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나는 이전 루솔릿 공작과 리셀 부인, 라멜과 리타를 황무지로 이송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공작 부부는 서로 다른 구역으로, 남매는 같은 구역으로 배정받았다.
사실 그들의 형벌을 보는 건 시간 낭비란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리타가 감옥에서 다시금 부활의 기회를 노리다 발각되었기에 이번에는 내 눈으로 직접 그를 봐 두기로 했다.
나는 나와 에카르트의 존재감을 옅게 하는 마법을 사용했다. 저들은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는 게 서로에게 편했다.
라멜과 리타는 더 이상 떨어질 곳이 없어 보였다. 이전에 나를 향해 악담을 내뱉고 원망하던 건 찾을 수 없이 완전히 독기가 사그라든 모습이었다.
고된 일을 하는 와중에도 라멜은 여전히 리타를 챙겨 주고 있었다. 물을 건네거나 안색을 살피며 말이다.
이상했다. 누구보다 이기적으로 살았으면서 정작 본인은 챙기지 않는 라멜이.
그녀의 삶에 사랑과 가족을 빼면 남는 게 없을까. 사랑과 가족의 유형도 정말 다양한데.
나는 라멜을 이해하지 않기로 했다. 모든 것을 이해하며 살 필요는 없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만 이해하고 앞으로의 행복을 향해 걸어가면 되었다.
***
“허어. 즉위식에 혼인까지 하다니 너무 급작스럽지 않소? 제국에 전례 없는 혼란의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사교계에 정식으로 데뷔한 적도 없는 분이 황후가 되다니.”
시스 자작과 아리타 소남작은 남작성에 모여 정세를 토론했다. 그들은 거의 처음으로 나라의 안위에 대해 걱정했다.
블랑세가 공주의 신분이었고, 능력 있는 백마법사인 데다, 황후로서 업무 역시 부족함 없이 처리하고 있음에도 어떻게든 틈을 찾아내려고 말이다.
한창 이야기를 나누던 자작이 소남작의 방을 흘긋 둘러보며 말했다.
“전에 왔을 땐 그림이 있던 거로 아는데. 어디 갔소?”
“미친 여자한테 물려서 갖다 팔았습니다.”
아리타는 시엘리나가 영지에 찾아와 보상금을 요구했다는 사정은 숨겼다.
파빌이 에카르트의 헛소문을 퍼뜨린 사건을 방조한 바람에, 보상금을 마련하고자 고가의 예술품까지 갖다 판 것이다.
“그러게 창부도 잘 가려 가며 사귀어야죠.”
시스 자작은 아리타 소남작이 어느 평민 여자에게 허튼짓하고 입막음하느라 쓴 돈이라고 착각했다. 그래서 쯧쯧 혀를 차며 말했다.
“아무튼… 황제 폐하는 황태자일 때부터 무른 면이 있었습니다. 아직 전세가 반전될 기회가 있을지 모르지요.”
“하지만 선대 황후까지 폐위한 분입니다. 무르다고만은 할 수 없죠.”
아리타 소남작이 한숨을 쉬며 덧붙였다.
“게다가 루솔릿 공작가와 친분이 있지 않습니까? 크로덴 공작가가 전처럼 권력이 사라졌다 해도, 여전히 그 위상은 무시할 수 없을 정도고요.”
“그래서 손을 놓고 있을 겁니까? 어떻게든 허수아비 황제로 만들어야 한단 말입니다!”
과연 소악마를 소환한 가문답다고 소남작은 생각했다.
시스 자작도 처음부터 이렇게 나갈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매출의 절반을 담당하는 과수원 지대 역시 시엘리나에게 넘겨주었고, 그렇기에 체리베리와 연관된 이야기에는 시엘리나가 빠지지 않고 등장했다.
그런 와중에 교역로까지 뺏기니 속이 말이 아니었다. 그는 품에서 담배를 꺼내 물고는 화를 가라앉힌 후 말했다.
“일단 어떻게 해서든 황제 부부와 가까워져야 합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그들이 정정당당한 방법을 쓸 리 없었다. 상당히 고전적인 방법을 떠올린 자작은 은근한 목소리로 운을 뗐다.
“소남작의 동생, 제법 아리땁더군요.”
“아. 그 아이요. 마침 얼마 전에 유학을 마치고 돌아왔죠.”
아리타 소남작에게는 갓 성인이 된 동생, 칸나가 있었다.
절세미인까지는 아니더라도 무도회장에 가면 제법 많은 관심을 받았다.
“황제 부부의 사랑은 한순간의 감정일 겁니다. 늘 황태자로서 바쁘게 일에 파묻혀 지내다가 그런 미인을 보고 호감을 느꼈겠죠.”
그러니 칸나가 다비온의 취향과 성격을 잘 파악해서 가까워진 후, 가문을 챙겨 준다면 거한 콩고물이 떨어질지 모른다.
“소남작의 여동생, 황제 폐하께 대 보는 게 어떻습니까?”
“좋습니다. 얼굴은 순수하지만 야망이 있는 아이죠. 그렇지 않아도 황태자 시절부터 눈도장을 찍었죠.”
“이번에 황제 폐하의 눈에 들도록 힘써 봅시다.”
그들은 이미 계획이 성사된 것처럼 축배를 들었다.
***
칸나는 새로운 드레스를 입고 치장했지만 기분이 좋지 않았다.
사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마법을 연구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리타 소남작은 칸나를 다른 귀족과 결혼시켜 지참금을 얻기 위한 카드로 사용하려고 했다.
그리하여 마법과 전혀 관련 없는 기숙 학원으로 유학을 보냈는데. 이제는 하다 하다 황실에 시녀로 들어가라니!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빤히 보여 더 답답했다.
와중에 아리타 소남작은 하는 것도 없이 옆에서 이런저런 참견만 잔뜩 늘어놓았다.
“그 칙칙한 장식보다는 저게 더 낫구나.”
“살 좀 빼야겠다. 요즘 귀족들이 얼마나 날씬한데. 쯧.”
“쩝…. 잘 될 수 있을는지.”
결국 참다못한 칸나는 치장이 끝나자마자 뒤도 안 돌아보고 마차에 올랐다.
“앞으로 내 인생에 이래라저래라 하지 마!”
“성격하고는! 다 너 잘되라고 하는 소리야.”
아리타 소남작이 자상하게 마차 문을 닫아 주며 말했다.
“동생아. 황실에 가서 꼭 연락하렴.”
‘어림없는 소리! 유학 갈 때도 마중 나오지도 않던 놈이.’
마차 안에서 칸나는 가족에게 당부받은 일을 떠올려 보았다.
‘다비온 황제 폐하의 눈에 들라고? 차라리 시엘리나 님의 하녀로 보내 줄 것이지. 지금 황실로 가서 어쩌라고.’
그동안 루솔릿 가문은 라멜이 남매간 우애가 깊고 화목한 가정으로 포장했으나, 재판에서 가정환경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시엘리나는 그런 가족과 절연하고 백마법사가 되어 능력을 펼치며 공작 작위를 이었다. 칸나 역시 그렇게 근사하게 살고 싶었다.
‘유부남을 꾀어내라니 대가리에 도끼라도 처박혔는지.’
칸나가 한때 황태자에게 관심을 가졌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가 미혼일 때의 이야기였다.
마부가 황실에 도착했다고 말하자 칸나는 투덜거리며 내렸다. 그래도 못생기고 돈 많은 귀족과 혼인을 하는 것보다는 나으리라고 믿으며.
“칸나 양?”
그 자리에는 중년으로 보이는 여자 한 명이 서 있었다.
“네.”
“황후 폐하의 시녀 페리 남작 부인이네.”
“잘 부탁드립니다.”
깐깐해 보이는 인상의 페리는 궁 안으로 칸나를 안내했다. 칸나는 넓은 홀과 조화롭고도 화려한 장식들을 바라보자 왠지 긴장이 되었다.
“황후 폐하께서는 집무실에 계시니 기다리게.”
“네.”
집무실 안으로 블랑세의 모습이 언뜻 보였다.
성전 개편 요청 승인서. 보육 사업 진행 계약서. 동부 교역로 개발 보고서.
그녀는 제국 내부의 각종 안건을 거침없이 처리했다. 황태자비 시절도 안 거치고 정식적인 교육을 받지 않았는데도 업무 실력에 큰 결함이 없었다.
“황후 폐하가 계셔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오히려 저희가 많은 도움을 받고 있다니까요.”
“게다가 국제 정세에도 밝으셔서 사절단도 감탄했다지요.”
신하들 역시 입을 모아 그녀의 능력을 칭송했다. 황후 자리는 애초부터 그녀의 자리였던 것처럼 이미 적응해 있었다.
결재를 받은 신하들이 나간 후 시녀장이 블랑세에게 상황을 설명했고, 칸나 역시 예의를 차렸다.
“황후 폐하. 오늘부터 폐하를 모실 칸나입니다.”
“…….”
블랑세의 하늘색 눈동자에 칸나는 마치 바다에 빠진 것 같은 아름다움을 느꼈다.
“그래. 남작가의 이야기는 가끔 들었어요.”
하지만 블랑세는 그것이 어떤 종류인지 말하지 않았다.
좋은 이야기라면 무엇인지 말했을 거라는 생각에 괜히 칸나는 첫 대면부터 눈치를 보게 되었다.
‘일부러 떠보는 건가.’
그래서 칸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애써 미소 지었다.
“영광입니다.”
인사를 마친 후 페리는 칸나에게 말했다.
“황후 폐하의 일과를 먼저 숙지하도록.”
블랑세는 일간 보고와 정기 회의는 황제와 함께 진행하고, 대부분의 식사를 함께하며 업무를 마치면 침실에서 휴식을 취한다.
종종 이동 마법 재료를 사용해 잠행에 나서 직접 제국을 둘러볼 때도 있다. 시엘리나를 보기 위해 루솔릿 공작령으로 갈 때도 많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황족이 사용하는 별채는 여러 개 있지만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부부는 같은 궁을 사용한다.
중문 양옆으로 두 개의 문이 나 있는데 집무실, 응접실, 드레스룸 등으로 독립되었으나 구조는 같다.
페리는 황후의 방에서 따로 주의할 점을 말했다.
“저쪽은 연구실이니 들어가면 안 되네.”
“네.”
“협탁 위에 있는 초상화는 만지지 말고.”
“알겠습니다.”
초상화의 주인 얼굴을 알아볼 수 있었다. 시엘리나 루솔릿이었다. 최근에 그렸는지 물감 색도 선명하고 아름다웠다.
며칠간 황후궁의 구조를 숙지하고 칸나는 다른 시녀들과 함께 일하게 되었다. 그들은 아렌다가 황후로 있을 때부터 있었다.
칸나는 왜 이전 세대를 교체하지 않는지 의아했다.
‘기존의 세력도 포용하시는 건가?’
만약 그렇다면 정치적인 의도를 담고 있지 않더라도 여러모로 대단한 결정이었다. 그런 생각을 할 때 시녀 중 한 명이 날카롭게 말했다.
“이제 화단 청소해. 이거로 울타리를 닦아.”
시녀가 커다란 걸레를 집어 던지고는 낄낄거리며 웃었다. 칸나는 걸레를 흘긋 보고는 줍지 않았다.
“황후 폐하가 지나치실 곳을 닦는데 떨어진 물건을 사용할 수 없죠.”
“뭐?”
“다른 것을 사용할게요.”
칸나는 괴롭힘에 굴하지 않고 그대로 다른 걸레를 새로 가져갔다.
혼자 울타리를 닦으며 칸나는 짐을 싸고 싶었다. 적성에도 맞지 않고 이미 있던 시녀들이 텃세까지 부리는 와중에 무엇보다….
‘애초부터 황제 폐하께 접근하는 건 말도 안 되는 계획이었어.’
그런 생각을 하다 부주의하게 돌출된 울타리에 손을 찔리고 말았다. 낮게 신음을 내뱉던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다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