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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집 막내아들 (3) (3/200)

파란집 막내아들 (3)2021.11.03.

“뭐?” 아버지의 얼굴에 순식간에 노여움이 피어올랐다. 그의 미간은 세차게 찌푸려졌고, 나를 보는 눈빛은 차갑게 식었다. 실수한 건가? 아니다. 끝날 때까진 끝난 게 아니다. “대학을 가지 않는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아버지의 호통이 실내를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나는 동요하지 않고 차분하게 아버지를 바라보며 말했다. “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그는 이해가 되지 않는 듯 언성을 높였다. “그게 뭐든 대학에 가서 배우는 게 낫다고!” “아버지.” 나는 아주 단호하게. 그리고 목소리에 힘을 실어 진심을 담아 말했다. “저는 정치를 배우고 싶습니다.” “……뭐?” 순간, 아버지의 몸이 멈칫했다. 마치 뒤통수를 맞은 듯이 그대로 굳었다. 그리고는 머지않아. “으하하하하하하하하!” 아주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리셨다. 됐다. 나의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 주먹을 불끈 쥔 채로 말을 이었다. “저는 아버지의 뒤를 잇는 정치인이 되고 싶습니다.” 나는 다시금 몰아쳤다. “물론, 정치외교학과라는 선택지도 있었습니다만, 매력적이지 않았습니다. 제가 사는 곳이 청와대고, 아버지께서 직접 정치를 하시는 모습을 보며 십수 년을 현장에서 배워 왔는데 대학교에 간다고 한들, 제가 더 배울 게 있겠습니까?” “정치라…….” 아버지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셨다. “틀린 말은 아니지. 대학까지 가서 진짜 정치판에서 밀린 교수 나부랭이한테 특정 사상이 물든 정치를 배울 바에는 실전에서 배우는 게 나으니까.” 침을 꿀꺽 삼켰다. 이 정도면 내 의도는 거의 성공한 것에 가깝다고 볼 수 있을 터. “다만.” 아버지는 진심 어린 눈빛으로 날 바라보며 걱정스레 입을 열었다. “네가 너무 좋은 모습만 보고 결정한 게 아닐까 싶구나.” “예?” “정치란 좋은 면이 있으면 반드시 어두운 면도 있을 수밖에 없다. 네가 모르는 이면에는 더러움이 가득할 수도 있어. 온갖 수작질로 널 끌어내리려 하는 인물도 많을 테고. 네 손에 오물과 피를 묻혀야 한다. 이 모든 걸 네가 감당할 수 있겠느냐?” 겪어 보지도 않고 할 수 있다는 말은 함부로 내뱉을 수 없었다. 그러나 단순한 변덕으로 결심한 게 아니라는 패기는 보여 줘야 했다. “감당해 보려 합니다.” 나는 눈을 빛냈다. “그게 무엇이든 간에 제 꿈을 이루기 위해서 그 정도를 버텨낼 각오는 되어 있습니다.” “꿈이라…….” 아버지는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꿈. 좋은 단어지.” 그는 씨익 입꼬리를 비틀었다. “눈빛을 보아하니, 진심으로 정치를 하고 싶은 것 같구나.” “예.” “지원이도 법대를 졸업할 때 같은 이야기를 했었지.” 둘째 형과 비교선상에 올라서는 안 된다. 그것부터가 내게는 적신호니까. “아버지.” 나는 한 발자국 더 나아갔다. “저는 ‘최준석의 아들’로 불리는 게 아니라, ‘정치인 최지훈’으로 이름을 알리고 싶습니다.” “그래?” 그제야 아버지의 입꼬리가 만족스레 휘어졌다. “그러면 해야 할 게 하나 있다.” “말씀하십시오.” “군대부터 가라.” “……예?”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정치인의 발목을 잡는 가장 큰 문제가 바로 군대야. 깔끔하게 현역으로 다녀와. 기왕이면 최전방으로.” 당황스러운 이야기. 하지만 아버지는 구미가 당기는 제안을 하나 덧붙였다. “네가 무사히 다녀온다면, 내가 정치인으로서의 길을 열어 주마.” 고민할 것이 없었다. 순간의 선택은 평생을 좌우하는 법. 여기서 고민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면, 아버지는 내 진심을 의심하고 실망할 것이다. 나는 자신감에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일 바로 신체검사 신청하겠습니다.” * * * “정말 보내실 생각이십니까?” 고태욱 비서실장의 물음에 최준석 대통령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는 안 보내는 게 좋을 것 같나?” “정치를 하려면 일찍이 군대를 다녀오는 게 좋다고 생각은 합니다. 하지만…….” 고태욱 비서실장은 잠시 망설이다가 솔직하게 속내를 털어놓았다. “20살이라는 꽃다운 청춘에. 그것도 한국대 수석 입학까지 포기하고 가기엔 아쉬운 마음이 들어서요.” “그건 그렇지.” 최준석 대통령도 공감하는 바였다. 워낙 학벌을 중시하는 사람이었기에 한국대를 포기한다는 리스크는 누구보다 그에게 크게 다가왔으니까. “하지만 지훈이 말도 틀린 건 없었어.” 아들의 결심에 놀랐고, 그 논리에 한 번 더 놀란 건 사실이었다. 정치외교학과에서 배우는 수업이 쓸모없는 건 아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배우는 건 말 그대로 ‘이상적인 정치’일 뿐, 개인의 감정이 실리고 온갖 뒷공작이 판치는 ‘실제 정치’에서는 그저 이상론에 불과했으니까. 실제 상황에선 적용할 수가 없는 것이지. 차라리 대학을 다니는 4년 동안 실제 정치판에서 구르는 게 훨씬 더 도움이 된다는 건 최준석 대통령과 고태욱 비서실장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었으니까. “각하.” 고태욱 비서실장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만약 막내 도련님께서 군대를 무사히 다녀오신다면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최준석 대통령은 가볍게 턱을 쓸었다. “지훈이 그놈, 간이 커.” 그리고 물음에 대한 대답 대신 다른 말을 꺼냈다. “정치를 하려면 간이 커야 돼. 강단이 있어야 하고.” “맞습니다. 손에 쥐고 있는 걸 포기하고 입대를 결심했다는 게 저로서는 대단할 따름입니다. “담력만 따지면, 둘째를 포함해서 다른 형제들과 비교가 되지 않아.” 최준석 대통령은 흥미롭게 눈을 반짝였다. “매일같이 순종하던 다른 자식 놈들과는 달리, 제 목소리를 낼 줄 아는 놈이니까.” 고태욱 비서실장의 목울대가 꿀렁였다. “그래서 마음에 들어. 물론, 더 지켜봐야 하겠지만, 내가 본 게 맞다면, 다른 놈들과 떡잎이 다른 수준이야.” 최준석 대통령은 가볍게 입꼬리를 비틀었다. “군대에서 특이사항 생기면 바로 보고하도록 해.” “예, 알겠습니다.” * * * “미친놈.” “또라이야.” 처음 부대에 입대한 직후, 매일 같이 들었던 소리다. 무언가 특별한 짓을 해서가 아니었다. 꽃 같은 20살의 청춘을 버리고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입대를 한 것도 모자라. 역대급 불수능이라고 불렸던 시험의 유일한 만점자로서 한국대를 포기하고 군대를 택했으며. 대통령의 아들로서 얼마든지 쉬운 후방으로 빠질 수 있었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피하는 최전방 부대를 지원했으니까. 훈련소에서는 몰랐으나, 자대배치 후에는 나에 대해 언론에서도 크게 다루었다고 들었다. 지금껏 후방의 널널한 부대나 카투사, 군의관, 법무 장교 등 편안하게 군대를 다녀온 형들과도 180도 다른 모습이었으니까. 그래서였을까, 최전방 GP에 처음 배치되었을 때만 해도. “대통령이 버린 아들 아니야?” “청와대에서 찍혔나 보지.” “괜히 엮이지 마. 여차하다가는 높은 분들 눈에 띈다.” 라는 소리를 들었으나. 일병을 달기까지의 두어 달 만에 부대 내 모든 간부와 병사들의 인식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내가 본 놈 중에 제일 똑똑하고 일도 잘해.” “나 금수저 중에 저런 FM은 처음 본다니까.” “역시 태생이 달라서 그런지 마인드가 다르다니까. 유전자 자체가 우리랑 다른 구조 같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된 군생활이었다. 최전방인 GP였기에 남들 다 사용하는 휴대폰도 보안이 중시된다는 이유로 제한되었고. 어떻게든 건수를 잡아 보려고 하는 기레기들 때문에 면회, 외출, 외박, 휴가 또한 남들보다 적었다. 그럼에도 이 악물고 버텼다. 내 찬란한 미래를 위해. 12년 동안 공부만을 바라보고 살았던 걸 생각하면, 이 정도 절제쯤은 별 거 아니었다. 그렇게 지독한 노력 끝에 A급 병사를 넘어 특급 전사를 땄고. 전문 하사로 지원해 임관까지 하며 간부로서 약 1년간의 군생활 후. 병사로 보낸 18개월을 포함해 총 30개월 복무 끝에 22살의 나이로 전역해 사회로 돌아왔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도련님.” “고생은요. 대한민국 남자들은 전부 하는 건데요.” 고태욱 비서실장은 룸미러로 흘긋 나를 보더니 안타까운 목소리를 냈다. “그나저나 이거 아쉬워서 어떡합니까. 각하께서 전역식에 오시기로 되어 있었는데 긴급 회의에 들어가시느라…….” “아닙니다. 새벽에 북한에서 미사일 도발을 했는데 당연히 아버지는 오시기 힘들죠.” 회의도 회의지만, 내가 전역한 부대는 다른 곳도 아니고 GP다. 이런 분위기에 대통령이 왔다가는 일을 치를 수도 있는 지역이기에 삼가는 게 당연한 일. 서운한 감정은 없었다. 오히려 이런 날이기에 당당하게 전역하고 아버지를 만나는 게 기다려질 뿐.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버지께서 가장 아끼시는 실장님이 오셨는데요.” 북한의 미사일 도발이면 회의의 수준이 높은 건 이루 말할 수 없을 터. 그런 상황에서 아버지의 오른팔인 비서실장을 이곳까지 보냈다는 건 나를 끔찍이 아끼신다는 증거니까. 애초에 북한에서도 오늘이 대한민국 대통령 아들의 전역 날이라는 걸 알기에 국지 도발을 감행한 것일 테고. “그렇게 생각해 주시면 감사하죠.” 고태욱 비서실장은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정말 듬직해지셨습니다. 각하께서 보시고 흐뭇해하실 모습이 벌써부터 눈에 선하네요.” 나 또한 기대된다. 아버지와의 약속은 확실하게 지켰으니 남은 건 정치계로 나아갈 일뿐이니까. “지금쯤이면 도련님 제대했다는 이야기는 기사로 쫙 나갔겠네요.” “그렇겠네요. 전역식 때 보니까 기자들이 많이 왔더라고요.” 휴대폰을 꺼내 인터넷에 들어가자, 기다렸다는 듯이 나의 전역 소식에 관한 기사들이 우후죽순 쏟아져 나왔다. -늠름해진 파란집 막내아들, 최지훈. 전역과 함께 태극기에 충성! -최지훈을 끝으로 청와대의 다섯 남자 모두 무사히 전역에 성공. -수능 만점 후 돌연 입대한 최 대통령 막내아들 최지훈, 앞으로의 향방은? 기사의 내용은 물론, 국민들의 여론도 상당히 좋았다. 애매하게 다녀올 거, 화끈하게 최전방으로 간 것도 모자라 전문 하사까지 지낸 덕분에 많은 이들의 귀감이 되었다며 칭찬의 소리가 줄을 이었으니까. 덕분에 최근 2년 동안 국회의원을 포함한 정치인들의 자식 대부분이 눈치를 보며 현역으로 입대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부분이지. “아, 참. 도련님.” “네?” “혹시 이번 주말에 일정 있으십니까?” “아니요. 아직 없습니다.” 일부러 전역 이후 스케줄은 아무것도 잡아 두지 않았다. 아버지께서 어떤 이야기를 하실지 모르니까. “잘됐네요. 돌아오는 토요일에 광화문 광장에서 대통령 연설 있는 거 아시죠?” “예, 들었습니다. 6.25 기념식의 70주년 연설이죠?” “맞습니다. 각하께서 그 행사에 도련님도 오시면 좋을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순간, 귀가 번뜩했다. “아버지께서 직접이요?”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아버지는 국가 기념 행사에서 자식들과 함께 참석하신 적이 없다. 법과 관련된 행사가 있을 때에만 국한되어 둘째 형을 몇 번 데리고 간 게 전부. 그런데 다른 행사도 아니고 6.25 기념식 70주년 행사에 나를 데리고 간다? 이건 지금까지와 차원이 다른 이야기다.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던 정계 입문의 첫 발을 내딛는 과정이라고 볼 수도 있을 터. 다만, 문제가 있다면 이게 오직 나만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 “혹시 지원이 형도 옵니까?” “예. 둘째 도련님도 일정이 되시면 오시기로 이야기를 했던 것 같습니다. 다른 도련님들은 안 오시고요.” 역시나 우려했던 대로다. 그러나 내 입가엔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이것만으로도 다른 형들을 뛰어 넘어 둘째 형과 비슷한 범주 내로 올라갔다는 뜻이니까. 아마도 이 소식을 들은 둘째 형은 미간을 찌푸릴 수밖에 없겠지. 이 정도만 해도 군대에서 그렇게 뺑이를 치며 고생했던 보상을 받기엔 충분한 성과다. 이거 생각보다 판이 재미있어지겠는데? 그런데 그 순간. 지잉지잉. 휴대폰에 진동이 울렸다. -보낸 이: 22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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