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영역 (1) (15/200)
  • 영역 (1)2021.11.15.

    “좋은 아침입니다.” “어, 최 비서님 오셨어요?” 8급 오태용이 꾸벅 인사를 하며 나를 반겼다. 김치호 비서관은 나를 보는 둥 마는 둥하며 짤막하게 인사했다. “왔어?” “안녕하십니까.” “응.” 이 정도만 해도 장족의 발전이 아닐까 싶다. 처음에는 인사가 문제가 아니라, 경계하고 골탕 먹이려던 인간이었는데, 이제는 인사 정도는 하게 되었으니까. 여전히 100% 우호적인 건 아니지만, 이 관계는 시간이 해결해 주겠지. 자리로 향하는데, 9급 김한나가 눈웃음을 지으며 다가왔다. “최 비서님 커피 한 잔 드릴까요?” “아, 괜찮습니다.” “필요하시면 말씀하세요.” “네. 고마워요.” 가방을 내려놓고 한창 업무 준비를 하고 있는데, 김치호 비서관과 8급 오태용이 의원실 구석에서 국회 뉴스를 보며 떠드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휴, 저긴 아직도 난리네.” “그러게 말이에요.” 슬쩍 TV화면을 확인했다. 뭔가 했더니, 부정선거 관련 의혹이다. 송병준 의원. 광주 남구의 의원으로, 당연한 말이지만 대한당 소속이다. 전라도 자체가 대한당의 텃밭과 다름없으니까. 다만, 특이한 점이 있다면, 그가 걷는 노선이 아버지와 꽤나 다르다는 것. 아버지도 그를 마냥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대한당의 심장과도 같은 빛고을 광주에서 3선이나 해먹으며 나름대로의 지지 기반을 탄탄하게 쌓아 놓은지라, 따로 건들지 않고 내버려두고 있다. 무엇보다 당내 정치에서도 줄을 잘 서고 있기도 하고. 대한당 의원 중 이러한 구도를 가진 국회의원은 송병준뿐만이 아니다. 대한당이 국회의 과반을 넘게 차지한 지금 같은 상황에서 모든 의원들을 아버지의 입맛에 맞게 선정할 순 없으니까. 아무리 대통령이고 지지율이 높다고는 해도, 독재 국가가 아니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정치라는 건 그런 법이니까. 허나, 송병준 의원은 단순히 특정 정책에 대해 의견이 다르기 때문에 아버지의 눈 밖에 난 것은 아니었다. 지금 논란이 되고 있는 저 부정선거 의혹. 저건 시작에 불과하다. 부정선거 의혹을 포함해 온갖 더러운 물을 손에 묻힌다는 소문이 자자하니까. 물론, 겉으로 보기엔 대놓고 드러난 것은 거의 없다시피 한다는 게 현실이고. 나는 슬쩍 파티션 너머로 고개를 들어 그들의 대화를 경청했다. “이번 1심 결과 나왔나 보네요?” “어, 예상했던 대로야.” 김치호 비서관은 허심탄회한 목소리로 말했다. “증거불충분. 또 무죄야.” ‘또’라는 단어가 들어간 이유가 있다. 남구에서 초선이 되었던 당시에도 부정선거 의혹이 일었으니까. 물론, 그때도 결론은 증거불충분이었고. “그나저나 선배님.” 8급 오태용은 슬쩍 목소리를 낮추며 입을 열었다. “송병준 저 영감, 안 좋은 소문 굉장히 많지 않아요? 제가 어디서 주워들었는데 성추문도 조금 있던 것 같더라고요.” “유명하지.” 말할 것도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 인간은 여자 비서들도 몸매 보고 뽑는다는 소리까지 돌았던 적이 있잖아.” 나도 들었던 적이 있는 것 같다. 물론, 국회에서 일어나는 굵직한 사항들만 청와대로 보고되기에 이런 사항은 세세한 내용까지 알지 못했다. 스쳐지나가며 들었던 게 전부. “소문 돌은 지 꽤 됐을걸? 이번에 그쪽 의원실 못 봤어?” “아, 설마…….” 8급 오태용은 눈썹을 들썩이며 되물었다. “마돈나가 송 영감 의원실 소속이었어요?” “마돈나는 오래 됐지. 몇 년 됐을걸?” 마돈나?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근처에 있던 9급 김한나가 슬쩍 목소리를 낮춰 설명해 주었다. “송병준 의원실에 임지현 비서관이라고 있어요. 부산시장 비서로 있다가 몇 년 전에 올라왔는데 예쁘고 몸매가 좋아서 그런지, 마돈나라는 별명으로 통하더라고요.” “고마워요.” 김한나는 ‘천만에요’라는 대답을 대신하듯 찡긋 웃으며 자신의 자리로 의자를 당겼다. 임지현 비서관은 사내 퀸카 같은 느낌인 모양. 이런 걸 보면 국회도 일반 회사랑 비슷한 점이 많다니까. “저번에 네가 관심 있다고 하던 그 비서도 송 영감네 의원실 소속이었잖아.” “하긴……. 어쩐지 그쪽 의원실 직원들이 계속 바뀐다 싶더라니.” “비서들 뽑아다가 죄다 이상한 짓거리하니까 버틸 수가 있나. 경력 쌓으려고 왔다가 도저히 수치심에 못 견디고 나가는 거지.” 오태용 비서는 한숨을 푹 내쉬며 답답한 심정을 토로했다. “아니, 근데 그런 게 사실이면 저 인간 금배지 빼앗아야 되는 거 아닙니까?” 정의감 짙은 말에 김치호 비서관은 피식 입꼬리를 휘었다. “어디 이 바닥이 옳고 그름으로 판정 나는 거 봤어?” “…….” “대한민국은 힘이 지배하는 곳이야. 여의도는 더욱 더 그렇지. 권력 쥔 놈이 갑이라고. 사파리의 약육강식도 이 정도는 아닐 거야. 일이 터져서 여론이 일어나면 모를까…… 애초에 의원들이 언론부터 찍어 누르니 공론화 될 수도 없잖아. 그러니 조용히 다 묻히는 거지.” 맞는 말이다. 애초에 언론사야말로 정재계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는 곳. 국회와의 유착이 되지 않을 수가 없다. 만에 하나 우여곡절 끝에 공론화가 되더라도 적당히 다른 사건으로 눈을 가린 뒤에 조용해지면 증거불충분, 무혐의가 나오는 게 태반. 그렇지 않더라도 꼬리 자르기로 부하직원 몇 명만 뒷돈을 챙겨 주고 본인은 살아남는 게 정석처럼 느껴질 정도니까. 대한민국은 정의롭지 않다. ‘대의’라는 명분하에 작은 것들을 희생하고 짓밟는 게 한국의 정치니까. 그놈의 ‘대의’라는 게 누구를 향해야 하는지 모두가 알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으니까. 김치호 비서관 저 녀석, 매번 꼼수만 부리고 시비 걸고, 텃세를 부리기에 그저 그런 양아치 같은 녀석인 줄 알았는데, 국회에서 짬을 꽤 먹은 탓에 알고 있는 정보는 적지 않은 모양이다. 나름대로 정치 메커니즘도 잘 알고 있는 것 같고. 하긴, 능력은 있으니까 이치현 의원실에서 버티고 있는 거겠지. 나는 슬쩍 입을 열어 대화에 합류했다. “그나저나 1심에서 혐의 불충분이면 부정선거 재판의 특성상 2심에서도 달라지기 힘들지 않습니까?” “그렇지. 검사들은 즉각 항소한다고 했지만, 부정선거 재판은 일반적으로 추가 증거가 나오기 쉽지 않으니까.” 그래서 1심이 중요하다. 송병준 의원은 초선 당시 의혹이 크게 일었음에도 1심에서 무죄 판결이 나오자, 검찰들은 항소를 포기했던 게 바로 이러한 이유였을 테지. 다만, 이번엔 즉각 항소한다고 했으니, 뭔가 다르길 바랄 뿐이다. “저런 거 신경 쓰지 마.” 때마침 의원실로 들어온 한유라 보좌관이 리모컨으로 TV를 끄며 말했다. “보면 열 받기나 하지, 바뀌는 거 있어? 대한당 저러는 거 한두 번도 아니고. 그냥 일이나 하자고.” 김치호는 머쓱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하긴, 그렇긴 하죠.” 자연스레 TV 앞에 있던 인원들은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나는 스케줄러를 꺼내 오늘의 일정을 간단히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머릿속엔 계속 송병준 의원에 관한 생각이 가시질 않아, 국회 인트라넷에 접속했다. 확인한 건 송병준 의원실의 직원 목록. 아니나 다를까, 역대 직원의 명단을 살펴보니 가관이었다. 일반적인 다른 의원실에 비해 교체되는 인원이 3배는 더 넘을 지경. 그리고 교체되는 인원은 90% 이상이 전부 여직원들이었다. 안 봐도 뻔했다. 송병준 의원에게 최소한 성추행, 심하면 그 이상까지 당했다는 뜻이겠지. 애초에 스펙보다도 외모를 중시해서 뽑는 양반이니 더 말할 것도 없다. 그쪽 의원실의 업무는 특정 몇 명이 전부 다 처리한다고 들었으니 사실이겠지. 부정선거는 둘째 치고, 국회의원을 무려 3선이나 해먹은 녀석이 저렇게 추잡한 짓이나 하고 다닐 줄이야. 불편한 사실이 머릿속에 박히자, 쉽게 가시질 않았다. 직원이 바뀌면 바뀔수록, 송병준 의원이 국회에 오래 머물수록, 위계 위력에 의한 성폭력 피해자가 점점 늘어난다는 뜻이니까. 그렇다고 경찰에 신고하려고 한들, 일개 시민이 국회의원을 이길 수는 없었다. 신이 도와서 국회의원을 이긴다고 한들, 다시는 정계에 발을 붙일 엄두를 내지 못할 테고. 그러니 다들 쉬쉬하며 조용히 사표 내는 것으로 마무리하는 것이지. 답답하다. 현실이 이렇다는 게 화가 날 뿐. 이러한 제도 자체를 엎어버리기 위해서는 더 큰 권력을 쥐어야 한다. 최소한 아버지처럼 대통령 자리에는 올라야 이러한 더러운 권력형 비리, 범죄를 뿌리 뽑을 수 있을 테니까. 허나, 그때까지는 너무나도 오랜 시간이 남았다. 그전에 내가 할 수 있는 게 있지 않을까 싶어서 한참을 고민했다. 그러던 도중 문득 휴대폰이 눈에 들어왔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메시지함에 들어가 봤지만, 새롭게 도착한 문자는 없었다. * * * 저녁 9시가 훌쩍 넘은 늦은 시간. 야근을 마치고 휘적휘적 집으로 향했다. 시원한 맥주나 한 캔 마시고 자야겠다고 생각하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렸지만, 문 앞에서 나는 계획을 변경했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안녕하십니까, 지훈 씨.” 집 앞에는 낯선 남자가 하나 서있었다. 모르는 얼굴이었다. “누구십니까?” “아, 저는…….” 그는 품에서 미리 준비한 명함을 하나 꺼내 내게 건넸다. -태무그룹 비서실장 정영주 “태무그룹에서 나왔습니다.” 명함을 보니 알 것 같다. 이 인간, 태무그룹의 회장 진태석의 그림자로 움직이는 녀석이지. 오래지 않아 재계 측에서도 나에게 접촉할 것이라는 건 알았지만, 벌써부터 움직일 줄이야. 그것도 다른 그룹이 아닌, 대한민국의 재계 서열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태무그룹에서. 나는 경계심 짙은 목소리로 말했다. “여긴 어떻게 들어오셨습니까? 현관 비밀번호를 따고 들어오신 건 아닐 테고…….” “앞에서 기다리려고 하는데 배달원분이 들어가시더라고요. 열린 틈에 따라왔죠.” 그는 방긋 웃으며 물었다. “잠깐 이야기 좀 나누고 싶은데, 괜찮으실까요?” 재계 사람을 집에 들이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원치도 않을뿐더러, 위험하기도 하니까.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집은 어지럽습니다. 위에 가서 이야기하시죠.” * * * 늦은 시간인지라 옥상은 비어 있었다. 여의도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높은 옥상에서 우리는 거리를 두고 섰다. 먼저 입을 연 건 나였다. “무슨 일로 오신 겁니까?” 이치현 의원실에서 추진하는 정책 중 태무그룹과 관련된 건은 없다. 다시 말해 특정 사항에 대하여 로비하거나 부탁하기 위해 온 것은 아닐 터. 그런데도 무려 태무그룹의 회장의 직속 비서실장이 움직였다는 뜻은 하나. “바람도 많이 불고, 밤도 늦었으니 끌지 않고 본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정영주 비서실장은 뺀질거리는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저희 태무그룹에서 지훈 씨를 후원하고 싶습니다.”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 후원의 이유 또한 알고 있다. 그럼에도 모르는 척 물었다. “왜죠?” “특별한 목적은 없습니다. 그저 호의지요, 호의.” 호의. 정치에서는 정말 무서운 단어다. 내가 호의를 보였으니, 다음에 내가 필요할 때 호의를 보여라. 결국 얽히고 얽혀 서로의 목줄을 잡는 것이지. 일반적으로 검은 돈이라는 건, 독이 든 성배다. 그럼에도 유혹을 뿌리치지 못할 만큼 달콤하기에 그 독을 취하고 탈이 나는 것이지. 다만, 예외가 되는 경우가 몇몇 있다. 대표적으로 바로 이런 상황. 태무그룹과 같은 재벌들의 돈이다. 이러한 돈은 먹어도 탈이 나지 않는다. 검은 돈을 먹어서 문제가 되는 경우는 딱 하나밖에 없다. 기업에 문제가 생겨서 사실이 밝혀질 때다. 허나, 태무그룹과 같은 거대 재벌들은 무너질 위험성이 제로에 가깝다. 아니, 가능성이 아예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돈을 먹은 주체를 조지기 위해서는 돈을 건넸다는 사실 또한 밝혀야 하는데, 그러면 결국 자폭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태무그룹은 그럴 리가 없기도 하고. 애초에 나뿐만이 아니라, 수많은 곳에 돈을 뿌리고 있기에 위험해질 가능성 자체가 적지. 까놓고 말해서, 돈을 먹고 눈을 감아 버려도 보복할 수도, 보복하지도 않는다. 다만, 보통의 정치인들은 그 돈의 달콤함을 알기에 또 한 번 손에 사탕을 쥐고자 계속해서 서로의 목줄을 잡고 연을 이어 나가는 것이지. 이게 대한민국의 실태다. 정영주 비서실장은 달콤하게 말을 속삭였다. “돈, 여자를 포함해서 그 외에 원하시는 것 모두 지원해 드릴 수 있습니다.” 지난번의 오동렬 장관과 같은 썩은 동아줄과 달리, 이 줄은 탄탄하기 그지없다. 또한, 그 끝에는 화려한 낙원이 펼쳐져 있을 터. 사실, ‘정경유착’이라는 단어가 괜히 나온 건 아니다. 정치를 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할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니까. 마냥 아버지의 돈을 끌어 쓸 수는 없기에 나도 언젠간 재계 사람들과 손잡을 일이 생길 것이다. 그럴 때 태무그룹과 같은 재벌들은 큰 힘이 되어 줄 터. 정계에서 높이 올라가겠다고 마음먹는다는즉슨 검은 돈을 무시하지 않겠다는 것과 다름없으니까. 허나. “죄송합니다.” 지금은 아니다. 정계에 입문한 지, 한 달이 채 지나지도 않은 벌써부터 내 목줄을 누군가에게 넘길 생각은 없다. 정영주 비서실장은 오해하지 말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특정한 부탁을 드리는 게 아닙니다. 그저 좋은 관계를 맺자고 말씀드리는 거죠.”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나는 청와대의 막내아들. 즉 차기 대한민국을 이끌어 갈 존재다. 아무리 태무그룹이라고 한들, 그림자와 이야기하는 건 내 성에 안 차지. “이러한 문제는 회장님과 직접 이야기하고 싶네요.” 거절을 하더라도, 대가리를 만나고 해야 한다. 잔챙이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붕어와 이야기할 수는 없으니까. “고래를 낚으려면 최소한 포경선이 나서야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통통배로는 어림도 없지. 정영주 비서실장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물들었다. 나는 코를 찡긋이며 돌아섰다. “관심이 생기시면 직접 연락 달라고 전해 주십시오.” 그 말을 끝으로 나는 망설임 없이 옥상을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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