 묻었다. “김 실장.” “예.” “오늘 서초에 프라이빗 룸 하나 예약해 놔.” “알겠습니다. 위원장님께서 평소에 가시던 곳으로 하면 될까요?” “그래.” 위원장. 민중구의 현 직책은 환경단체의 위원장. 당연한 말이지만, 그에게 달가운 자리는 아니었다. 이 단체의 위원장이 되기 전, 그의 호칭은 ‘4선 의원’이었으니까. 지난 총선에서 민중구는 5선에 도전했다. 다만, 그 과정은 이전에 비해 훨씬 더 험난했다. 광주광역시 남구는 16년 동안 민중구가 차지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남구 갑’이라는 지역구. 그리고 ‘남구 을’은 송병준 의원의 영역이었고. 허나, 지역구 개편 및 주민 숫자의 감소로 인해 지난 총선부터 ‘남구 갑’과 ‘남구 을’이 통합되었고. 대한당 대표 전상국 의원과 학연이 있던 송병준이 남구의 공천을 받게 되었다. 당의 결정에 불복한 민중구는 탈당 후 무소속으로 총선에 출마했으나, 결과는 당연히 그의 패배. 대한당의 텃밭인 광주에서는 아무리 4선 의원이라고 해도, ‘대한당’이라는 후광이 없으면 당선은 역부족이었으니까. 이렇게 되면, 대한당 측에서는 미안한 마음에 당협위원장 자리라도 주며 차기 총선을 도모하도록 만들지만, 무려 4선이나 당선되었던 前 국회의원이 당협위원장 자리를 갈 리 만무했다. 그래서 그가 향한 곳은 결국 허울뿐인 환경 단체의 위원장자리였던 것. 짐짓 정치에서 멀어진 것만 같아도, 절대 그럴 리가 없었다. 한 번 권력에 맛들인 인간은 남이 끌어내리기 전까지는 절대 포기하지 않으니까. 여전히 그는 먹잇감을 노리는 하이에나처럼 몸을 웅크린 채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는 중이었다. 최지훈은 그걸 알고 민중구에게 연락을 한 것이고. 물론, 민중구는 최지훈의 의도를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김 실장.” “예, 위원장님.” “최지훈이라고 들어봤지?” 운전대를 잡고 있던 머릿속에서 김 실장은 기억 조각을 하나 끄집어냈다. “대통령의 막내아들 말씀하시는 겁니까?” “어, 맞아. 혹시 요즘 소식 들은 거 있나?” “이치현 의원실에서 일한다는 것만 들었습니다.” “특별한 건 없고?” “얼마 전에 오동렬 장관 모가지 날아갔잖습니까?” “그랬지. 이치현 의원이 청문회에서 박살내 버렸잖아.” “그 청문회 자료를 발굴해낸 주역이 최지훈이라는 소문이 있습니다.” “그래?” “예. 확실한 건 아니고요.” “흐음…….” 민중구는 천천히 턱을 매만졌다. 일단 대통령의 아들이기에 별 의심 없이 약속을 잡긴 했으나, 여전히 자신을 만나자고 한 이유에 대해서는 가늠이 가질 않았으니까. 김 실장은 룸미러를 슬쩍 바라보며 물었다. “오늘 저녁에 뵙기로 하신 분이 최지훈입니까?” “맞아. 그런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네.” 차는 매끄럽게 주차장에 멈춰 섰다. 김 실장은 차에서 내려 잰걸음으로 돌아가 뒷좌석의 문을 열었다. 민중구는 옷매무새를 만지며 차에서 내렸다. “자네는 최지훈이 관련 자료랑 최근 행적 좀 조사해 봐.” “알겠습니다.” 그는 김 실장을 뒤로하고 사무실로 향했다. “오셨습니까.” “어, 그래. 미스 김도 점심 잘 먹었어?” “예.” 사무실 입구에 있던 비서가 자신을 향해 말했다. “그리고 조금 전에 퀵서비스로 서류 하나가 도착해서 위원장님 책상 위에 올려뒀습니다.” “알았어.” 민중구는 사무실 문을 열어둔 채 책상으로 향했다. 발신인이 적혀있지 않은 서류 봉투. “미스 김. 이거 어디서 온 거야?” “발신인은 안 적혀 있었습니다. 그 상태로 왔어요.” 민중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서류를 열었다. 그리고 내용물을 확인한 순간. “헙!” 자신도 모르게 놀란 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는 다급하게 발걸음을 움직여 황급히 열려 있던 사무실의 문을 닫고, 커튼까지 내렸다. 꿀꺽. 그의 목울대가 울렁였다. 서류에 든 내용물은 다름 아닌, 광주 남구 의원이자 자신의 눈엣가시와도 같은 송병준 의원에 관련된 자료. 그것도 무려 부정선거의 증거물들이었다. 보는 내내 민중구의 동공이 세차게 흔들려 왔다. “이거라면…….” 송병준 의원을 위협하는 걸 넘어 끌어내릴 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다만, 자료에는 흠이 하나 있었다. “뭐야?” 서류 봉투 안을 살펴봤지만, 내용물은 본인이 본 게 전부였다. “……이런 미친.” 욕지거리가 터져 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손에 들어온 자료들은 제대로 된 증거물로 쓰일 수 없었으니까. ‘기승전’까지는 있지만, ‘결’이 전혀 없는 자료들. 다시 말해 법정에 제출해도 증거로써 효력이 없다는 뜻이었다. 핵심이 빠진 자료들은 그저 정황을 이야기하는 것일 뿐이었으니까. 그는 쿵쿵거리며 사무실의 문을 쾅 열었다. “미스 김!” 민중구는 성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퀵 업체에 전화해서 이 서류 어디서 보낸 건지 알아 봐.” “아, 위원장님.” 미스 김은 들고 있던 전화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안 그래도 방금 확인해 봤는데, 오늘 여기로 온 퀵 주문은 접수된 적이 없다고 해서요…….” “……뭐?” 민중구의 머리에 혼란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어디서 보낸 건지. 왜 자신한테 보낸 건지. 어디까지 알고 있으며, 자신에게 얼마나 협력할 건지 전혀 추측이 되질 않았다. 다만, 확실한 건. 당분간 시간을 비워 둬야 한다는 것. 분명 자신한테 접근할 게 뻔하니까. 그리고 민중구가 다시금 국회로 입성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손길을 잡아야만 한다. 그는 사무실의 문을 세차게 닫고 들어와 휴대폰을 들어 한 곳으로 전화를 걸었다. -예, 최지훈입니다. “네, 도련님.” 민중구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다름이 아니고, 제가 급한 일이 생겨서 오늘은 조금 힘들 것 같은데 다음에 뵙는 건 어떠실지 해서…….” 약속을 미루려는 찰나, 휴대폰 너머에서는 예상치도 못한 말이 귀에 꽂혀 왔다. -서류 때문이시죠? 휴대폰을 쥐고 있던 민중구의 팔이 세차게 떨려 왔다. 그의 동공은 휘둥그레지길 넘어서 튀어나올 듯한 기세. -아이, 뭐 바쁘시면 어쩔 수 없죠. 다음에……. “아닙니다!” 민중구는 다급하게 벌떡 일어서며 양 손으로 휴대폰을 잡았다. “아닙니다, 도련님. 어떻게든 시간 내겠습니다.” -아, 가능하시겠어요? “예. 제가 먼저 가서 기다리겠습니다. 편하게 오십시오.” -네. 그러면 이따 뵈시죠. 최지훈은 여유로운 목소리로 대답을 하며 전화를 끊었다. 민중구의 눈빛은 어느새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드디어 좌천당한 것만 못한 이 신세를 마무리할 기회가 찾아왔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늘 반드시 기회를 잡아야 한다. 황금 동아줄이 될 수 있는 최지훈이라는 기회를. * * * “어서 오십시오.” “민중구 이름으로 예약되어 있을 겁니다.” 민중구라는 이름에 직원의 눈빛이 달라졌다. “아, 네.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직원을 따라가자, 일반인들은 출입할 수 없는 특수한 공간이 펼쳐졌다. 은밀한 그곳에서도 깊숙이 들어가고 나서야 프라이빗 룸이 있는 지하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외부인은 출입할 수 없는, ‘높으신 분’들의 회동 장소. 당연한 일이다. 사람들 눈이 훤한 곳에서 정치인들이 만나 이야기를 하는 건 대놓고 상대 당에게 약점을 공개하는 것과 다름없는 꼴이니까. 실제로 서울에 이런 장소만 손가락으로 셀 수 없을 만큼 널려 있다. 일반인들이 알 수 없을 뿐이지. 똑똑. 직원이 노크하고 문을 열자, 이미 내부에는 민중구가 도착해 있었다. “오셨습니까, 도련님.” 그는 깍듯하게 허리를 접어 인사했다. 숙여진 머리에선 희끗한 머리가 다분했지만, 내가 고개 숙일 필요는 없었다. 정치판이란 게 이렇다. 나이? 유교사회? 그딴 건 중요치도 않다. 그저 힘을 쥐고 있는 사람이. 카드를 쥐고 있는 사람이 절대적인 갑이 되는 곳. 그게 대한민국 정치판이니까. “네, 안녕하세요.” 나도 가볍게 인사를 하며 내부로 들어갔다. 민중구. 4선 의원 출신으로 지금은 국회에 입성도 하지 못한 채 환경 단체에서 명예직으로 이름이나 대신 걸어 둔 양반이다. 물론, 그렇다고 허수아비나 뒷방 늙은이는 아니다. 전직 4선 의원이라는 타이틀은 동전 던지기로 따는 게 아니니까. 다만, 그것도 시간문제긴 하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전직 의원’이라는 타이틀의 힘도 점점 빠지는 게 당연한 법이니까. 상황이 상황인 만큼, 그의 얼굴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여유롭게 웃으며 손짓했다. “앉으시죠.” “예.” 에어컨이 시원하게 틀어져 있는 실내였지만, 민중구의 이마엔 땀이 삐질삐질 흐르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지금 그의 눈에 나는 자신의 목줄을 쥐고 있는 사람이라고 봐도 무방하니까. 한참의 정적이 흐른 후에 침묵을 깬 건 나였다. “위원장님.” “예, 도련님.” “의원이라는 호칭, 그립지 않으십니까?” 민중구의 눈빛에 활기가 차올랐다. “……그립습니다.” “내년 보궐선거에서 복귀하셔야죠.” 그의 목울대가 꿀렁였다. 민중구는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대통령 각하께서 보내신 겁니까?” “그럴 리가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는 전혀 모르십니다.” “…….” “앞으로도 모르셨으면 좋겠고요. 제가 관여했다는 건 아버지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몰랐으면 좋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절대 새어나가지 않도록 주의 하겠습니다.” 그의 목소리에선 일말의 의심도 없었다. 애초에 아버지께서는 이런 사소한 일까지 손대실 만한 분이 아니니까. “감사합니다.” 나는 술병을 들었다. 그는 양손으로 잔을 들었고. 나는 한 손으로 그의 잔을 채워 주었다. “의원님.” “예?” “의원님이라고 불러도 되겠죠? 어차피 의원으로 복귀하실 테니까.” “편하신 대로 부르셔도 됩니다.” 나는 가볍게 입꼬리를 비틀며 술잔을 들었다. 한 잔을 털어 넘긴 뒤, 허심탄회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송병준 의원, 너무 더러운 게 많더라고요.” “맞습니다, 맞습니다.” 그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선거도 그렇고, 뒷소문도 많고요.” “그런 녀석이 국회를 더럽히는 걸 가만히 지켜보고 싶지 않더라고요. 기왕이면…….” 나는 민중구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더 훌륭하신 분이 그 자리를 채워 주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할 수만 있다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나는 술잔을 내려놓으며 그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내일 의원님 사무실로 퀵이 하나 더 갈 겁니다.” “예.” “오늘 보니까 어디서 보냈는지 막 조사하고 그러셨더라고요.” 그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피어올랐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도련님께서 보내셨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해서…….” “예. 그러실 것 같았습니다. 내일은 그러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물론입니다. 절대 그럴 리 없을 겁니다.” “고맙습니다.” 나는 피식 웃으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내일 추가적으로 받으시는 서류면, 송병준 의원 박살내기엔 충분할 겁니다.” 민중구의 주먹에 힘이 불끈 들어갔다. 볼을 타고 흐르는 땀방울은 휘어진 그의 입꼬리를 스쳐 지나갔다. “공석으로 만들고 나면, 제가 굳이 나서지 않아도 다시 공천 받으셔서 복귀하실 수 있겠죠?” 아무리 낙선한 의원이라도, 무려 4선 출신이다. 그 정도 한 방은 있겠지. “그럼요. 그건 충분히 가능합니다.” “예. 그러면 조용히 지켜보고 있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도련님!” 그는 머리가 테이블에 닿도록 깍듯하게 숙였다. “한 잔 받으시죠.” “예!” 그는 공손하게 술잔을 들어 올리며 나를 슬쩍 바라봤다. “도련님, 혹시 저한테 바라시는 게 있으신지…….” “그럴 리가요.” 나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바라는 건 단 하나도 없습니다.” 민중구는 당황한 눈길을 숨기지 못했다. “그렇다면 왜…….” “글쎄요. 뭐, 단순한 호의랄까요? 호감 표시라고 봐도 되고요.” 나는 여유롭게 미소를 지었다. “그저 나중에 서로 도울 일이 생겼을 때 함께 헤쳐 나가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백지수표다. 그 위험성은 정치인이라면 누구나 익히 알고 있지만, 지금 민중구는 그걸 마다할 만큼의 여유가 있지 않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눈빛이 반달처럼 휘어졌다. “든든한 아군이 되어 드리겠습니다.” 민중구는 눈썹까지 들썩이며 말을 덧붙였다. “필요로 하시기 전까지는 절대 도련님의 정체가 탄로 나지 않도록, 제 목숨에 칼이 들어오는 한이 있어도 지키겠습니다.” 나는 술잔을 들어 그의 잔에 툭 부딪쳤다. “국회에서 뵐 날을 기다리겠습니다.”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도련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