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어떤 귀족이 휴양지로 만들려다가 예산 부족으로 인해 결국 경매에 도로 내놓은 땅이었다.
그곳을 사랑스러운 연인이 좋아하는 것으로 가득한 왕국으로 만들 생각이었다. 물론 주민은 시엘리나와 에카르트뿐이었다.
에카르트는 품에서 상자 하나를 꺼냈다. 그 안에는 반지가 있었다.
요즘 유행하는 방식으로 꽃 모양의 틀에 보석을 채워 놓고 필요에 따라 부부가 동시에 간결한 디자인으로 바꿀 수 있는… 결혼 반지였다.
그랬다. 에카르트는 헬라에게 프로포즈 조언을 구해 일단 결혼반지 하나를 만들어 두었다. 운명적으로도 시엘리나가 준비하는 것과 똑같은 디자인이었다.
‘어서 드려야겠군.’
에카르트에게 조바심이 생긴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요즘에 부쩍 시엘리나와 니나의 사이가 의심스러웠다. 서로 안 하던 행동을 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녀가 블랑세의 빈자리를 그리워하다가 위로를 받는 과정에서 마음을 열었을지도 모른다.
“블랑세가 떠나서 슬퍼.”
“주인님.”
그 음흉한 하녀는 충성심을 가장한 척 시엘리나를 유혹하며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저라도 괜찮으시면… 빈자리를 채워 드릴게요!”
에카르트의 머릿속에는 한 편의 막장드라마가 펼쳐지고야 말았다.
그렇게 한번 의심하고 보니 왠지 블랑세와 니나가 닮은 것도 같았다.
사실 다른 사람이 보기에 머리색과 눈 색은 물론 이목구비도 달랐다. 블랑세는 순수한 인상에 예쁘고 니나는 발랄하고 귀여운 이미지였지만….
에카르트의 눈에는 시엘리나를 제외한 여자는 아니, 사람은 다 비슷비슷해 보였다.
‘당장 목욕과 침실 시중부터 금지시켜야겠다!’
그렇게 결심한 에카르트는 곧장 시엘리나의 방으로 향했지만, 방은 청소하는 하녀 두 명을 빼고는 비어 있었다.
“엘린은?”
“나가셨습니다.”
“그 여자를 데리고?”
“니나 님… 말씀이시지요? 그렇습니다!”
“젠장!”
에카르트는 그대로 창문을 열고 낙법을 사용해 뛰어내렸다. 어린 하녀 둘은 깜짝 놀랐지만 상대가 크로덴 공작임을 상기하고 안심했다.
그렇게 마검의 지배자는 연인을 찾기 위해 전속력으로 질주했다.
***
제련한 블랙 다이아몬드는 마법으로 제 위치를 찾아갔다. 반지는 색색의 보석이 조화롭게 어울리면서도 또 제각각 다른 의미를 갖고 있었기에 무척 마음에 들었다.
“제가 본 반지 중에서 제일 아름다워요.”
니나의 말이 호들갑처럼 들리지 않았다. 나는 완성한 반지를 뿌듯하게 바라보고 상자 안에 소중히 챙겨 품에 넣었다.
“이제 다른 하나 역시 같은 방식으로 만들어야겠어요. 그전에….”
“그전에?”
“프로포즈 장소를 찾아보고 싶어요. 공작성 주변을 둘러봐야겠어요.”
그리하여 니나와 함께 방을 나와 산책을 시작했다.
정원은 가제보에 조명까지 니나가 센스 좋게 배치했다. 게다가 연못은 정화석을 깔아 둬서 물이 맑았다.
“니나. 여기서 고백하면 어떨 것 같아요?”
“완벽하죠. 제가 제국에서 유행하는 프로포즈 장소도 다 알아봤는데 여기가 가장 아름답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지금도 좋지만 특별한 파티 장식을 몇 가지 더 추가해도 되고요!”
“특별한 파티 장식이라면 땅문서 같은 것을 달아 놓는다거나?”
“그것도 정말 근사해요!”
점점 구체적으로 생각할수록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
“니나. 너무 떨려요.”
“아악! 정말 사랑스러우시네요.”
“프로포즈 연습을 도와줄 수 있나요?”
“그럼요!”
나는 품에서 작은 반지 상자를 꺼냈다.
“니나. 손 내밀어 주세요.”
하얀 가제보 아래. 나는 내 손에 낀 장식용 반지를 빼서 니나의 손에 가까이 가져다 댔다.
“주인님, 이건 안 돼요! 크로덴 공작님이 알게 되시면 제 손가락을 자르실 거예요!”
“다른 반지고 끼우는 시늉만 할 건데도요?”
나 역시 누군가 끼웠던 반지를 끼워 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도 니나가 목숨의 위협을 느끼는 건지 우물쭈물하던 그때.
“뭐하십니까?”
에카르트가 이 모습을 보고 있었다. 나는 재빨리 주먹을 쥐고 반지를 도로 내 손에 꼈다.
“저 여자를 사랑합니까? 저와 결혼을 미루던 이유가 있었군요.”
“에카르트?”
이게 무슨 오해인가 싶어서 머리가 띵해졌다.
“엘린. 당신은 저와 결혼해야 합니다.”
“그거… 제가 할 말이었는데요.”
“저 하녀에게 하려고 하셨겠지요. 생각해 보면 크로덴 공작성에 오셨을 때부터 당신 시중은 전부 제가 들었어야 했습니다.”
에카르트가 이 정원을 활활 불태울 기세로 거침없이 말했다.
“에카르트! 그게 아니라 연습 중이었어요!”
“연습?”
나는 품속에서 이제 막 완성한 프로포즈 반지 아니, 결혼반지를 보여 줬다.
“당신에게 어떻게 더 멋지게 고백할 수 있을지 연습했어요. 그런데 이미 들켜서….”
“엘린.”
“네. 프로포즈 반지. 당신에게 끼워 주려는데… 너무 중요한 일이라, 너무 떨려서.”
내가 머릿속으로 준비했던 말도 다 새하얘졌다. 나는 그의 눈동자를 바라봤다. 놀란 것 같은 표정이 곧 즐거움으로 바뀌었다.
“결혼합시다. 평생… 행복하게 해 줄게요. 우리가 꿈꾸는 부부의 모습대로 살아갑시다.”
그 후 어떻게 반지를 건네줬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어느새 나와 그의 손에 반지가 하나씩 끼워져 있었다.
“저도 같은 걸 하나 만들었습니다.”
“정말 예뻐요. …에카르트 같네요.”
“저는 당신만의 것입니다.”
“저도요.”
생각했던 프로포즈와 달라졌지만 어쨌든 더 기뻤다. 에카르트 역시 나를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니나 역시 진심으로 축하한다고 말했다.
“엘린. 보여 드리고 싶은 게 있군요.”
에카르트는 내 손을 잡고 어떤 마법을 그렸다.
“이동 마법?”
“네. 저도 배웠습니다.”
시엘리나는 항상 에카르트를 사랑했으나, 그는 그래도 불안함이 남았기에 그녀를 믿으면서도 믿지 못하였다.
에카르트는 깨달았다. 자신이 그녀에게 강제할 수 있는 건 없었고 그래서도 안 된다는 것을. 그렇다 한들 행복했다.
반지를 주고받으며 시엘리나가 자신을 얼마나 생각하는지 전부 알았기에. 돌이켜 봐도 그녀가 알려 준 것들은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을 만큼 귀했고 평생을 곱씹어도 너무나도 많았다.
아름다운 섬이었다. 금색과 은색의 꽃이 환히 피어나자 마치 하늘의 별을 따서 깔아 놓은 것 같았다.
성 한 채가 있었고 그 안은… 에카르트가 나를 그린 그림들로 가득했다. 시간 순으로 걸었는지 점점 걸을수록 발전한 모습이 보였다.
“이곳을 당신의 취향으로 가득하게 하고 싶었는데. 어느새 제가 좋아하는 것들도 채워 놓게 되더군요.”
“저도 당신을 그려 봐야겠어요.”
“정말입니까?”
“네. 대신 실력은 장담 못 해요.”
기뻐하는 그를 보니 몽글몽글한 감정이 피어올랐다. 그리고 그가 왜 뜬금없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지 추측해 보면 더 그랬다.
“엘린. 이 섬과 성까지 전부 결혼 선물입니다. 당장 오늘이라도 혼례를 올립시다.”
“오늘은 안 돼요.”
“그럼 언제가 좋습니까? 내일?”
억지를 부리는 게 싫지 않았다. 에카르트는 내가 한 뼘이라도 멀어지지 못하게 나를 더 끌어안았다. 기분 좋은 압박감이 느껴졌다.
“사실… 저는 호감을 확인하기 전부터 교제를 꿈꾸고 결혼하기를 바랐습니다.”
“결혼하면요?”
“당신과 평생 함께하는 삶을 꿈꾸고 그것을 현실로 만들어 가겠죠. 꿈꾼다니, 말하고도 낯설게 느껴집니다. 제가 사람을 믿고 의지하며 간절히 바라게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나는 그의 행복한 감정에 스며들어 갔다.
이렇게 외딴곳에 와 있으니 세상에 오직 우리 둘만 남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에카르트와 함께라면 어디든 괜찮을 것 같았다.
“세상이 넓어진다는 말은 전부 당신이 가르쳐 줬습니다.”
에카르트의 벅찬 마음이 내게도 전해진다.
“제가 태어나길 잘했습니다. 엘린에게 사랑받을 것을 알았다면 지난날들이 덜 괴로웠을 겁니다. 당신을 알게 된 후로 세상이 아름답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에카르트는 세상 누구보다도 어떤 것보다도 아름다웠다. 넓은 들판에 활짝 핀 꽃들의 주인 같았다.
“저도 에카르트를 알아서 행복해요. 함께 지내며 나 역시 많은 감정을 알게 되었고요. 더 이상 도망치지 않고 내 땅에서 내 사람과 살아갈 거예요.”
이것이 내가 선택한 자유로운 삶이었다.
우리는 밤새 무인도를 걸으며 서로가 서로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속삭였다.
***
선대 황제 부부의 흔적을 정리하는 데에는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걸렸다. 다비온은 황후궁의 서재로 향했다.
서재 책장을 밀면 황족의 마력으로 작동하는 금고가 있었다.
다비온은 그것을 열어 보기로 했다. 비밀번호는 당연하게도 그의 생일이었다. 그러자 문서 하나가 나왔다.
이런 금고에 보관할 정도였다면 틀림없이 중요한 것이리라. 서둘러 넘겨보려 하니 잠금 마법이 걸려 있었다.
“다비온?”
마법을 풀기 위해 서재 구석에서 끙끙거리고 있었는데 은발의 머리카락이 드리워졌다. 블랑세가 다가와 다비온의 어깨를 잡고 함께 문서를 바라봤다.
“오른쪽 세 번째 기호를 먼저 해제하면 돼요.”
“아.”
그녀의 말대로 하니 정말로 마법이 풀렸다. 다비온이 감사 인사를 표하기도 전, 블랑세가 조금은 토라진 듯이 말했다.
“처음부터 도와달라고 하면 될 것을요. 이제 부부잖아요?”
“부부….”
다비온은 행복해서 미소가 나왔다. 문서를 넘겨보니… 이전에 웨이드 후작 부부가 세금을 빼돌린 정황이 나왔다.
‘어디에도 공개되지 않은 내용이었는데.’
다비온은 더 알아볼 필요성을 느끼고 다음 문서를 넘겨보았다. 그러다 색이 다른 종이 한 장을 발견했다.
‘이건.’
커다란 저택 도면이었다. 그것을 알아본 다비온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는 앞으로의 일을 예감한 것처럼 한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고 한숨을 쉬었다.
***
나는 에카르트와 함께 황실로 왔다.
황태자궁 역시 화려했지만 황제궁은 두 배도 넘는 호위 기사가 근무했고 더욱 근사했다.
접견실 천장에 화려한 샹들리에가 달리고 양옆에 같은 테마의 예술 전시품이 놓여 있었다.
“엘린, 저기 한번 앉아 보고 싶지 않습니까?”
에카르트가 가리킨 건 다비온의 푹신해 보이는 의자였다.
“괜찮아요. 우리 둘이 같이 앉을 수 있는 이 자리가 좋아요.”
“이런. 당신이 제 무릎 위에 앉으면 됩니다.”
우리는 앞에 다비온이 있는 것도 잊을 정도로 알콩달콩한 대화를 나눴다. 내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춘 에카르트가 다비온에게 말했다.
“사람을 오라 가라 그리한 데에는 이유가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