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역 (2)2021.11.16.
“최지훈 비서님.” 9급 김한나가 탕비실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며 물었다. “커피 한 잔 드실래요?”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김치호 비서관이 기다렸다는 듯이 손을 들었다. “어, 한나 씨. 나 한 잔 부탁해. 진한 블랙으로.” 김한나는 이를 꽉 물며 대답했다. “네.” 나는 웃으며 말했다. “저는 괜찮아요. 마시고 들어왔어요.” “아, 그러셨구나. 국회 식당 가셨다길래 바로 오신 줄 알았어요.” “오는 길에 잠깐 카페 들렀다 왔죠.” 김치호 비서관은 눈을 끔뻑거리며 나를 돌아보았다. “최 비서 구내식당에서 밥 먹었어?” “예. 저쪽 의원회관에서요.” “그럴 거면 같이 먹지. 난 최 비서 외근 나갔다길래 밖에서 먹고 오는 줄 알았는데.” “시간이 애매해서 그냥 들어와서 먹었습니다. 김한나 비서님한테 연락해 보니까 딱 식사 끝나고 돌아오는 중이라고 하시더라고요.” “에이, 아쉽네.” 겉으로 하는 소리는 아닌 것 같다. 뭐, 나름대로의 친근감 표시인 듯한 느낌도 들고. 그렇다고 마음에 드는 건 아니지만. “그나저나 의원회관 밥, 입맛에 맞아? 난 영 별로던데.” “저는 괜찮던데요. 찌개도 괜찮게 나오고요.” “최 비서 1식당 갔구나.” 국회에는 구내식당만 8개다. 그중에서 제일 흔한 게 의원회관 2층에 있는 1식당. “영감님들이 많아서 그런지, 1식당은 매 끼니마다 무조건 찌개가 나와. 어르신들이 국물 좋아하니까 그런 것 같더라고. 찌개에 올인해서 그런지 밑반찬은 영 부실해.” “아, 그렇습니까?” “응. 기왕 가려면 2식당으로 가. 거긴 한 끼에 식권 2장 내야 되는데 맛은 있어. 아니면 3식당 가든가. 거긴 한 끼에 만이천 원인가 하는데, 샐러드 바가 있어서 괜찮거든.” “참고하겠습니다.” 은근히 꿀팁이긴 하다. 구내식당이 많다고 이야기는 들었지만, 각각 어디 있는지까지 구태여 찾아보진 않았으니까. “그래. 나중에 시간 나면 구내식당 한 번 쭉 돌면서 알려 줄게. 의원회관 말고도 본청이랑 국회도서관, 헌정기념관까지 다 있으니까.” “예. 감사합니다.” 김한나는 커피 한 잔을 타서 김치호 비서관에게 건넸다. 그리고 내 옆을 지나가며 슬쩍 홍삼 병 하나를 테이블에 올렸다. “웬 홍삼이에요?” “이번에 의원실로 들어왔더라고요.” 김치호 비서관은 눈을 부릅뜨며 파티션 너머로 고개를 불쑥 들었다. “한나 씨. 나는?” “커피 드렸잖아요.” “홍삼도 마시고 싶은데?” “꺼내 드세요.” 그녀는 새초롬하게 말을 남기고는 자리로 돌아갔다. 처음 국회에 입성했을 때만 해도 이런 분위기가 아니었는데, 청문회가 끝나고 여유가 생기니 여기도 나름대로 사람 사는 맛이 나는 것 같기도 하고. 그 생각이 채 가시기도 전에. “선배님들 그거 들으셨어요?” 화장실에 간다던 8급 오태용 비서가 호들갑을 떨며 의원실로 돌아왔다. “대박 사건!” 제일 먼저 반응을 보인 건 김치호 비서관이었다. “뭔데?” “저번에 말한 마돈나 있잖아요. 갑자기 그만뒀대요.” “왜?” “글쎄요. 다들 쉬쉬하는데 보나마나 뻔하지 않겠어요? 송 영감 손버릇이 도진 거겠죠.” “그건 아닐걸.” 김치호 비서관이 딱 잘라 부정했다. “마돈나가 업무 능력이 장난이 아니라서, 천하의 송 영감도 일부러 건들지 않는다고 들었거든.” “아, 그래요?” 이렇게 돌아가니, 조금 궁금하긴 하다. 송병준 의원이야 워낙 뒤가 구린 인물이라지만, 몇 년이나 같은 의원실에서 일했던 비서관이 갑자기 나갔다는 건 평범한 일이 아니니까. “비서관 자리 공석 생기자마자 공고 올렸다더라고요.” “마돈나 빠졌으니 당분간 보좌관들만 죽어나겠네.” “제대로 된 사람 뽑을까요?” “글쎄. 송 영감 성격상 업무엔 보좌관들 갈아 넣고 사심이나 채우겠지.” 송병준 의원이 부정선거 의혹에 휩싸이긴 했지만, 성추문에 대해서는 국회 내에서만 알 뿐, 밖까지 새어나가지는 않았다. 일반인들의 입장에서는 그 마돈나가 이번 부정선거 의혹 때문에 의원실에 사표를 낸 것이라고 생각할 터. 그렇기에 지원자가 엄청나게 많을 것이다. 부정선거로 인해 당선 무효가 되면 문제가 될 수 있지만, 이미 1심에서 증거불충분으로 무죄가 나온 이상, 2심에서도 큰 이변이 없다면 의원직은 그대로 유지할 수 있을 테니까. 그렇기에 아무것도 모르고 의원실로 들어가는 신입들 중엔 또 피해자가 생기겠지. 더 듣다가는 괜히 안쓰러움만 커질 것 같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최 비서 어디 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어, 그래.” 의원실 밖으로 나왔다. 손이라도 씻을 생각으로 화장실로 향하며 복도를 걷는데. 문득 오피스룩을 차려입은 여성이 지나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긴장한 얼굴에 방문증을 걸고 있는 데다가 향하는 방향을 보아하면……. 100% 면접을 보러 온 것일 터. 그것도 송병준 의원실로. 그 순간. 지이잉-. 휴대폰에 진동이 울리기 시작했다. -발신자 표시 제한. 잠깐만. 이거 설마……. 국회에 입성하며 사무적으로 번호를 알리긴 했어도, 여전히 내 번호를 아는 이는 극히 드물다. 게다가 그중에서 발신자 표시 제한으로 전화를 걸 만한 이들은 더욱 없고. 미래에 대한 정보는 문자로만 오는 줄 알았는데, 전화로도 오는 거였나? 꿀꺽. 나도 모르게 침이 넘어갔다. 여차하다가는 전하가 끊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서둘러 구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주변에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하고 조심스럽게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잠깐의 침묵이 이어진 뒤. -나와 직접 보자고 했다고? 듣자마자 직감할 수 있었다. 미래 정보가 아니다. 이 목소리는 필시……. -진태석일세. 역시! 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태무그룹의 회장, 진태석! 어젯밤, 정영주 비서실장을 그렇게 돌려보내고 나서 예감했다. 머지않아 연락이 올 것이라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바로 반응이 올 줄이야. 나는 곧바로 허리를 펴고 목소리를 가다듬은 뒤 입을 열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내 당당한 태도에 놀랐는지, 휴대폰 너머에서 가벼운 웃음소리가 전해져 왔다. 나는 맹랑하게 말을 이었다. “번호가 안 보이네요, 회장님.” 발신자 표시 제한으로 전화를 건 게 무례하다는 걸 돌려서 말했다. 그러자, 예상외의 답변이 돌아왔다. -궁금하다면 직접 만나서 알려 주도록 하지. 일단 자리부터 만들다니. 역시 만만치 않은 사람이다. 재벌 기업 총수나 된 사람이라 그런지, 한 마디 한 마디만으로도 무게감이 느껴져 온다. 그래. 이게 바로 진정한 힘을 가졌기에 나오는 위압감이겠지. “오늘 저녁에 어떠십니까?” -질질 끌지도 않고 화끈해서 좋구먼. 오늘 저녁 8시. 자네 집 앞으로 차를 보내겠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전화는 마무리되었다.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재미있다. 아주 재미있어. 다들 이런 식으로 만나서 손잡고, 밀어주고 끌어주는 거겠지. 다만, 내가 다른 이들과의 차별점이 있다면. 그저 맹목적으로 재벌에게 머리 숙일 필요가 없다는 것. 대한민국에서 권력은 언제나 돈 위에 군림하고 있으니까. 나한테는 어떻게 나올지 궁금해지는데? * * * “안녕하십니까.” 나를 데리러 온 인물은 다름 아닌, 정영주 비서실장. 그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진태석 회장의 오른팔이나 되는 인물을 시켜서 나를 데리러왔다는 건, 나를 인정해 준다는 것과 같은 의미였으니까. “타시죠. 안내하겠습니다.” “아니요. 저는 제 차 타고 가겠습니다.” “예?” 정영주 비서실장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굳이 그러실 필요까지야…….” “벌써부터 신세지고 싶지는 않거든요.” 사실, 이런 차에 타는 걸로 접대를 받는 건 아니다. 다만, 만에 하나 그의 차에 타는 상황이 기록으로 남는다면, 언젠간 발목을 잡힐 수도 있기에 그 상황을 대비하는 것이지. 그 또한 내 의도를 알았다는 듯, 더 이상 토를 달지 않았다. “천천히 가겠습니다. 조심히 따라오십시오.” “예.” * * * 양재동의 한 호텔. 강남으로 향할 때부터 이곳으로 오리라고 대충 눈치는 챘다. 태무그룹에서 운영하는 곳으로 서울에서도 제일 비싼 호텔 중 하나에 들어가니까. 투숙객이 사용하는 일반 엘리베이터가 아닌, VIP 엘리베이터를 통해 꼭대기 층에 도착하자, 퍽 웃음이 터져 나왔다. 복도와 객실이 나오는 대신, 주거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펜트하우스. 일반인들이라면, 이러한 광경을 보자마자 주눅이 들 수밖에 없을 터. 절대적인 부에서 격차가 느껴질 테니까. 허나, 청와대에서 10여 년을 살아 온 나에게는 커다란 감흥은 없었다. 거실로 들어가자, 커다란 소파에 편안한 차림으로 앉아 있는 남성이 눈에 들어왔다. 희끗한 머리와 달리, 나이에 걸맞지 않은 피부. 속을 꿰뚫어 볼 듯한 날카로운 눈매와 여유로운 자세. “반갑습니다, 회장님.” 나는 가볍게 목례를 하며 그에게 다가갔다. 진태석 회장은 가볍게 입꼬리를 휘며 내게 손을 뻗었다. “진태석이네.” “최지훈입니다.” “앉지.” “예.” 올해 나이가 일흔이라고 들었는데, 아주 정정하다. 의학과 돈의 힘이겠지. “멀리까지 오게 해서 미안하네. 여의도는 워낙 보는 눈이 많아서 가기 힘들어서 말이야.” “그럴 수 있죠. 이해합니다.” 그는 와인 잔을 채워 내게 건넸다. 나는 정중하게 거절했다. “제가 오늘 차를 가지고 와서요.” “아, 그런가?” 진태석 회장은 피식 웃더니 잔을 내려놓았다. 그는 홀로 와인을 홀짝이고는 입을 열었다. “자네 부친과도 몇 번 만난 적이 있어.” 그는 눈썹을 들썩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지금 자네와 똑같았네. 쥐뿔도 없던 평검사 시절인데, 내 앞에서 절대 주눅 들지 않더군. 뭐랄까, 패기가 느껴졌다고 해야 하나?” “그 패기 하나로 대통령에 오르셨죠.” “그래서 내가 각하를 아주 좋아해. 우리나라 대통령으로 그만한 분이 없으시다니까.” 태무그룹은 아버지와도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걸로 알고 있다. 당연한 이야기긴 하다. 애초에 대통령인 아버지의 눈 밖에 나면, 제대로 기업을 유지하기도 힘든 게 현실이니까. 나는 시계를 확인하고 말했다. “시간도 늦었는데 본론으로 들어가시죠. 제가 내일 또 출근을 해야 해서요.” “빙빙 돌려 말하지 않는 것 또한 대통령 각하와 똑같구먼. 특히 눈빛이 아주 닮았어.” 진태석 회장은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래, 본론으로 들어가지.” 곧장 진지한 표정으로 탈바꿈하며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내가 최지원 그 녀석과 손을 잡지 않은 건 알지?” “알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재벌들은 저마다의 정보통을 통해 청와대의 상황을 살피고 그 후계자로 유력한 최지원에게 붙었다. 그러나 태무그룹은 다른 재벌들과 달리, 최지원에게 뇌물을 바치지 않았다. 숨겨진 사정까지는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건 진태석 회장은 최지원이 대통령이 되는 걸 원치 않는다는 사실. “난 그 녀석이 마음에 안 들어. 물론, 대통령이 되면 머리를 숙이겠지만…… 그전까지는 아니거든.” 나는 대답 대신 가볍게 입꼬리를 휘었다. 물론, 같은 마음이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벌써부터 속내를 완전히 드러낼 필요는 없으니까. “나는 최준석 대통령님의 후계자로 자네가 되었으면 좋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나?” “글쎄요.”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이제 국회에 들어온 지 한 달밖에 안 됐는데 벌써 청와대를 논하기엔 너무 이른 이야기가 아닐까 싶네요.” “그렇지. 아직은 이르지.” 그는 눈빛을 반짝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다음 총선은 멀지 않은 것 같은데?” 4년. 이제 겨우 4년 남았다. 내가 총선에 출마하는 순간, 형제들과의 전쟁의 서막이 오를 테니까. “내가 최대한 밀어주겠네. 총선부터 차근차근 시작하지.” “총선은 4년 뒤입니다.” “짧지 않은 시간이지.” “총선 전까지는 크게 후원이 필요하지도 않죠.” 손을 잡을 필요성은 있지만, 벌써부터 목줄을 잡힐 필요는 없으니까. “그리고 단순히 얼굴 한 번 본 것만으로 손을 잡을 생각은 없습니다.” “신뢰가 부족하다는 말이구먼.”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그는 여유롭게 와인을 한 모금 마시며 말을 이었다. “그래. 신뢰. 그건 말 몇 마디 섞는다고 쌓이는 게 아니지.” 그는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무언가 보여 주기에 4년은 충분한 시간 아니겠나?” 진태석 회장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흔들렸다. “천천히 기다려보게. 내가 몸소 보여 줄 테니까.”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올 줄이야. 아무래도 이쪽에선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나를 더 크게 원하는 모양이다. 이는 즉 내가 알던 것보다 최지원을 더 싫어한다는 뜻이고. 그렇다면 더욱 더 애타게 만들어야지. “그러면 4년 뒤. 기대해 봐도 되나?” “글쎄요.” 나는 여유롭게 입꼬리를 휘었다. “4년 뒤에 태무그룹이 제게 필요하다면, 기대를 충족시켜 드릴 수 있겠네요.” 진태석 회장의 입가에 웃음기가 가득 피어올랐다. “그 맹랑함까지 아주 각하와 똑같아. 완전 판박이라니까.” 그는 흡족스런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잘 준비하도록 하지.”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음에 뵙지요.” “아, 그 전에 하나만 물어봐도 되나?” 나는 질문하라는 의미로 진태석 회장을 바라봤다. 그는 호기심과 장난기 그 사이에 있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4년 뒤에 다시 만날 때 자네는 대한당인가, 민국당인가?” 나는 씨익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저는 그중 어느 곳에도 모두 들어갈 수 있죠.” 진태석 회장의 입가에 히쭉 미소가 걸렸다. “가능성은 넓게 열려 있을수록 좋은 거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아주 지당한 말씀이야.” 그는 클클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뻗었다. “4년 뒤. 기대하고 있겠네.” “제게 보여 주신다는 신뢰, 저 또한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 * * 홀가분한 마음으로 집으로 향했다. 태무그룹 그리고 진태석 회장. 단순히 그를 만나서 좋은 게 아니었다. 오늘을 기점으로 앞으로 펼쳐질 정치 인생이 너무나도 흥미롭고 기대됐으니까. 여의도 집으로 가는 대신, 바람을 쐬러 도로로 나섰다. 특정한 곳을 내비게이션으로 찍는 대신, 마음이 향하는 곳으로 운전대를 잡았다. 활짝 열린 창문으로 불어오는 밤바람은 시원하게 몸을 훑고 지나갔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자유로를 지나 일산에 도착했을 땐, 이미 자정이 넘은 시간이었다. 슬슬 돌아가야겠는데. 이 생각이 들 때는 이미 인적이 드물어 한적한 도로에 진입했을 때였다. 가로등도 거의 보이지 않는 외진 도로. 집으로 돌아가는 내비게이션을 찍기 위해 적당한 곳에 차를 세우려는 찰나. 지잉지잉. 문자가 올 때 울리는 특유의 진동. 이거 설마…….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휴대폰을 확인했다. -보낸 이: 22 -동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