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술에 배가 부를 만큼 (3)2021.11.11.
“이 수만 장의 문서 중에서 우연히 집어든 게 핵심 자료였다고?”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대답했다. “맞습니다.” 그녀는 내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더니. 가볍게 입꼬리를 휘었다. “운이 좋네.” 한유라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첫날부터 완전 대어를 낚은 거 아니야? 무언가를 알고 한 것도 아니고. 초심자의 행운 그런 건가?” 그녀는 신기하다는 듯이 감탄을 내뱉었다. “될 사람들은 확실히 다르긴 다른가 봐.” 후우. 다행이다. 나는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한유라는 밖을 가리키며 말했다. “얼른 구청이나 가자고. 차명 계좌라는 걸 증명하려면 실제 거래 내역이랑 원주인의 재산 현황, 출처 등 추가적인 정황 증거도 찾아내야 되니까.” “오동렬 장관 후보자와의 연관성은 안 찾아도 됩니까?” “그것까지 찾아내면 베스트지. 접촉점까지 찾아내면 직접 증거로 쓸 수 있으니까.” 그렇게 되면 청문회의 결과는 보나마나 이쪽의 승리일 터. “하나씩 천천히 찾아 보자고.” “예, 보좌관님.” “편하게 선배라고 불러. 차 안 가져왔지?” “아, 네. 걸어왔습니다.” 어머니께서 뽑아 주신 차가 있긴 하나, 첫 출근이기에 오피스텔 주차장에 두고 왔다. “내일부터는 차 끌고 와. 앞으로 이동할 일이 많을 테니까. 일단 오늘은 내 차로 이동하자고.” “예, 알겠습니다.” “얼른 가방 챙겨. 늦으면 바로 퇴근해야 될 수도 있으니까.” 나는 내 자리에 있던 가방을 들며 대답했다. “네, 선배님.” * * * 한유라는 조수석에 앉아서 읽었던 자료를 몇 번이고 다시 읽어 가며 정리하고 있었다. 입술까지 오므린 채로 미간에 힘을 주고 있는 걸 보니, 심히 집중한 터라 말을 걸기도 애매한 상황. 나는 대화하는 대신, 운전하며 천천히 머릿속을 정리했다. 미래 문자. 그간 받았던 문자를 나는 ‘미래 문자’라고 칭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 문자부터 그 ‘미래’라는 단어를 붙이기도 애매했다. 그도 그럴 것이, 사진 속 시간적 배경은 미래가 아니라, 이미 일어났던 일. 즉, 1년 전의 과거였으니까. 여전히 이 문자 시스템이 어떤 알고리즘으로 돌아가는지는 알 수 없다. 동영상일 때만 미래이고, 사진이면 과거인지. 그 외에 보낸 이와 관련이 있는 건지도 전혀. 아직까지 섣불리 정보를 단정할 수는 없으니까. 다만, 확실한 건 여전히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두어야 한다는 것뿐. 일단 지금까지 도착한 수단은 모두 ‘문자’였다. 이것으로 미루어보아, 문자를 통해서 오는 건 변함이 없을 터. 그렇기에 문자를 통해서 올 수 있는 거라면, 무엇이든 가능할 것으로 보였다. 단순히 사진과 동영상을 넘어서 녹음 파일이나, 텍스트, 문서 파일 등 스마트폰을 통할 수 있는 거라면 어지간한 파일은 모두 전송 가능할 테지. 그리고 문자들간의 공통점 두 번째. 전부 휘발성이라는 것이다. 이번 사진도 저번과 마찬가지로 한 번 본 직후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아직까지 확정할 수 있는 사실은 적으나, 3번의 문자를 통해 어느 정도 윤곽은 잡히기 시작했다. 앞으로 두세 개 정도만 더 받아 보면 어느 정도 문자의 정보에 대해 추리는 건 가능할 것 같은데. 허나 지금으로서는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아직까지 문자가 오는 조건이라든지, 패턴은 전혀 알아내지 못했으니까. 우선은 청문회에 집중해야 한다. 이번에 어느 정도 활약을 해야, 다음 기회가 올 테니까. “선배님, 도착했습니다.” “어, 벌써?” 한유라는 들고 있던 서류를 모아 글러브박스에 집어넣었다. 그녀는 거울을 보고 가볍게 머리를 만진 뒤, 싱긋 입꼬리를 휘었다. “다 됐으면 갈까?” “네, 들어가시죠.” * * * “오늘은 이 정도만 할까?” “네. 그게 좋을 것 같습니다.” 내 대답에 한유라는 서류를 덮으며 기지개를 쭉 켰다. 어느새 오후 8시. 이리저리 자료를 수집하고 분석하는 동안 시간은 훌쩍 흘러갔다. 오후에 반차를 내놓았다고 들었는데, 그 사실조차 까맣게 잊은 것 같았다. “선배님, 이거 하나 드시죠.” 나는 편의점에서 사 온 피로회복제를 한유라에게 건넸다. “이건 언제 샀어?” “조금 전에 편의점 들렀습니다.” “첫 날부터 뭘 이런 걸 다 샀어. 고마워.” 그녀는 사양 않고 바로 뚜껑을 땄다. 사실, 안 살 수가 없었다. 한유라는 어제부터 밤샘을 한 것도 모자라, 오늘 함께 이동하는 내내 조수석에서 졸릴 법도 하지만, 그녀는 단 한 순간도 졸지 않았으니까 덕분에 다크서클이 진하게 내려와서 안쓰러울 정도. 그럼에도 서류를 볼 때는 눈에 스파크가 튈 정도로 집중하는 걸 보면, 정말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청와대에서 간혹 긴급 상황이 터지면, 비서들과 실장들이 며칠 동안 밤낮 구분 없이 일을 하는데, 딱 그 모습이 연상되었으니까. 오히려 이런 상황에서도 집중력이 흐트러지지 않고, 자료를 분석하고 종합하는 능력을 보면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왜, 이거 한번 읽어 볼래?” 그녀를 보고 감탄하는 게 서류에 대한 궁금증으로 여겨졌는지, 그녀는 정리한 내용을 내게 보여주었다. “예, 보겠습니다.” 오동렬 장관 후보자의 재산 현황 및 흐름. 그린벨트 해제 직전, 해당 땅의 거래 내역. 그리고 국토부 내에서의 회의록 등. 분명 같은 자료를 수집했는데도 분석해서 낸 결론을 보아하니, 감탄이 절로 터져 나왔다. “와아…….” 이치현 의원실의 보좌진 실력이 국회 내에서도 수준급이라는 걸 알고 있었고. 그중에서 한유라가 에이스라는 사실 또한 알고 있었지만, 직접 보니 더 기가 막히는 수준. 제대로 자리를 잡고 업무를 한 것도 아니고, 하루 종일 밖을 돌아다니며 조수석에서 노트북을 두드린 결과가 이 정도라니. 만약 내가 국회로 들어오기 전에 그녀의 능력을 봤다면, 고태욱 비서실장한테 진지하게 청와대로 스카우트하라고 말하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 “궁금한 점 있어?” “아니요. 완전 깔끔하네요.” “당연하지.” 그녀는 찡긋 웃음을 지었다. “지훈 씨는 바로 퇴근해. 내가 의원실 들러서 보고하고 갈 테니까.” “아닙니다.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아니야. 의원님이랑 따로 할 이야기도 있어서 그래.” “알겠습니다. 저 앞에서 세워 드릴까요?” “응. 여기면 걸어갈 수 있지?” “네. 가깝습니다.” “그래.” 나는 도로변에 차를 멈춰 세우고 하차했고. 한유라는 손을 흔들며 운전석에 탑승했다. “내일 보자고.” “들어가세요.” 그녀는 창문을 통해 손을 휘휘 흔들고는 국회의사당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후우우.” 나는 숨을 가볍게 몰아쉬고는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느새 거리는 어둡게 물들어 있었다. 첫 출근부터 아주 정신없이 흘러갔다. 그나저나 국회에서의 첫날부터 미래 문자가 올 줄이야. 그것도 모자라, 오늘부터 바로 청문회 준비까지. 다이내믹할 것이라고 예상은 했지만, 이 정도일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조금 걸리는 게 있다면. 처음 맡은 업무가 다른 청문회도 아니고 아버지가 직접 후보로 지명한 장관 후보자의 청문회라는 점. 아버지는 이것까지 예상하시고 날 이치현 의원실로 보낸 걸까. 그건 아닐 것이다. 아무리 아버지라고는 해도, 이러한 세세한 사항까지 조율할 만큼 시간이 많진 않으니까. 집에 들어가는 골목에 들어서자, 몸은 이미 녹초가 되어 있었다. 씻고 모아 둔 자료만 간단하게 분석하고 자야겠다고 생각하는 그 찰나. “최지훈 씨.” 뒤에서 음침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흠칫 놀라며 돌아서자,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있는 중년의 사내가 내 바로 뒤에 다가와 있었다. 청와대에서 오래 지낸 덕분인지, 테러를 하는 등의 위험한 사람은 아니라는 본능적인 직감이 왔다. 그러나 수상한 것만은 틀림없었다. “……누구십니까?” “잠깐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요?” “무슨 일 때문이죠?” “아, 제가 소개를 안 했군요.” 남자는 명함을 건네는 대신 모자를 들어 얼굴을 내게 보여 주었다. “구태웅이라고 합니다.” 구면이었다. 굳이 더 소개하지 않아도 정체를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오동렬 장관 후보자의 비서이자 그의 오른팔. 그의 온갖 더러운 일을 다 처리해 주는 인물. 분명 이번 그린벨트 구역을 차명 계좌로 거래해 준 이가 바로 구태웅이었을 터. 나는 경계심을 거두지 않고 말했다. “청와대에서 오다가다 몇 번 뵌 것 같네요.” “예. 맞습니다. 그땐 지훈 씨께서 교복입고 계셨는데 어느새 이렇게 훌쩍 크셨네요. 제가 다 감회가 새롭습니다.” 그는 능청을 떨며 말을 이었다. “참, 지금은 국토부 차관실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나는 몰랐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되물었다. “아, 오동렬 차관님과 일하고 계시는군요.” “예, 맞습니다.” 그는 나를 바라보며 싱긋 미소를 지었다. “혹시 바쁘시지 않으시다면, 비즈니스 관련 이야기를 조금 나누고 싶은데 괜찮으실까요?” 보나마나 뻔한 이유겠지. 허나, 그렇기에 이야기를 들어야만 했다. 나에게 먼저 접근했다는 건, 저쪽에서 필요한 게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야근하시느라 끼니도 못 챙기셨을 텐데 부담스럽지 않으시다면, 저녁이라도 같이 하면 좋고요. 참, 김영란 법은 걱정하지 마시고요.” 김영란 법은 개뿔. 공직자들이 대놓고 뇌물을 받아먹는 것만 못할 뿐이지, 개나 소나 다 받아쳐먹는 게 현실인데. “제가 집에 가서 처리할 일이 있어서 저녁은 조금 그렇고.” 나는 구석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저쪽에서 잠깐 이야기만 하죠.” 그는 빙긋 웃으며 내 뒤를 따랐다. “시간 많이 빼앗지 않겠습니다.” * * * 가로등이 고장 나 희미하게 빛나는 탓에 인적이 드문 골목. 먼저 입을 연 건 구태웅이었다. “야근하셨나 봅니다.” “예. 첫 출근부터 정신이 없네요.” “국회가 정말 빡세긴 해요. 저도 정계 첫 입문은 국회였는데 그때는 정말…….” 구태웅은 신변잡기를 시작했지만, 나는 말을 끊었다. “죄송하지만, 제가 오늘은 꽤 피곤해서요.” 오래 끌지 않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이번 청문회 때문에 오신 거겠죠?” “시원시원해서 좋네요. 역시 아버지를 닮으셔서 그런가?” 그는 빙그레 웃고는 말을 이었다. “아실 만한 분이니, 저도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구태웅은 사글사글한 표정을 유지한 채 입을 열었다. “우리 장관님, 청와대 사람인 건 아시죠?” 아직 후보자임에도 불구하고 벌써부터 호칭을 장관님이라고 부르고 있다. 내부에서는 이미 확정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양. “장관님께서는 오래 전부터 대통령 각하를 모셔왔습니다. 그래서 제가 청와대에 따라갔다가 지훈 씨도 몇 번 뵈었던 거고요.” “알고 있습니다. 기억도 나고요.” 내가 중학생 때부터 봐 왔으니 거의 7년, 8년 정도 됐지. “그리고 이번 청문회만 지나면, 확실하게 최준석 각하의 내각이 되는 거고요.” “예.” “그 마지막 단계인 청문회에 이치현 의원께서 들어가시는 것도 알고 계실 겁니다. 그래서 말인데…….” 그는 엉큼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청문회에 쓰일 내부 자료, 저희 측으로 공유해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