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역 (6)2021.11.20.
“수술은 잘 끝났습니다.” 의사는 마스크를 벗으며 미소를 지었다. “출혈이 많아서 자칫 위험할 뻔했는데, 다행히 빠르게 이송되어서 생명엔 문제가 없습니다. 충분히 수혈했고, 상처 부위에 흉터가 남을 순 있는데, 크게 티 나진 않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지금은 약 때문에 한동안 주무셔야 될 겁니다. 한 서너 시간 정도 지나야 제대로 깨어나실 겁니다. 그전엔 깨셔도 오락가락하실 수 있어요.” “고생 많으셨습니다, 의사 선생님.” “아닙니다. 그러면 이만.” 그는 고개를 꾸벅이며 자리를 떠났다. 바로 조치를 한 덕분에 미래 문자에서 봤던 것과 달리, 살아남을 수 있었던 모양. 당장이라도 마돈나와 할 이야기는 많았지만, 지금은 마취 상태에서 제대로 깨지 못할 테니 이야기해도 의미는 없을 터. 나는 곧바로 병원 밖으로 향했다. 빈 시간 동안 경찰서에 목격자 진술을 위해 다녀올 생각이었다. 어차피 이제 슬슬 해가 뜰 시간인 데다가, 이미 사고가 벌어져 접수까지 된 상황에서 송병준 의원이 움직일 리는 없으니까. * * * 똑똑. 노크 소리를 내자, 병실 안에서 가냘픈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가자, 임지현 비서관이 침대를 살짝 세운 채로 앉아 있었다. 나를 발견하자마자 커지는 동공. “잠깐 들어가도 될까요?” 그녀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꽃바구니를 한 쪽 테이블에 올려 두고선 병상 가까이 다가가 앉았다. “몸은 좀 어때요?” “괜찮습니다. 덕분에…….” 임지현 비서관은 고개를 꾸벅이며 말했다. “우선 정말 감사합니다. 조금 전에 간호사 선생님이 말씀하시길, 늦게 이송됐으면 목숨이 위험할 뻔했다고 하더라고요. 워낙 차가 다니지 않는 곳이라, 아마 지훈 씨가 아니었다면…….” “이름을 아시는 걸 보니, 제 소개를 따로 할 필요는 없어 보이네요.” “모를 수가 없죠.” “뭐 빙빙 돌려서 말하는 건 제가 좋아하지 않으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죠.” 나는 괴한의 차에서 빼 왔던 서류철을 꺼내 병상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다. “뭔지는 아실 테고.” 아니나 다를까, 임지현 비서관의 몸이 멈칫했다. 그와 동시에 세차게 흔들리는 눈빛. 나는 여유롭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용물은 확인해 보았습니다. 솜씨가 제법이라는 소문은 들었지만, 기대했던 것 이상이더군요.” “…….” 임지현 비서관은 긴장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걸 그냥 주시는 건 아닐 테고…….” “그냥 드릴 수도 있죠.” 순간, 그녀의 손이 테이블 위로 조심스레 뻗어졌다. “다만.” 나는 서류철 위로 내 손을 덮었다. “제가 원하는 게 하나 있긴 합니다.” “…….” “임 비서관님께서는 송병준 의원 밑에서 5년간 일하셨죠?” 그녀의 고개가 작게 끄덕여졌다. 기본적인 건 김치호 비서관을 통해서가 아니라, 내가 직접 조사한 내용이니 틀린 사실은 없을 터. “5년 전이면 송병준이 초선 의원 말이던 시절부터죠.” “맞습니다.” “그리고 이 서류는 5년 동안 몸담았던 의원실과 3선 의원을 배신하면서 챙긴 파일이고요.” “…….” “게다가 목숨 값까지 붙었네요.” 그녀는 입술을 잘끈 깨물었다. “원하시는 게 뭡니까?” “어떤 걸 요구하든 당신이 밑지는 장사는 아닐 거라는 뜻입니다.” 나는 여유롭게 입꼬리를 휘었다. “임지현 비서관님.” 똑바로 그녀의 눈을 마주보며 말했다. “당신이 내 사람으로. 내 영역에 들어와 줬으면 하는데, 어떻습니까?” 임지현 비서관의 동공이 세차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오해할까 봐 덧붙이는데, 당신의 몸 따위나 사랑 따윌 바라는 건 아닙니다. 별명이 마돈나든, 아니든 상관없으니까.” “그렇다면…….” “충성심.” 나는 턱을 치켜들며 단호하게 말했다. “당신의 충성심. 목숨까지 바칠 만큼 절대적이고 불변하는 충성심.” 마돈나의 몸이 미약하게 떨리는 게 느껴져 왔다. “조금 전에 본인 입으로 내가 아니었으면 죽었을 거라고 했죠?” “……예.” “지금까지의 마돈나는 거기서 죽은 겁니다.” 꿀꺽 침을 삼킨 듯, 그녀의 목울대가 울렁였다. “그리고 임지현이 오늘 다시 태어난 겁니다. 내게 절대적 충성을 하는 임지현으로.” 그녀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맹목적으로 충성하십시오. 그러면 내가 당신이 원하는 걸 손에 쥐여 줄 테니까.” 순간, 임지현의 눈에 광채가 일었다. 내 말뜻을 알아들었다는 증거. 이 정도면, 상황 파악은 진즉에 끝났을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러지 못했다면, 애초에 내가 그녀에게 손을 뻗었을 리가 없으니까. “천천히 생각해 봐도 되겠습니까?” “아니요. 지금 답변을 들어야겠습니다.” 임지현 비서관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깊게 호흡을 몇 번이고 들이마시고 내뱉기를 반복하더니. 이내 번뜩 눈을 떴다. “비서실장.” 그리고는 결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권좌에 오르시게 되면, 그 자리를 주십시오.” 내 입가에 씨익 미소가 지어졌다. 대통령 비서실장. 단순히 실무자 중 Top이 아니다. 나의 최측근으로 정재계에 두루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실세 중의 실세만이 차지할 수 있는 자리. 내가 정권을 굳히게 되면, 그 위의 더 높은 권력까지 넘볼 수 있는 자리가 바로 비서실장이다. 최소한 이 정도는 요구할 것이라 생각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단순히 그녀의 힘만으로는 오를 수 없는 자리다. 부잣집 딸이라고 한들, 온갖 정계 천룡인이 판치는 대한민국에서 그녀의 입지는 천민을 갓 벗어난 수준이니까. 하지만 나는 다르다. 최준석의 핏줄이자, 대한민국의 정점에 오른 집안사람. 얼마든지 올라갈 수 있는 여지가 충분하다는 것이지. 어차피 이 제안을 받은 이상, 그녀에게 선택지는 하나뿐이다. 나의 뒤통수를 쳐서 둘째 형 혹은 다른 형제들에게 붙으면 지금 당장 좋은 자리는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허나, 정치판에서 배신자에게는 결코 높은 자리를 주지 않는다. 또 한 번 뒤통수를 칠 수 있으니까. 그게 대한민국 정치의 암묵적인 룰이다. 게다가 임지현 비서관은 이미 송병준 의원을 배신하고 나온 상황. 더 높은 곳으로 오르고 싶다면, 그녀가 선택할 수 있는 건 내 손을 잡는 것뿐이라는 뜻이지. 물론, 나 또한 도박수를 배팅하는 것은 맞다. 송병준 의원실을 배신한 그녀가 다시 배신하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까. 다만, 송병준 의원이 ‘악질’이라는 상황의 특수성과 나의 직감. 그와 더불어 미래 문자를 믿고 임지현을 선택하는 것이다. 또한 무엇보다도. 높은 자리를 노리는 자에게는, 권력이라는 약속이야말로 진정한 충성심을 만들어주는 법이니까. “비서실장이라…….”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게 충성한다면.” 가볍게 입꼬리를 휘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당신이 그 능력을 증명한다면, 얼마든지.” 그제야 임지현 비서관의 입술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목숨을 걸고 보좌하겠습니다.” 그녀의 머리가 깍듯하게 숙여졌다. “잘 부탁드립니다.” “나야말로.” 더 이상 존대는 필요 없다. 정치의 서열에서 나이는 의미 없으니까. 나는 정장의 버클을 채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병원에서 퇴원하면 당분간 숨어 지내도록 해.” 내게 건네받은 서류를 쥐고 있던 임지현이 놀란 눈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이걸 묻으라는 겁니까?” “아니.” 그런 악질 의원을 남겨 둘 생각은 나도 없다. “목숨에 위협을 받은 마돈나는 겁에 질려 은둔해 버렸고, 증거는 사라졌다. 송병준 의원이 좋아할 만한 시나리오 아닌가?” “그렇긴 합니다만…….” “터뜨리는 건 내가 하지. 내가 신호를 줄 테니까 때를 맞춰서 우리 의원실 쪽으로 그 자료를 보내.” “익명으로 말씀하시는 거겠죠?” “당연하지. 내가 따로 연락하지.” 나는 속주머니에 있던 2G 선불폰을 그녀에게 건넸다. “거기 저장되어 있는 연락처를 통해서만 연락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그녀는 당분간 어둠 속에서 그림자로 활동하게 될 것이다. ‘마돈나’라는 별칭을 갖고 있을 만큼 국회에서 유명하고 유능한 사람을 내 영역으로 끌어들였다는 게 밝혀지면, 벌써부터 높은 자리를 욕심낸다는 걸 들키게 되는 법이니까. 형제들이 직감으로 느끼는 것과 대놓고 드러내는 건 다르다. 내 패를 공개하는 순간, 바로 견제가 들어올 테니까.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 당분간 그녀는 수면 밑에서 나를 도울 것이다. 정확히는 4년. 다음 총선에서 내가 국회의원에 출마하며 독자 노선을 걷는 게 밝혀질 때야 비로소 모습을 드러낼 테지. 그전까지는 내 발톱과 이빨을 숨겨야 한다. 형제들이 의혹은 들어도, 확신할 수 없도록. 또한, 그 시간 동안 마돈나를 믿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 추가적으로 확인을 해야 하고, 또, 미래를 위한 물밑 작업을 위해 그녀의 능력을 증명시켜야 하니까. “아, 그리고 제가 어떻게 불러야 될까요?” “편한 대로 불러. 어차피 의원 배지 달면 다시 바뀔 테니까.” “도련님으로 부를게요. 그게 편해서.” “그러든가.” 병실을 떠나려는 찰나. “저기…….” 그녀가 주먹을 꼭 쥔 채로 나를 잡아 세웠다. “하나 여쭤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뭔데?” “도련님께서 오시기 전에 경찰들이 왔었습니다. 아는 사이라고 증언해서 그쪽에서도 크게 의심은 하지 않는 것 같은데…….” 경찰 녀석들도 참 머리가 비상하다. 혹시나 내가 거짓 증언을 하는 것일까 봐 교차 검증을 위해 내가 진술하는 사이, 추가 인력을 이쪽으로 보냈을 줄이야. 대한민국 경찰들, 보기보다 능력 있다니까. “사고가 났다고 신고한 시간이랑 제 블랙박스에 나온 시간이랑 다르던데요.” “그래?” “일단 경찰에는 블랙박스의 시간 기록 장치에 몇 분 정도 오류가 생기는 건 흔한 일이고, 이전에도 자주 그랬다고 해서 넘어갔습니다만…… 이런 건 제가 꼼꼼히 체크하는 스타일이라서 블랙박스 시간은 늘 정시거든요.” 날카롭다. 생각보다 더 예리하다. 그래서 더욱 마음에 든다. “분명 사고가 나기 전에 신고하신 것 같은데…….” 임지현은 긴장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게다가 그 시간에 거기 있으셨던 이유도 뭔가 설명이 되지 않고…….” “지현 씨.” 나는 그녀의 말을 끊으며 가볍게 입꼬리를 비틀었다. “예?” “세상엔 알아서 좋은 것도 있지만, 몰라야 좋은 것도 있는 법이야.” “…….” “이것도 그 중 하나고.” 임지현의 동공이 세차게 흔들렸다. “혹시나 오해할까 봐 말하자면, 나는 송병준 의원과 연관이 전혀 없어. 애초에 그건 본인이 더 잘 알 테고. 사고 장소와 경로도 본인이 직접 정했을 테니까.” 누군가의 오더에 의해 움직인 게 아니라, 그녀의 자유의지로 움직여서 그 사고 장소로 간 것이다. 사고를 낸 차량은 임지현을 따라갔다는 걸 모를 리 없을 테니까. 그렇기에 내가 그곳에 있을 만한 이유는 더욱 찾기 힘들 터. 마돈나의 동공에 경외심이 서리기 시작했다. “내가 아까 뭐라고 했지?” 나는 그녀를 향해 눈을 치켜떴다. “맹목적 충성.” 절대적 충성을 만들기 위해서는 단순히 권력을 위한 욕심만이 전부는 아니다. 그것은 자의적으로 충성하도록 만들기 위한 매개일 뿐, 확실한 족쇄가 될 수는 없다. 그러한 욕심과 더불어 자신의 주인에게서 정체를 알 수 없는 공포감. 자신만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위압감. 그러한 두려움까지 겹쳐질 때야 비로소 절대적인 충성이 이루어지는 법이니까. “나와 협업하려면 이런 것까지 하나하나 토를 달아서는 안 돼.” 앞으로도 미래 문자를 통해서 일을 진행할 때, 하나하나 설명할 수는 없는 법이니까. 미리 선을 그어 놔야 한다. “지금이라도 손 떼기엔 늦지 않았어.” 그녀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묻지 않을게요. 저는 본 적도 없고, 의혹을 가진 적도 없습니다.” “좋아.” 나의 입가에 씨익 미소가 걸렸다. “그러면 다음에 연락하도록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