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때마침 북부 개척도 제법 진척됐다. 이동 마법 제한이 충분히 완화된 덕분에 우리는 원하는 때마다 북부에 방문할 수 있었다.
산맥 아래와 평야를 중심으로 소규모 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제는 식당과 여러 잡화점 등이 번듯하게 들어서는 모습을 보며 에카르트 역시 뿌듯한 듯했다.
이번에는 다비온과 블랑세 역시 함께 왔다. 그들은 가끔 올 때마다 한 걸음씩 발전한 북부의 모습을 다정하게 지켜봐 주었다.
우선 블랑세는 황후로서 공작인 내게 앞으로 개정될 정책들에 대해 따로 알려 주었다.
“두 달에 한 번은 정기 회의에서 영지 상황을 의무적으로 보고하고.”
“응.”
“보름에 한 번은 재무대신 등이 참석하는 회장에 와서 황실 재정이 투명하게 운영되는지 확인하기를 권장하고 있어.”
“응.”
“그리고… 하루에 한 번씩 내 방으로 찾아오는 일대일 회의.”
나는 그것도 무심코 “응.”이라고 답할 뻔했다. 그러나 안전의 위협을 느끼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런 일정은 없어!”
“아니. 루솔릿 공작은 해야 해.”
“왜?”
“시엘은 시엘이니까.”
블랑세가 말도 안 되는 논리를 펼쳤고 결국 나는 일주일에 한 번으로 합의를 보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앞으로의 북부에 대해서도 다비온과 에카르트가 의논했다.
“에카르트. 머지않은 시일에 북부를 크로덴 공국으로 분리할게.”
“북부를.”
에카르트의 목소리는 많은 감정을 억누르고 있었다.
적어도 내가 공작으로 있고 블랑세가 황후로 있는 동안 별일은 없겠지만…
귀족은 황족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구조.
블랑세와 다비온은 그것을 알기에 우리를 자유롭게 해 주려는 것이다. 또한 선대 크로덴 공작과 에카르트에게 용서를 구하는 길이겠지.
“결정에 책임질 수 있겠지.”
“그래.”
다비온이 약속을 지키리라는 사실은 모두가 잘 알았다.
북부는 크로덴 가문이 제국에서 받은 영토.
이전처럼 산맥 너머로 쏟아지는 마수를 몰살할 필요도 없고, 더 이상 척박한 곳이 아니라 사람이 살아갈 이곳은 이제 온전히 에카르트의 것.
나는 에카르트에게 진심으로 축하를 건네줬다.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하나뿐인 연인이며 내 평생의 동반자로서.
***
북부에서 돌아온 나와 에카르트는 루솔릿 공작령에 주민들이 거주하는 구역과 상단이 드나드는 구역을 분리할 필요성을 느꼈다. 또한 역참을 설치할 뿐만 아니라 쉬어 갈 수 있는 상업 지구도 만들기로 했다.
나는 루솔릿 공작의 신분으로 황실 회의장에 참석해 평야 개발 계획과 역참 설치 안건을 발표했다.
루솔릿 공작령이 경제뿐만 아니라 문화를 잇는 중심이 되겠다는 뜻이었다.
다비온과 나는 충분한 신뢰가 쌓였고 그동안의 활약으로 다른 귀족들 역시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황제 부부가 회장을 빠져나가자 귀족 중 한 명이 나를 슬쩍 떠보았다.
“독립하려면 자금이 많이 들 텐데. 얼마 전만 해도 구휼미 창고도 비어 있었는데 괜찮습니까?”
체리베리 과수원과 타르 공국에서 받은 돈이 있었다.
“네. 여러 영지와 상단에서 투자 요청도 쇄도했답니다.”
“그런! 나 역시… 루솔릿 공작령의 개발 사업에 관심이 많소. 혹시 자금이 필요하다면 꼭 내 가문을 기억해 주시오. 돈은 늘 많을수록 좋은 거 아니겠습니까?”
“기억하고 있을게요.”
나는 싱긋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떠나자 이번에는 다른 귀족, 플랫 자작이 미청년을 데리고 다가왔다.
“루솔릿 공작님. 이쪽은 제 아들입니다.”
“루솔릿 공작. 듣던 것보다 더 아름다우십니다.”
영식은 내게 목례하며 은근한 눈빛을 했다. 제법 잘생긴 얼굴이었지만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남성이 에카르트인 내게는 얼굴 공격이 끄떡없었다.
“모, 모쪼록 앞으로 좋은 관계로 지냈으면 합니다. 잘 부탁드릴게요.”
“그래요.”
나는 인사말 외에 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오늘 혹시 시간이 있으시다면 저와 식사라도 하심이!”
이렇게 의도가 투명할 줄이야.
“영지에 일이 남아서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내가 그렇게 답하자 에카르트가 나머지 귀족은 더 이상 상대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내 손을 잡고 회장을 빠져나갔다. 마차를 세워 둔 곳으로 뚜벅뚜벅 향했다.
“엘린.”
“네.”
아까 영식 때문에 질투하는 거라면 나도 설명할 거리가 많았다.
만약 에카르트가 이 일로 인해 또 불안함을 느꼈다면 나는 그를 안심시키려 했다. 하지만 에카르트는 내가 말하지 않아도 먼저 믿어 주었다.
“당신이 그놈에게 관심 없다는 거 알겠습니다.”
그러다가 마치 자신의 말이 틀리지 않길 바라는 것처럼 걸음을 멈추고 덧붙였다.
“맞지요?”
“네. 관심 없어요.”
“아주 착합니다.”
나도 착하다며 에카르트를 쓰다듬었다. 우리가 서로를 쓰다듬는 모습을 보고 귀족들은 얼굴이 붉어진 채 지나갔다.
그다음 날. 평소처럼 에카르트와 함께 집무실에 있는데, 헬라가 플랫 자작이 플랫 영식을 데리고 찾아왔다는 소식을 전했다.
온다는 소식을 듣지는 못했지만 일단 부자를 방으로 들여보냈다. 그러자 부자가 내게 90도로 고개를 숙이고 외쳤다.
“어, 어제 일은 죄송합니다! 제 아들이 남자를 좋아한다고 하더군요.”
“아, 네? 그렇군요.”
만나 볼 생각도 없었는데. 영식은 손의 반지까지 보여 주며 말했다.
“그… 외국인 자제와 사귀고 있습니다!”
“그래요. 축하드려요.”
영식은 분명히 어제는 좀 더 도도한 인상이었는데 지금은 툭 치면 울 것 같았다.
“가, 감사합니다. 그럼… 여기서 어떻게 더 사죄해야 할지…?”
그는 내가 아니라 에카르트 쪽을 흘긋 쳐다보며 눈치를 살폈다. 에카르트가 또 무슨 수를 썼겠지. 대충 사정을 눈치챈 내가 딱 잘라 말했다.
“이제 가 보세요.”
“살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플랫 자작과 영식은 과하게 예를 차려 뒷걸음질로 물러났다. 다시 우리만 남게 되니 에카르트는 수상한 미소를 지었다.
“엘린. 별일 아니었으니 다시 들어가시지요.”
“그래요. 고생이 많으시네요.”
내가 여러 의미를 담아 말하자 에카르트가 뻔뻔하게도 미소 지었다.
“고생한 저를 위해 무엇을 해 주시겠습니까?”
내가 까치발을 들고 에카르트의 귀에 살며시 대답을 속삭였다.
***
샤사와 샤를은 루솔릿 공작령에 도착했다.
루솔릿 공작령과 타르 공국 간의 거리가 상당한데도 일찍 올 수 있던 이유는 하나. 바로 교역로가 시범 운영 중이기 때문이었다.
델을 비롯한 공국 고위 신하들 역시 오는 내내 교역로가 얼마나 편리하고 주변 시설이 잘되어 있는지 칭송했다.
“여기가 루솔릿 공작령!”
샤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타르 공국에도 새로운 문물이 들어오고 발전하고 있었지만 이곳은 그야말로 별천지였다.
수백 개의 상점가가 즐비하게 늘어서고 마정석으로 만든 조명이 달려 밤에도 야경이 근사할 것 같았다.
게다가 깔끔한 의상을 입은 유랑 시인이 깨끗한 목소리로 노래를 했고, 근처를 지나가는 마차와 귀족들의 행색은 전부 고급스러워 보였다.
샤사는 괜히 주눅이 들어 옆으로 멘 가방을 꼭 붙들었다. 결혼 선물로 시엘리나에게 줄 목걸이와 팔찌, 귀걸이를 만들었는데 좋아할지는 확신이 안 섰다.
“오라버니. 공왕님은 이런 거 집에 백 개도 넘게 있겠지.”
“백 개가 뭐야. 백만 개도 넘을걸.”
“그렇게 많이!”
시엘리나가 타르 공국에서 온 귀빈들을 환영했다. 샤사는 시엘리나가 범접할 수 없는 존재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는 언제나처럼 남매를 친절하게 대했다.
“공왕님. 결혼 축하해…요.”
“샤사, 안 어울리게 웬 존댓말이야! 고마워.”
시엘리나가 환하게 웃으며 팔찌를 착용했다. 가느다란 손목에 잘 어울렸다. 샤사는 많은 사람들 중에 그저 한 사람이 되는 게 조금 슬프기도 했다.
신부와 신랑 대기실. 나의 모든 취향 그 자체이자 반쪽 아니, 반쪽이라고 하기도 부족해 전부 같은 사람이 내게 사랑을 속삭였다.
“엘린. 오늘도 아름답군요.”
“에카르트도요.”
“잠시라도 시선을 떼고 싶지 않습니다.”
에카르트가 사랑을 표현할 때면 나는 언제나 처음 듣는 고백처럼 설렜다. 내가 그의 맑은 뺨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당신은 정말… 사랑이 많은 사람이네요.”
“엘린에 대한 사랑 말이죠.”
“알아요. 항상 깨닫게 해 줘서 고마워요.”
“앞으로 언제나 그러겠습니다. 늘 당신의 옆에 있을게요.”
나는 더 이상 이전처럼 마음을 졸이거나 답답하지 않았다. 우리 사이에 생긴 안정감과 신뢰. 그 감정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견고해질 것이다.
결혼식 주례는 없었다. 나와 에카르트의 탄생화를 장식하고 야외에 테이블과 단상을 만들었다. 그야말로 공작성 자체가 결혼식장이라 규모도 크고 화려했다.
공작성 로비와 정원을 오늘은 모두에게 개방해서 축제를 즐기도록 했다. 여러 악단의 축하 노래와 시선을 잡아끄는 공연이 이어졌다.
한창 분위기가 낭만적으로 무르익은 후 나와 에카르트는 단상 앞에 섰다.
델. 실라. 헬라. 니나. 기사단.
가장 고맙고 좋아하는 이들이 눈앞에 모두 모여 있어 정말 고마웠다.
“루솔릿 공작, 시엘리나 루솔릿입니다. 오늘 저희 결혼식에 참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모두 내 말에 집중하는 게 느껴졌다. 내가 에카르트의 손을 꼭 잡자 결혼반지의 느낌이 전해졌다.
“제 남편, 에카르트 크로덴 공작은… 예전부터 여러 위기를 함께하고 극복한 좋은 동료이자 연인입니다. 오늘은 그를 부군으로 맞이하는 공식적이고 경사스러운 날이니 모두 함께 축하해 주시길 바랍니다.”
시엘리나 루솔릿, 에카르트 크로덴의 결합.
가장 높은 작위인 공작끼리 결혼한 후에는 서로 독립적인 가문과 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물론 나는 크로덴 공작령의 일을 내 일처럼, 에카르트는 루솔릿 공작령과 타르 공국의 그의 일처럼 도울 것이다.
모두의 앞에서 맹세의 키스를 하기는 아무래도 보는 눈이 너무 많아서, 에카르트가 내 입에 가볍게 입을 맞추는 거로 대신했다.
나는 수십만 명의 영지민을 이끄는 공작이 되었다. 부담감이 없다면 거짓말일 테지만 기꺼이 감당할 준비가 되었다.
더 이상 어디로도 도망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내 옆에, 지키고 싶은 사람들이 이 자리에 있으니까.
<완결>
공금,갠소,[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