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술에 배가 부를 만큼 (4)2021.11.12.
“청문회에 쓰일 내부 자료, 저희 측으로 공유해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역시나 예상했던 내용. 기대를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다. 내가 대답을 하지 않자, 고민하는 것으로 보였는지 구태웅이 구슬리듯 말을 이었다. “어차피 저희 측이 장관으로 임명되어야 지금 청와대에도 좋고, 그게 곧 지훈 씨에게도 좋은 일 아니겠습니까?”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요.” “……예?” “잘 모르겠는데요.” 부정적인 대답이 나올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지, 그의 얼굴에 당황한 기운이 서렸다. “오동렬 차관님이 장관으로 임명되시는 게 아버지께 좋은 일은 맞지만, 제게도 좋은 일인지는 모르겠네요.” 구태웅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지훈 씨, 혹시 청와대와 등을 돌리실 생각이신 겁니까?” “그럴 리가요.” 나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저희 아버지가 계신 곳이고 제 형제들이 모두 청와대 사람들인데 어떻게 제가 돌아서겠습니까?” “그렇다면 당연히 이번 건에서는 저희와 손을 잡는 게 좋은 거라는 걸 모르실 리가 없…….” “다만.” 나는 그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아버지는 아버지고, 저는 저일 뿐입니다. 각자 제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게 서로에게 좋은 일 아니겠습니까?” 구태웅은 정색하며 얼굴을 굳혔다. “지금 야당에 계신다고 해서 지훈 씨까지 야당 사람이 될 필요는 없습니다. 민국당 그리고 이치현 의원실은 그저 거쳐 가는 단계일 뿐이죠.” 나는 별로 관심이 없다는 듯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그런가요?” “…….” 그의 눈썹이 짧게 휘어졌다. “대의를 생각하시라는 겁니다. 대국적으로 판단하셔야죠. 아직 어리셔서 조금 혼동이 되실 수도 있지만, 멀리 보셔야 합니다.” “글쎄요. 아버지는 저를 여기로 보내며 정치를 배우라고 하셨거든요. 그게 이런 의미였는지는 아직 확신이 안 드네요. 그저 제가 알 수 있는 건.” 나는 그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제가 실장님께 강의나 들으려고 시간을 낸 건 아닌 것 같은데요.” “…….” 구태웅은 이를 질끈 깨물며 한 걸음 물러났다. “아직 청문회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그는 주머니에서 명함 하나를 꺼내 내 손에 건넸다. “생각 바뀌시면 연락 주십시오.” 구태웅은 돌아서며 한 마디를 덧붙였다. “차관님께서 장관으로 임명만 되시면, 섭섭지 않게 보상하실 겁니다. 게다가 정계를 입문하자마자 장관이라는 든든한 줄까지 생기는 것이고요. 장관님께서는 결코 은혜를 잊는 분이 아니십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별 탈이 없다면 장관으로 임명되실 거고요.” “네. 별 탈이 없다면 말이죠.”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그는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골목을 빠져나갔다. 나는 피식 웃으며 명함을 들여다보았다. 출근 첫날부터 이런 식으로 오동렬 장관에게 컨택이 올 줄이야. 여당에서 접근할 것이라고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빠를 줄은 몰랐다. 나는 손가락을 퉁겨서 쥐고 있던 명함을 바닥에 날려 보냈다. 굳이 여당 사람의 명함을 들고 있을 필요는 없다. 어차피 11자리의 휴대폰 번호는 보자마자 단번에 외웠으니까. 필요하다면 언제든 연락할 수 있을 테지. 나는 가볍게 입꼬리를 휘고는 오피스텔로 들어갔다. * * * “내가 어제 봤다니까?” 6급 비서관 김치호는 침까지 튀기며 목소리를 높였다. “신입, 그 자식. 퇴근길에 오동렬 장관 후보자 측 사람을 만났어.” 8급 오태용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선배님, 설마 최지훈 비서님 뒤를 밟으신 거예요?” “……흠흠.” 그는 어색하게 헛기침을 하며 둘러댔다. “뒤를 밟는 게 아니라, 지나가다가 우연히 본 거지. 나 막 그렇게 남의 뒤 캐고 그런 사람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야.” 5급 보좌관 강선우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너 스토킹하는 거 취미잖아.” “아, 선배님. 아니에요. 저번에는 김혁주 비서관이 진짜 수상해서 따라갔다가 스파이짓 하는 거 검거한 거고, 이번에는 진짜 우연히 봤어요.” “그러면 됐고.” 강선우 보좌관은 서류를 넘기며 물었다. “그건 그렇고 어제 본 사람이 오동렬 장관 후보자 측 사람 확실해? 퇴근길에 슬쩍 봤으면 확실하지 않을 수도 있잖아.” “100%예요. 제가 사람 보는 눈썰미는 있잖아요. 구태웅이었나? 오동렬 차관실에서 비서로 일하는 녀석일 거예요. 몇 번 봤어요.” “근데 그게 진짜면 심각한 거 아니에요?” 8급 오태용 비서는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쪽에서 접선한 거라면 여차하다가는…….” “심각한 문제지.” 강선우 보좌관은 들고 있던 서류를 덮으며 고개를 들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최지훈이잖아. 대통령 아들이라고. 이번 장관 지명도 대통령이 직접 한 거 아니야?” “그렇죠.” “만에 하나 그쪽으로 붙는다면…….” 강선우 보좌관은 팔짱을 끼며 탄식을 뱉었다. “이번 청문회, 위험할 수도 있겠는데.” “뭘 그렇게 의심해요?” 한유라는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의원님이 믿으라고 했으면 믿어야지.” “그래서 나도 크게 걱정하지는 않는데…… 치호 말 들어보니까 또 마냥 마음 놓기가 그러네.” 강선우 보좌관의 말에 김치호 비서관은 눈까지 부라리며 말했다. “영감님 말씀은 영감님 말씀이고, 우리는 또 모르죠. 같은 의원실이라고 믿다가 뒤통수치는 걸 한두 번 봤어야지.” 그녀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정 그렇게 의심되면 이따가 출근했을 때 한번 물어보든가.” “물어본다고 제대로 대답하겠어요?” “그러면 묻는 거 말고 별 수 있어?” “…….” 짧게 침묵이 감돌았다. 그렇다고 의심되는 지금 상황에서는 100% 믿고 일할 수가 없었으니까. 입사 경로가 평범했다면 모를까, 최지훈은 청와대 출신의 특채였기도 하고. 김치호 비서관은 답답한지, 한숨을 폭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그나저나 얘는 왜 이렇게 안 와? 출근한 지 겨우 이틀째인데 벌써 빠진 거야?” 그는 눈을 부라리며 시계를 확인했다. “어떻게 선배보다 늦어. 오기만 해 봐.”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벌컥 문이 열리며 이치현 의원과 최지훈이 함께 의원실로 들어왔다. “하하하, 그래?” 이치현 의원의 호탕한 웃음소리. “오셨습니까, 의원님.” “안녕하십니까.” 그는 반갑게 손을 들었다. “어. 다들 일찍 왔네. 커피 한잔하고 회의 시작하자고.” “예, 알겠습니다.” * * * “어떻게 같이 들어와?” 아니나 다를까, 이치현 의원이 집무실에 들어가자마자 김치호가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내게 다가왔다. 그와 동시에 의원실에 있던 보좌진의 시선이 싸늘하게 내게 쏘아져 왔다. “오다가 의원님 만나서 이것저것 이야기 좀 나누고 들어왔습니다.” “……그래?” 그는 의심 짙은 눈빛으로 나를 스윽 훑어봤다. 이 인간은 또 무슨 구실로 시비를 걸려고 하는 건가, 생각이 드는 찰나. “지훈 씨.” 앉아 있던 한유라 보좌관이 무심하게 말을 걸어 왔다. “어제 오동렬 장관 후보자 측 사람 만났어?” 어쩐지 분위기가 왜 이 모양인가 했더니만, 이거 때문이었구먼. “예, 만났습니다.” 숨길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애초에 내 쪽에서 찔리는 것도 없었으니까. 그러나 김치호 비서관은 눈깔을 부라리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이거 봐. 제가 봤다니까요? 이건 진짜 100%…….” 어떻게 알았나 했더니, 몰래 내 뒤까지 밟은 모양. 쯧쯧. 한심하기는. “치호 씨는 조용히 있어 봐.” 한유라는 냉정한 목소리로 나를 바라봤다. “그쪽이랑 뭐 이야기한 거 있어?” “아니요, 없습니다. 어제 오동렬 측 사람이 찾아오긴 했는데 제안은 모두 거절했어요.” “그러면 됐어. 앉아서 일해.” 한유라의 목소리도 잠시. “아니, 선배님. 이러고 넘어간다고요?” 김치호 비서관이 두 팔까지 내뻗는 제스처를 취하며 언성을 높였다. “그걸 어떻게 믿습니까? 여기서 ‘내가 적과 내통했습니다.’라고 인정할 사람이 어디 있어요?” 팔불출 같은 모습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내가 대통령의 아들인지라, 어느 정도 의심하는 건 이해하겠다만, 대놓고 이러면 안 되지. 이런 말까지 굳이 꺼내야 되나 싶었는데, 아무래도 해야겠다. “김치호 비서관님.” 그는 미간을 구긴 채 나를 돌아봤다. “뭔데?” “혹시 잊으셨을까 봐 말씀드리는 건데, 이번에 오동렬 장관 후보자가 차명으로 그린벨트 부지를 거래한 내역, 제가 발견했습니다.” 김치호 비서관은 퉁명스럽게 말을 뱉었다. “잘했다고 뻗대는 거야, 뭐야.” “제가 아니었으면 페이크 제보로 치부하고 넘길 사안이었다는 거죠.” 의원실 내부에서 이미 페이크 제보라고 단정한 상황에서 나에게 관련 자료를 찾으라고 했다는 것 자체가 그의 음침한 의도를 다분하게 엿볼 수 있는 건수였다. “지금 저희 의원실에서 그것보다 더 강력한 무기 찾아낸 거 있습니까?” 김치호 비서관의 입이 굳게 다물어졌다. “애초에 제가 그쪽과 내통할 것이었다면, 그 정보를 찾아냈을 리가 없죠. 저쪽에서 위기감을 느끼고 저한테 접촉을 할 리도 없고요.” 인정할 수밖에 없겠지. 내가 한 말 중에 틀린 건 전혀 없으니까. “그리고 하나 더. 까놓고 말해서 제가 이번 정보로 여당과 손을 잡으려 했다면, 굳이 그렇게 직접 만났겠습니까? 청와대를 통하면 내각 측은 손쉽게 다 연락할 수 있는데.” 한유라 보좌관도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저 어제 들어왔습니다. 누가 첫 출근부터 이렇게 대놓고 움직이겠습니까? 적어도 오자마자 뒤통수를 칠 생각은 안 하죠. 제가 진짜 야당을 엿 먹이려고 했으면 여기서 몇 달이고 몇 년이고 더 버티다가 굵직한 거 하나 넘기는 게 좋을 거라는 생각은 안하셨습니까?” 내가 하는 말은 사실상 하극상에 가까울 정도였다. 그러나 김치호 비서관도 본인이 함부로 의심한 게 있는지라, 더 반박하지는 않았다. 아니, 못한다고 봐야지. 한유라 보좌관은 내 말에 동의하는 눈치였고. 강선우 보좌관 또한, 걱정하긴 했어도 크게 의심하지는 않았는지 내 말을 듣고 수긍한 것 같았으니까. 이 정도 선에서 조용히 넘어가는 게 모두에게 좋을 테지. “그 외에도 의혹 있으신 게 있다면 지금 말씀하십시오. 전부 답변해 드릴 테니까. 같이 일하는 입장에서 의심 받는 건 썩 유쾌하지만은 않거든요.” 강선우 보좌관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김치호 비서관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래. 의원님께서 믿으라고 하셨는데 우리끼리 뭐 하는 거야. 시간도 부족한데 내부에서 이러는 거 서로 심력 낭비잖아.” 그는 김치호 비서관을 다독이며 내 앞으로 데려왔다. “악수 한 번 하고 싹 풀자고.” 강선우 보좌관이 직접 김치호 비서관의 팔을 잡아 내뻗었고. 나는 두 손으로 그의 손을 맞잡았다. “언성 높여서 죄송합니다.” “아니야. 그럴 수 있지.” 김치호 비서관은 머리로는 이해해도 가슴으로 받아들이기는 싫은지, 시선을 피하며 목을 쓸고는 자리로 돌아갔다. 강선우 보좌관은 손뼉을 짝짝 치며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자자, 서류 챙겨서 회의 준비하자. 의원님께 보고할 거 많아.”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