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영역 (5) (19/200)
  • 영역 (5)2021.11.19.

    콰아아앙! 커다란 굉음과 동시에 임지현 비서관이 타고 있던 승용차가 가드레일을 들이받고 산비탈에 기울어진 채 멈춰 섰다. 화물차는 정면이 찌그러진 걸 신경도 채 쓰지 않고 뒤로 후진하더니, 그대로 왔던 길로 차를 돌려 도주했다. 그사이, 근처에 차를 세운 SUV 운전자는 하차해 임지현 비서관이 타고 있는 승용차에 다가갔다. 그는 조심스럽게 창문과 앞 유리를 통해 차의 내부 상태를 살폈다. 남자의 시선에 운전자가 핸들에 머리를 박은 채 그대로 엎어져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죽었나?’ 슬쩍 문을 열어보니, 임지현이 가쁘게 몰아쉬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죽지는 않은 것 같고…….’ 다만, 배와 다리에서 흘리는 피의 양이 꽤 많은 걸 보아하니, 과다출혈은 확실해 보였다. 아마 이대로 두면, 꽤나 목숨이 위험해질 터. 죽이라는 명령까지 받진 않았지만, 굳이 살려야 할 필요성은 느끼진 못했다. 괜히 살리려다가 실수라도 하면, 자신의 흔적을 남길 수도 있으니까. 그는 차량 안으로 몸을 들이밀어 한참을 뒤지다가 뒷좌석에 있던 서류철을 집어 들며 임지현을 보고는 낮게 읊조렸다. “그러게, 왜 배신을 해가지고…….” 남자는 이를 악물고 고개를 저으며 합리화했다. 그리고는 자신의 흔적이 남았을 블랙박스까지 뜯어내 차에서 몸을 빼냈다. 그 순간. “너 누구야…….” 운전석에서 임지현 비서관의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그제야 정신이 들은 모양. 그녀는 표독스러운 눈빛으로 남자를 노려봤다. 찢어진 머리에서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지만, 임지현 비서관의 눈빛은 매섭게 빛나고 있었다. 그녀는 어떻게든 몸을 움직여 보려 했으나, 차체가 찌그러지는 바람에 다리가 끼어 차에서 빠져나올 수는 없었다. 남자는 흠칫 놀랐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는 고개를 휘휘 저으며 돌아섰다. 그는 조수석의 문까지 닫은 뒤, 서둘러 발걸음을 돌려 그는 자신의 차 SUV로 돌아왔다. 허나, 그의 시선은 여전히 임지현 비서관이 타 있던 세단으로 향해 있었다. 혹시라도 튀어나오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 주시해야 했으니까. 위태한 상황 속에서 그는 운전석에 타기 전, 뒷좌석의 문을 열어 들고 온 서류와 블랙박스를 던지듯 놓았다. 그 후, 운전석의 문을 열자. “안녕.” 훤칠한 키를 가진 남성이 자신을 향해 인사했다. “워어어억!” 예상치도 못한 등장에 남자는 깜짝 놀라며 뒤로 나자빠졌다. “뭐, 뭐, 뭐야? 넌 뭔데 여기 있어!” “글쎄. 그것보다 우리 대화 좀 해 봐야 하지 않겠어?” 운전석에 타고 있는 남성, 최지훈은 씨익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 * * 임지현 비서관이 탄 차량이 접근하는 게 확실해진 순간, 나는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미리 작성 및 복사해 둔 문구를 붙여넣기 해서 112와 119에 신고했다. 현재 장소에 뺑소니 교통사고가 발생했고, 피해자는 생명이 위중한 상태라고. 물론, 아직까지 사고가 나기 전이었지만, 그렇다고 ‘사고가 날 예정입니다.’라고 보낼 수는 없었으니까. 그랬다가는 의심을 받는 건 둘째 치고, 애초에 허무맹랑한 신고라며 접수조차 제대로 해 주지 않을 가능성이 있으니까. 신고 접수가 된 걸 확인한 뒤, 나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사이, 임지현 비서관의 차량은 화물차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가드레일을 들이받았다. 잠시 후, SUV가 멈추며 운전석에서 남성이 내렸다. 거리가 멀어서 얼굴이 제대로 보지는 않지만, 체형으로 보면 동영상에서 보았던 인물이 확실할 터. 화물차는 내가 손쓰기도 전에 곧바로 도주했다. 굳이 붙잡을 생각도 없었다. 어차피 저 녀석은 돈에 의해 조종받은 녀석일 터. 중요한 건, 서류를 빼 가는 SUV 운전자. 저 녀석이다. 놈이 임지현 비서관의 차에 다가가는 모습을 확인한 뒤, 나는 곧바로 도로가로 내려왔다. 그리고는 살금살금 SUV에 다가갔다. 인기척을 숨긴 채 조용히 운전석의 문을 열었다. 달칵-.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역시나 열려 있다. 이 상황에서 차 문을 잠글 만큼 여유가 있을 리가 없지. 운전석에 탑승해 보니, 예상했던 차 키 또한 꽂혀 있었다. 물론, 시동도 꺼지지 않은 채로. 서류만 챙겨서 바로 도주할 생각이었겠지. 아마 이 자동차 자체도 도난 차량일 확률이 크다. 아니, 훔친 게 확실하겠지. 나는 숨을 죽인 채로 녀석이 돌아오길 기다렸다. 혹시나 하는 상황에 대비해 호신용 무기도 챙겨왔다. 예리한 칼붙이와 같은 건 아니지만, 어렸을 적에 배운 무술을 통해 단봉 쓰는 법은 알고 있었으니까. 여차하면 바로 꺼낼 생각으로 허리춤에 있는 단봉을 쥐고 때를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녀석은 서류철과 차에서 뜯어낸 블랙박스를 들고 SUV로 다가왔다. 혹시나 시야에 들어갈까 봐 몸을 숙였지만, 녀석의 시선은 임지현 비서관이 있는 차에 꽂혀 있었다. 그나마 죄책감은 있는 모양. 그런데 이게 웬걸. 차에 접근한 녀석은 운전석을 여는 대신, 뒷좌석을 열어 블랙박스와 서류철을 던졌다. 그 후에야 운전석의 문을 열었고. 가만히 기다리고 있던 나와 눈이 마주쳤다. “안녕.” “워어어억!” 놈은 괴상한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뭐, 뭐, 뭐야? 넌 뭔데 여기 있어!” 얼마나 놀랐는지 말까지 더듬는 녀석. “글쎄. 그것보다 우리 대화 좀 해 봐야 하지 않겠어?” “개소리하지 말고 당장 내려!” 놈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내게 달려들려 했다. 그러나 나는 녀석이 닿기도 전에 곧바로 팔을 뻗어 운전석의 문을 닫았고. 철컥-. 문을 잠갔다. 나는 여유롭게 미소를 지으며 창문을 빼꼼 내렸다. “그러니까 차 키부터 챙기셨어야지.” 물론,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이 상황에서 시동을 끄고 차키를 챙겨서 내릴 생각까지는 하지 않는 게 정상이긴 하지. 녀석은 눈을 희번덕 뜨며 창문을 세차게 두드렸다. “당장 문 안 열어!” “한 가지만 대답하면 열어 줄게.” 창문을 향한 놈의 주먹질이 멈췄고. 나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너 누가 보냈어?” “…….” “송병준 의원이야? 아니면 최홍식 보좌관?” 녀석은 대답 대신 허리춤에 손을 넣었다. 그리고 잡아 꺼낸 건 다름 아닌, 날카로운 회칼. 달빛을 받은 칼날은 예리하게 빛났다. 놈은 악에 받친 듯 소리를 치기 시작했다. “너 이 새끼 어디서 튀어나왔어!” 쾅! 쾅! 놈은 칼로 창문을 찍어대기 시작했다. 쩌적. 유리에 금이 가긴 했지만, 일반 유리도 아니고, 자동차 창문을 칼로 부수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 나는 안전 거리를 유지하며 냉철하게 말했다. “누가 보냈는지 말해. 그러면 문 열어 줄게.” “개소리하지 마!” 쿵! 쿵! 녀석은 미친 듯이 칼로 창문을 찍어 댔다. 그리고 점차 금이 커져 갔고, 플라스틱 수지층이 찢기며 유리파편이 엉겨 붙어 추욱 늘어지기 시작했다. 놈이 조금만 더 지랄하면 팔을 뻗을 만한 공간은 생길 터. 나도 여차하면 대처할 생각으로 조수석 쪽으로 몸을 옮기며 품안에 숨겨 둔 단봉을 잡았다. 허나 그것을 꺼낼 필요는 없게 되었다. 위이이이잉-! 저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으니까. 땀에 젖은 녀석은 황급히 뒤를 돌아보더니, 경찰차를 발견하고는. “이런 X발!” 욕지거리를 터뜨리고는 나를 살벌하게 노려보고는 위협 섞인 협박을 내뱉었다. “너 내가 얼굴 똑똑히 기억했어. 다음에 나한테 걸리면 죽는다, 진짜로.” 놈은 분에 못 이겨 주먹으로 창문을 쾅 내려치고는 황급히 뛰어 가드레일을 넘더니 산 아래 숲속으로 사라졌다. “후우우.” 나는 숨을 몰아쉬며 차의 뒷좌석을 바라보았다. 두꺼운 서류철과 함께 있는 블랙박스. 서류철이 있다는 게 밝혀지면 경찰에서 증거 자료로 확보하려 할 터. 경찰의 손에 넘어가면, 오히려 송병준 의원의 마수가 뻗어져 분실될 위험이 있다. 나는 차에서 내린 뒤, 그것을 허리춤에 넣어 입고 있던 외투로 덮었다. 거동에 살짝 영향이 있긴 하지만, 부자연스러울 정도는 아니다. 부우웅- 끼익. 때마침 경찰차와 구급차가 코앞에 도착하며 멈춰 섰다. 구급대원들은 황급히 임지현 비서관이 있는 차량으로 달려갔고. 경찰들은 나에게로 다가왔다. “신고자이십니까?” “예, 맞습니다.” “어떻게 된 건지 보셨습니까?” “저 차가 가고 있는데, 이 뒤에 있는 차가 위협 운전을 하더라고요. 그래서 뭔가 이상하다 싶었는데, 정면에서 화물차가 와서 들이받더라고요.” “화물차도 있었습니까?” “네. 사고 직후 도주했습니다.” “허어…….” 경찰관은 평범한 사고가 아니라는 걸 직감한 듯, 심각하게 턱을 매만졌다. “그러면 이 차 운전자는 어디 갔죠?” “제가 다가오니 갑자기 도주했습니다.” “도주요?” “저쪽 차에서 블랙박스를 훔치려다가 저한테 걸리니까 꽁무니를 뺀 것 같아요.”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블랙박스를 건넸다. “증거 자료로 가져가시면 될 것 같아요.” “예, 알겠습니다.” 그때, 구급대원들이 기계를 사용해 차를 벌리고 운전석에 끼어 있던 임지현을 구조해냈다. 그녀도 출혈은 많았지만, 다행히 정신은 드는 듯, 들것에 실린 채로 눈을 끔뻑였다. 미래 문자에서는 빠르게 이송되면 살 수 있을 거라 했으니, 아마 생명에 지장은 없을 터. 굳이 마음 급하게 행동할 필요 없다. 최대한 침착하게, 안정적으로. 머릿속으로 그 생각을 되뇌며 텐션을 가라앉혔다. 상황을 정리하던 경찰관은 문득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잠깐만요. 그런데 선생님은 어디서 나오신 겁니까? 행색을 보아하니, 사고가 난 것 같지는 않고…… 여기 주변에 타고 오신 차량도 없고요.” 그는 수상하다는 눈빛으로 나를 스윽 흘겨봤다. 허리춤에 수갑으로 손을 올린 걸 보아하니, 여차하면 체포할 생각인 모양. 나는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이며 임지현 비서관을 가리켰다. “아, 저는 저 친구 지인입니다.” “지인이요?” “예. 제가 하이킹을 왔다가 길을 잃어서 한참을 헤맸거든요. 여기 산이 엄청 험하더라고요. 그러다가 겨우 도로가로 내려와서 저 친구한테 전화해서 데리러 와 달라고 했죠.”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훑어보던 경찰관은 임지현 비서관을 바라보며 물었다. “여성분. 지금 정신은 드세요? 이분이 하신 말씀 맞습니까?” 그녀는 나를 보고 흠칫 놀란 눈치였다. 당연한 말이지만, 국회에서 일하는 인물이니 내 얼굴을 모를 리 없었으니까. 경찰관의 시선이 그녀에게 쏠린 사이, 나는 임지현 비서관만 볼 수 있도록 슬쩍 옷을 들어 허리춤에 끼워 둔 서류철을 보여 주었다. 정신은 말짱한 듯, 임지현 비서관의 목울대가 꿀렁였다. “여성분, 잘 모르시겠어요? 구급대원님. 혹시 지금 통증 때문에 제대로 생각이 들지 않으시면…….” “……맞아요.” 임지현 비서관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저 사람 말 맞아요. 그러니까 빨리 출발이나 해요.” “아, 네. 알겠습니다.” 경찰관은 머쓱한 듯 머리를 긁으며 구급차에서 물러났다. “저는 이제 가도 괜찮은 거죠?” “예, 혹시 명함이라도 있으실까요?” 나는 지갑에서 명함 하나를 꺼내 그에게 건넸다. “피해자분 지인이시고 목격자에다가 신고자셔서 나중에 진술 한번 부탁드릴게요.” “네. 연락 주세요.” 임지현 비서관을 구급차에 실은 구급대원은 황급히 내게 다가왔다. “보호자분이시죠? 같이 타시죠. 지금 바로 출발해야 됩니다.” “예.” 나는 경찰관을 향해 고개를 꾸벅이고는 구급차에 올랐다. 그리고는 임지현 비서관의 곁에 엉덩이를 붙이며 구급대원에게 물었다. “괜찮을까요?” “예. 출혈이 조금 심하시긴 한데, 지금 바로 병원 가서 치료받으시면 생명에 지장은 없을 겁니다.” “다행이네요.” 나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얼른 출발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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