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칸나가 화들짝 놀라서 서둘러 예를 차렸다.
“황후 폐하! 죄송합니다. 제가 아직 부주의하여 이런 실수를….”
블랑세가 손에 끼고 있던 반지를 빼자 지팡이로 변했다. 알 수 없는 주문과 성력에서 나오는 빛이 블랑세를 더 신비롭게 보였다.
“아.”
맺혔던 피가 사라지고 따뜻한 기운이 퍼져 갔다. 마음이 차분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다가와 주시다니. 일개 시녀인 내게 능력을 사용하셨어.’
칸나는 왠지 블랑세를 향해 미묘한 감정이 들기 시작했다.
“감사…합니다.”
“뭘.”
블랑세가 우아하게 미소 짓자 칸나는 어쩔 줄 몰라 했다.
그 일이 있고 난 뒤에 다른 시녀들과 함께 소박한 식사를 하며 칸나는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시녀가 다치면… 황후 폐하께서 치료해 주기도 하시나요?”
그러자 시녀끼리 묘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중 칸나를 유독 괴롭히던 한 명이 득달같이 따졌다.
“황후 폐하가 치료해 주셨어?”
“아, 아뇨.”
“쓸데없는 질문하지 말고 일이나 빠르게 해! 오늘은 황후 폐하의 치장을 도와야 하니까.”
“치장을 돕는다고요?”
“그래.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그리고 시녀는 칸나의 그릇을 뺏어가 버렸다.
칸나는 블랑세의 모습을 보고 자기도 모르게 뺨이 붉어졌다. 수수하게 아름다운 인상이었지만 장식이 잘 어울렸다.
블랑세는 화장대 앞에 앉았고 칸나에게 말을 걸었다.
“오늘 처음 치장을 돕는구나.”
“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칸나가 수줍게 고개를 숙였다. 블랑세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보석함의 목걸이를 보여 줬다.
“뭐가 어울릴 것 같니?”
눈에 띌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한 칸나는 신중하게 보석함의 장신구를 살펴보았다.
유독 눈길을 잡아끄는 목걸이가 있었는데 그건 칸나가 본 장식품 중에 가장 아름다웠다. 게다가 조명 때문이 아니라 보석 자체에서 신비로운 빛이 났다.
“이거…요.”
“보는 눈이 있구나. 시엘이 준 목걸이니 조심히 걸어 주렴.”
“루솔릿 공작님 말씀이신가요?”
“맞아. 빛나는 건 성력이야.”
“너무 아름다워요.”
칸나는 이런 귀한 물건을 만져 보게 되어 영광이었다.
제국의 가장 높은 자리인 황후와, 황족 다음으로 높은 작위인 공작끼리 가까운 사이다. 제국은 이 둘을 중심으로 흐를 터.
‘역시 황제 폐하가 아니라 황후 폐하의 눈에 드는 게 나을지도.’
칸나는 블랑세와 적이 되고 싶지 않았다. 애초에 다비온을 두고 경쟁할 수도 없는 상대였다. 가족이 등을 떠밀어 시녀로 들어왔지만 그녀와 어떤 관계가 될지는 자신이 바꿀 수 있을 것이다.
치장을 마치고 더 화려해진 블랑세는 마지막으로 신발을 골랐다. 그녀는 굽이 낮은 새 구두를 가리켰다.
‘산책을 가신다고 했는데.’
구두를 신겨 주면서도 칸나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새 구두를 신고 오래 걸으면 발이 아플 텐데 말이다.
“저, 황후 폐하. 구두 한 켤레를 더 챙길까요?”
“괜찮아.”
블랑세가 괜찮다면 다른 방법이 있을 거라고 칸나는 믿었다.
막 업무를 마친 다비온이 블랑세의 방으로 왔다.
“블랑세!”
“다비온, 일찍 오셨네요.”
“네. 보고 싶어서….”
칸나는 로맨스 소설의 여주인공과 남주인공처럼 알콩달콩한 둘의 모습을 보고 설렜다.
황제 부부는 담소를 나누며 황실 정원을 걸었다. 수많은 꽃 속에서도 칸나는 오직 블랑세의 뒷모습만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블랑세는 얼마 걷지 않고 다비온의 어깨를 붙들었다.
“잠시 쉬었다 가요.”
“그럴까요?”
“새 구두를 신어서 그런지 조금 아프네요.”
블랑세가 레이스가 달린 드레스 자락을 살짝 걷었다. 칸나는 가느다랗고 하얀 발목과 선이 예쁜 복사뼈를 보자 괜히 이상한 느낌이 들어 저도 모르게 시선을 돌렸다.
“주물러 드릴까요.”
“네.”
황제는 무릎 위에 황후의 다리를 올리고 마사지를 했다.
정략혼 부부에게 나올 수 없는 자연스러운 애정이, 금세 사랑에 빠진 연인에게 찾을 수 없는 깊은 신뢰가 묻어 나왔다.
충분히 성력으로 치료할 수 있으리라. 블랑세는 다비온이 자신을 챙겨 주기를 의도했지만 그런 애교가 나쁘게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한편으로 신선했다.
“더 보고 싶은데.”
“제게 업히실까요?”
“아니. 얼굴을 보고 싶어요.”
“그럼, 안아서 모시죠.”
다비온이 블랑세를 편하게 안아 들고는 사이좋게 걸어갔다. 칸나는 깨달았다. 저곳은 자신이 끼어서는 안 되는 자리라고.
단 며칠이었으나 칸나는 점점 명확히 알 수 있었다.
아리타 소남작의 판단과 달리 블랑세는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가졌고 다비온과 주고받는 마음 역시 생각보다 더 깊었다.
“그럼, 들어가 봐.”
블랑세가 시녀들을 물리자 칸나 역시 예를 갖춰 인사했다.
“물러가겠습니다.”
어느덧 칸나 역시 공손함이 마음에서 우러나와 고개를 숙였다.
시녀들과 함께 돌아가는 길. 칸나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시비에 일방적으로 휘말렸다.
“야. 너도 황실에 줄을 대려고?”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어요, 선배님.”
“그래. 어디 한번 계속 모른 척해 봐.”
시녀는 칸나에게 의미심장한 경고를 던졌다. 칸나는 삐죽 입을 내밀고 이제는 대놓고 블랑세의 눈에 잘 보이기로 다짐했다.
다음 날 아침. 칸나가 일어나기도 전에 부서질 듯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따라와.”
시녀가 무슨 사정인지 알려 주지도 않고 블랑세의 방으로 데리고 갔다. 방에는 시녀들 몇 명이 더 모여 있었다.
블랑세의 화장대 위에 보석함 하나가 놓여 있었다.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폐하께 사실대로 말하여라.”
페리가 호통을 쳤다. 칸나는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상황을 파악하려고 했다. 블랑세가 팔찌 하나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보석에 금이 갔더구나. 어제 네가 정리했다던데.”
“제가…요?”
“그래. 바닥에 떨어뜨려 금이 갔다지. 왜 보고하지 않았니?”
“저는.”
하늘에 맹세코 그런 적 없었다. 다른 시녀가 입꼬리를 올리고 입 모양으로 말했다.
‘그러게 나가지.’
내게 누명을 씌워 내쫓으려는 수작이구나, 칸나는 생각했다. 황후에게 새로운 수족이 생기지 못하게 막고 자기들의 파이를 유지하기 위해 말이다.
“제가 아닙니다.”
“어젯밤 폐하께 보고하겠다고 하였거늘!”
시녀가 미리 계획한 것처럼 칸나를 몰아세웠다. 칸나가 재차 부정했지만 애초에 쪽수에서 밀렸다.
한편 자초지종을 들은 블랑세는 지그시 보석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칸나가 바닥에 떨어뜨려서 금이 갔다고?”
“네.”
시녀가 틀림없다는 듯이 말했지만, 페리 남작 부인은 아무 말도 보태지 않았다.
“이 보석. 남부에서 수입한 특수한 옥석이란다.”
“…….”
“고작 땅에 떨어뜨리는 정도로 금이 가는 경도가 아니야. 날카로운 쇠붙이로 일부러 긁어야 흠집이 생기지. 예를 들면.”
블랑세가 일어나 손을 뻗었고 눈 깜빡할 사이 시녀의 머리카락이 풀렸다.
시녀의 머리를 고정하던 핀을 블랑세가 가져간 것이다. 블랑세는 핀으로 값비싼 보석을 아무 망설임도 없이 긁었다. 똑같은 흠이 생겼다.
“네가 덮어씌우려 했구나.”
“저, 저는.”
시녀는 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함께 담합을 한 다른 동료들을 바라봤다. 하지만 다른 시녀들은 모른 척했다.
“게다가 신입에게 보석함 정리를 맡겼다… 원래 일 처리를 그렇게 하니?”
“죄, 죄송합니다!”
시녀는 당황했다. 여태 알고 있던 블랑세의 이미지가 뒤바뀌었다.
사교계에 데뷔한 적 없는 백마법사. 순한 인상에 선대 황후의 모략에 가담하지 않은 시녀들은 그대로 고용을 유지하는 관대함.
하지만 블랑세는 잘잘못을 명확히 가렸으며 위아래를 분명히 했다. 아니. 이미 시녀들의 계략은 파악하고 그저 시간을 재고 있었을 뿐이다.
시엘리나 역시 블랑세를 순수하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아끼는 사람들에 대해서였다. 이전 생처럼 여린 마음으로는 황후의 자리에 있을 수 없었기에.
“황후인 나를 속이려던 죄. 제국법에 따라 처벌하겠다.”
블랑세가 읊은 조항은 정확했고 판례에 맞아 떨어지는 것을 아는 시녀들은 당황했다.
“황후 폐하!”
“충성심이 지나쳤습니다.”
“아니.”
블랑세가 딱 잘라 말했다.
“충성심은 늘 지나쳐도 부족하지. 너희의 잘못된 방식을 충성심으로 포장하지 마.”
시녀들은 더 변명을 늘어놓았다가는 더 처벌이 가중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기사들이 페리 부인을 비롯한 시녀들을 데리고 간 후 칸나는 혼자 남자 겁에 질렸다.
황후가 자신에 대한 처벌을 언급하지 않아도 안심할 수 없었다.
‘내가 온 목적도 알고 계실 거야.’
칸나는 무릎을 꿇고 지금이 마지막 기회라는 심정으로 간곡히 말했다.
“…저는 진심으로, 황후 폐하를 모시고 싶습니다!”
“저들은 나의 환심을 사고 싶어서 널 쳐 내려고 했어.”
“…….”
칸나가 벌벌 떨며 고개를 들었다. 꽃 한 송이 같던 블랑세에게서 높고 거대한 산 같은 위압감이 느껴졌다. 블랑세는 차분한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그러니 네가 그 자리를 메우려면 더 충성해야겠지. 올바른 방식으로.”
“네, 네. 황후 폐하의 말씀 명심하겠습니다.”
도저히 블랑세가 거스를 수 없는 존재처럼 느껴졌다. 사람들이 말하는 상냥하고 능력 있는 황후는 필요할 때 얼마든 냉정하고 카리스마를 발휘했다.
“일어나거라.”
“가, 감사합니다.”
“네게서 마력이 느껴지는구나. 다른 일거리를 줄게.”
블랑세의 말에 칸나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칸나는 자신의 과거와 가문을 내려놓고 블랑세를 따르기로 했다.
블랑세는 아렌다와 좋은 의미로 비슷한 부분이, 좋은 의미로 다른 부분이 있었다.
***
나는 에카르트와 함께 청첩장을 작성하며 고마웠던 사람들을 떠올려 보았다.
루솔릿 공작령을 함께 이끌어 주는 고용인과 신하, 그리고 동방 요리의 향수를 풀어 준 벨라 영애.
타르 공국을 지키고 있는 델과 신하들, 루솔릿 공작가에서 나를 기다려 준 실라, 귀여운 샤사와 샤를 남매….
어느새 책상 위에 청첩장이 가득 쌓여 갔다.
“엘린. 지인이 많군요.”
“에카르트의 지인이기도 하잖아요.”
그러자 에카르트가 질투하는 대신 히죽 웃었다.
결혼식 준비는 여러 사람들이 도와준 덕분에 힘들지만은 않았다. 게다가 에카르트가 웨딩 플래너보다도 적극적이었다.
공작성을 장식할 꽃장식도 직접 구상하고 우리의 결혼식 예복까지 나보다도 더 신경 썼다.
블랑세는 처음부터 황후궁에서 지냈던 것처럼 완벽히 적응했다.
애초에 그녀가 왕족으로서 타고난 우아함은 가리려 해도 가려질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 말이다.
보석으로 장식한 테이블 위에서 한담을 나누다 나는 블랑세에게 청첩장을 전해 줬다.
“나, 에카르트와 결혼해.”
“축하해.”
“…….”
“마음 바뀌면 언제든 돌아와.”
자기도 결혼했으면서 무슨.
“그런데 시엘. 너는… 자유로운 거 원하지 않았어?”
나는 최소한의 짐을 챙긴 채 동방으로 떠나려던 그때를 생각했다.
에카르트와 블랑세에게 잡히지 않고 동방으로 떠났다면. 이후에 타르 공국에서 무사히 다른 왕국을 돌아다녔다면.
어떤 인생을 살고 있었을까?
나는 계속 편한 길을 택했겠지. 분명한 건 내 삶에 둘은 없었으리라. 상상도 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사실… 처음엔 어디에도 묶이고 싶지 않았어. 그런데 너와 에카르트가 소중해지고… 요즘은 내가 먼저 묶고 싶다는 생각을 해.”
“시엘. 언제든 묶어도 환영이야.”
“어쨌든 함께하면서 얻는 자유도 행복한 것 같아.”
“것 같아?”
“행복해.”
나는 진심으로 미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