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그래. …공작님까지 모셔왔구나.”
“저도 부르신 게 아니었어요?”
“그것이.”
다비온은 내 옆을 흘금 보았다.
그러자 에카르트가 손으로 뭔가를 부러뜨리는 수신호를 보냈다.
아침부터 황실로 같이 가자고 하기에 나도 관련된 일인 줄 알았건만, 그냥 떨어져 있기 싫어서 나까지 데려온 모양이다.
“루솔릿 공작도 함께 들으시죠.”
“아아, 네.”
나는 추궁은 뒤로하고 이야기를 먼저 듣기로 했다.
“에카르트. 선대 황후의 방에서 찾은 문서야.”
다비온이 복잡한 도면이 그려진 종이 한 장을 테이블 위로 건넸다. 에카르트는 곧바로 알아보고는 내게 말했다.
“제가 어렸을 때 살던 집입니다.”
“아.”
외부는 물론 저택 내부 구조까지 상세히 나와 있었다. 다비온은 다른 종이 한 장을 더 내밀었다.
“그리고 웨이드 후작의 횡령이 드러난 보고서입니다. 다만 외부에 공개된 적 없었죠.”
황후는 후작의 횡령을 침묵했고 후작은 선대 공작 부부를 살해했다. 둘 사이에 어떤 연결 고리가 있으리라는 추측은 합당했다.
“에카르트. 15년도 더 지난 이야기지만… 다시 선대 공작성에 가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다비온이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고 에카르트는 침묵으로 동의했다.
“루솔릿 공작, 함께 가 주세요. 제가 가 본 곳이니 이동 마법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기꺼이요.”
빗방울이 톡톡 떨어지기 시작했다. 한때 화려한 공작 저였을 이곳은 오직 기둥만 남은 폐허가 되었다. 에카르트트는 담담하게 그 골조들을 바라보았다.
“미랑. 마법진이 있는지 찾아봐요.”
“알았다!”
밟기만 해도 부서지거나 아예 진입하지 못할 것 같아서 미랑을 소환했다. 그러자 그는 수색견처럼 킁킁거리며 조심히 저택 터를 돌아다녔다.
“이리로 오거라!”
그 자리에는 마력의 흔적이 옅게 남아 있었다. 나는 그 주문의 일부를 알아내, 곧바로 원래의 공식을 해석해 냈다.
“…폭렬 마법이네요.”
“저쪽에 또 있도다.”
“폭렬 마법을 강화하는 보조 마법이에요.”
그것을 알아내자 또 다른 기억 하나가 발동했다. 다비온이 서둘러 영상석을 꺼내 녹화했다.
그때 후작 부부가 방화를 저지르고는 우물쭈물했다.
그러나 그들의 뒤에는 한 명이 더 서 있었다. 저택이 불이 타자 그 사람의 얼굴에도 빛이 들어왔다.
‘아렌다!’
엑스트라 후작 가문은 황후의 사주로 온 것이다.
하지만 기억 마법은 끝나지 않았다. 아니, 이건 아렌다의 기억이 아니라… 선대 공작 부부의 기억이었다. 에카르트의 아버지가 말했다.
“아이만은 살리고 싶어. 나는… 여기 남아서 보호 마법을 걸게.”
“혼자서 할 수 없을 거야. 같이 남을게.”
그리고 부모님은 끝까지 에카르트를 보호했다.
기억은 그게 전부였지만 우리는 말을 잃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어느새 다비온의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에카르트. 미안해.”
“네 어머니는….”
에카르트의 붉은색 두 눈동자는 분노로 끓었다. 그 뒤에 무슨 욕설이 이어지든 다비온은 할 말이 없었다.
그는 한동안 넋이 나가서 영상석을 끌 생각도 하지 못했다.
“엘린, 갑시다.”
“네.”
나는 다비온에게 가볍게 눈인사만 하고서 에카르트의 손을 잡아 주었다. 그리고 미랑을 타고 우리의 집 앞에 도착했다.
“다녀오셨습니까.”
“어서 오세요, 주인님. 공작님!”
헬라와 니나는 에카르트의 표정을 보고는 황실에서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있었음을 깨달았다.
“시중은 됐어요. 잠시 둘이 있을게요.”
“네.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말씀하세요.”
니나가 예의를 차렸지만 걱정스러운 목소리였다.
우리는 아무 말 없이 계단을 올라 내 방으로 왔다.
아까보다는 조금은 차분해진 에카르트를 소파에 앉혔다. 그 후 차를 따라 주기 위해 협탁으로 향하려 할 때. 그가 내 손을 붙잡기에 나는 순순히 옆에 앉았다.
에카르트가 침묵 끝에 말했다.
“안아 주십시오.”
“그럼요.”
나는 그를 껴안고 충분한 시간이 지난 후 말해 주기를 기다렸다.
“그놈이 다르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거기 계속 있다간 그놈에게 화풀이를 할 것 같았어요.”
품속에서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더니 그가 나를 천천히 쓰다듬으며 말했다.
“당신을 만나지 않았다면… 뭐하러 나 같은 놈을 살리기 위해 부모님이 희생했는지 몰랐을 겁니다.”
“…….”
속상해하는 목소리를 들으니 내 마음이 아팠고 결국 눈물이 떨어졌다.
가장 가까운 친구의 어머니가 자신의 부모를 살해했으며, 강하던 부모가 자신을 살리기 위해 희생했다는 이야기를 에카르트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싶었다.
“왜 우십니까?”
“원하지 않은 일을 겪었던 당신을 생각하니 속상해서요.”
“엘린, 엘린.”
에카르트의 부드러운 입술이 눈가에 닿았다.
“앞으로는 원하는 대로 살아갈 겁니다. 거짓된 무대에 놀아나지 않고, 당신과 사랑하면서요.”
“네.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행복하게 살아요, 우리. 그래도 괜찮아요.”
에카르트가 나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우리는 새끼손가락을 걸고 서로 약속했다.
***
에카르트가 선대 공작 부부에 대한 전말을 알게 된 후.
사실 아렌다가 미칠 듯이 미웠다.
만약에 시엘리나가 아니었다면 이 세상을 어떻게 바라봤을까?
선조가 만든 균열 때문에 허비한 것들.
그리고 후세를 지키기 위해 잘못된 계약까지 했는데도 결국 일찍이 죽은 부모를.
에카르트는 아렌다를 용서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분노에 잠식당해서 앞으로의 미래를, 행복해질 시간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그의 곁에는 시엘리나가 있다. 올곧고 강하며 사랑스러운 그녀의 손을 잡고 새로운 길을 걸어갈 것이다.
***
황실로 돌아온 후 다비온은 한참을 생각했다.
하지만 혼자는 아니었다. 그의 곁에는 어느새 블랑세가 다가와 있었다. 블랑세는 다비온이 먼저 사정을 말해 줄 때까지 기다렸다.
“블랑세.”
“다녀오셨어요.”
“네. 어머니가… 너무 끔찍합니다. 에카르트는 괜찮을까요.”
“크로덴 공작님 곁에는 시엘이 있잖아요. 그분이 사랑하는 유일무이한 사람.”
어쩌면 에카르트와 다비온의 거리가 멀어질지도 모르지만, 그것이 다비온이 원망스러워서는 아닐 것이다.
그러니 다비온은 자책할 필요 없었다.
“폐하는 괜찮으신가요?”
“에카르트가 그렇게 힘든 일을 겪었는데 내 감정이 중요할까요.”
“그래도 폐하는 스스로를 돌봐야 해요. 그래야 제국도 보살필 수 있고요.”
다비온은 조곤조곤하고 차분한 목소리에서 안정감을 느꼈다. 그녀의 말이 오랜 기도 끝에 응답받은 신의 음성처럼 느껴져서 솔직해질 수밖에 없었다.
“블랑세. 제게도 어쩌면 그런 본성이 남아 있을까 봐 걱정됩니다.”
“달라요. 당신은 크로덴 공작님을 위해 행동했으니까요.”
블랑세가 딱 잘라 말했다.
“허나 만약… 내가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면 말해 주세요.”
“그럴게요.”
도의와 이치를 좇으면 악인들의 표적이 되기가 쉬었다. 하지만 그런 성품은 악인뿐만 아니라 선인도 끌어당길 거라고 믿는 블랑세였다.
‘나 역시 당신의 그런 점에 이끌렸으니까.’
부드러운 손이 젖은 눈가를 천천히 훔쳤다. 해결된 건 아무것도 없었고 명확한 답이 존재하는 일도 아니었으나 다비온은 마음을 다잡으려 노력했다.
다비온과 에카르트는 조금 더 마음을 추스른 후 만났다.
선대 황후가 폐위 중이고 아직 어떻게 처벌할지는 결정하지 않은 상황.
황제 독살 시도와 불법 실험 자행.
제국법에 의거해 중형에 처하면 민심이 괜찮을지. 그리고 다비온 자신은 가끔씩 이 판단을 후회할 수도 있을 거라 생각하면 마음이 복잡해 왔다.
하지만 선대 공작 부부를 살해한 이상, 아렌다는 꼭 죗값을 치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했다. 다비온에게는 더 큰 도리가 있었다.
“내 어머니를 처벌하겠어.”
“선대 황후의 가장 큰 죄목이 뭐라고 생각하지?”
“법률상으로는 황제를 시해하려 했던 것. 그러나… 네 부모님께 결코 인간이 해서는 안 될 짓을 했지. 나는… 무슨 짓을 해도 그때 네가 느꼈을 괴로움의 죗값을 치를 수는 없어. 정말 미안해.”
“그만.”
에카르트가 딱 잘라 말했다.
그녀가 부모님을 살해했던 방식과 똑같이 죽이고 싶었다. 그러나 그렇게 단순한 결말은 안 되었다. 아렌다는 살아서 평생 죗값을 치르고 망자가 된 후에도 그러하리라.
“영구 추방해. 추방된 곳 외에는 어디로도 나갈 수 없도록.”
그렇게 단지 목숨만 붙여 두는 정도로 결정했다.
아렌다를 실각시키고 처벌을 결정하는 회의는 무거운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 다비온과 에카르트의 뜻을 감히 거스를 세력은 없었다.
그들의 뜻대로 황후는 척박하고 무인도로 추방당했다.
아렌다의 처분이 결정이 나자 황제 역시 그에 따르기로 했다. 그들이 쌓아 오고 누려 온 모든 것들을 두고 지도에도 나와 있지 않은 머나먼 곳으로.
다비온은 항구에서 죄수들의 이송 과정을 직접 지켜봤다.
“어머니, 아버지. 부디 건강하시길. 하지만… 행복해서는 안 됩니다.”
저 배에는 지금 멀어진다면 다시는 만나지 못할 유일한 가족이 타고 있었다. 다비온은 차라리 거대한 파도가 자신을 덮쳐 줬으면 하는 바람도 들었다.
‘나는 다비온 윈터로드. 윈터로드 제국의 황제.’
강해져야 한다. 다비온은 더 이상 아무것도 곱씹지 않기로 했다. 모든 게 담담해진 먼 훗날 다시 생각할 것이다.
***
무인도에 도착한 아렌다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람이 살지 못하는 곳을 꼽자면 이런 장소일까. 해역은 파도가 높이 치고 몇 안 되는 초목은 수분기 하나 없이 메말랐다. 땡볕 아래에 그늘이라곤 없었다. 먹을 게 있는지도 의문이었다.
씁쓸하게 웃던 그때. 황실 기사들은 다른 한 명을 더 내려 주고 배를 출발시켰다.
“왜 당신까지!”
“…아렌다.”
그녀의 남편이자 제국의 아버지였던 그리고 다비온의 아버지인 선황제.
“당신을 황실로 데려온 데에 대한 책임을 지려고 해.”
사랑했을까. 사랑했던가. 아렌다에겐 그게 너무 먼 일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그들은 최후를 잘 알았다. 격동으로 가득하던 삶은 이제 작은 불씨가 꺼지듯 스르르 사라질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