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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물 조연은 도망치고 싶다-110화 (110/115)

#110화

나는 너무 노출이 심하지 않은 디자인을 둘러보다가 적당한 하나를 가리켰다.

“치수는 이전에 잰 것과 달라지지 않았으니 이거로 사 오세요.”

“네! 후훗. 후후훗.”

니나가 이상한 소리를 내며 얼굴을 붉혔기에 나는 한 번 더 건전한 의도를 강조했다.

“어디까지나! 편의를 위해 상, 하의가 분리되고 가벼운 디자인을 고른 거예요.”

“그럼, 그럼요.”

니나는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어설픈 윙크마저 했다.

***

니나는 수영복을 주문하고 돌아왔고 나는 업무를 마무리할 때쯤 그림을 미리 연습해 보기로 했다.

마법진을 잘 완성하는 것과 글씨를 예쁘게 쓰고 그림을 멋지게 그리는 건 별개였다.

애초에 나는 예술과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나는 서류를 결재하다가 낙서 하나를 끄적끄적 그렸다.

그리고 창틀을 닦던 니나에게 보여 줬다.

“니나. 이거 뭐처럼 보여요?”

“고양이?”

“강아지에요.”

“강아지가… 수염이!”

“제가 본 강아지는 있었어요.”

“귀엽…네요?”

니나는 평소처럼 호들갑 떠는 대신 애매모호하게 말끝을 흐렸다. 나는 아예 이젤 위에 캔버스를 올리고 그림 몇 가지를 그려 보려다가 한숨을 쉬었다.

“취미로 시작하고 싶다고는 했는데 너무 못하는 것 같아요. 다른 거 하는 게 낫겠어요.”

“공작님. 어떻게 사람이 다 잘할 수 있겠어요! 그리고 나름대로 매력 있어요.”

“하아. 에카르트는 그림도 잘 그리겠죠? 제가 다 잘하는 줄 아는 사람인데.”

내가 고민하자 니나는 자신의 가슴가에 손을 척 얹고 말했다.

“그럼 저를 상대로 연습해 보세요!”

“니나를 상대로요?”

“네. 인체 연구가 필요하다면… 옷을 벗은 저의 모습을 참고하시고요!”

누드 모델을 하겠단 말인가!

지나치게 과한 충성심에 경악해 입을 떡 벌렸다. 그때 문이 부서질 듯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니나 역시 옷을 벗으려다가 화들짝 놀라 책상과 부딪쳤다. 나는 넘어지는 그녀를 붙잡기 위해 일어나 손을 뻗다가 함께 책상 아래로 엎어졌다.

“악!”

“앗!”

드레스 자락이 흐트러진 하필 그 순간에 문이 열렸다.

“엘린. 괜찮습니까?”

“아, 네. 그냥 넘어졌을 뿐이에요.”

나는 간신히 책상 위로 얼굴을 들었다. 상황을 설명해도 에카르트의 표정은 살벌했다. 니나는 겁을 먹고 내 밑에서 빠져나와 냉큼 일어섰다.

“죄, 죄송합니다?”

“당장 나가.”

“힉!”

그녀는 내 눈치를 보다가 가도 된다는 신호로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후다닥 나갔다. 에카르트가 이젤을 주워서 주변을 대충 정리하고는 물었다.

“뭐하고 계셨습니까?”

“그림을 연습하려고 했어요.”

“저와 함께하신다더니.”

“…제가 너무 못하면 좀 민망하니까.”

그러자 에카르트는 따뜻하게 미소 지으며 웃었다.

“당신이 그렸는데 못할 리가요. 그저 특징이 다른 겁니다.”

“하하. 고마워요.”

“한데 슬슬 주무실 때 아닙니까?”

“음. 그러네요. 잘 준비도 마쳤고.”

“그렇다면 오늘 밤 시중은 제가 들겠습니다.”

에카르트가 나를 번쩍 들어 안고는 방으로 데려가더니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덮어 주었다.

그리고 커다란 손으로 내 머리카락을 다정히 사랑스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제가 아는 동화도 들려드리지요.”

“동화요? 좋아요.”

나는 그가 어떤 동화를 들려줄지 기대했다. 에카르트가 마성의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옛날, 옛날. 사랑스러운 영주님이 살았답니다. 영주는 능력 있고 따뜻하며 강인했어요. 그래서 친구, 집사, 하녀의 애정을 모두 받았지요.”

“영주가 여자인가요?”

“그렇습니다.”

그는 다정하게 미소 짓고는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분을 가장 사랑한 건 젊고, 돈 많고, 잘생기고, 몸 좋은 남자 공작이었답니다.”

“……?”

동화에 그런 묘사가 들어가도 되는 건가.

“어느 날 감히 주제넘게도… 말 많은 하녀가 주인을 마음에 품었어요. 술고래 집사와 땅딸보 친구도 마찬가지였지요.”

“아니.”

“그런 위기를 알아챈 남자 공작은 흑마를 타고 영주성으로 왔답니다. 공작은 음험하고 사악한 무리를 퇴치하고 영주님과 함께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지요.”

“정말 그런 동화가 있다고요?”

보통 동화의 결말은 화목하게 살아갈 텐데.

“그럼요.”

“작가가 누군데요?”

“…에칼트.”

“에카르트?”

“에칼트. 엄연히 다른 사람입니다. 어쨌든 이제 주무실 수 있겠지요?”

“글쎄요.”

“이런. 그렇다면 악몽을 꾸지 않도록 제가 함께 있어야겠군요.”

경고인지 동화인지 모를 이야기를 들려주고는 에카르트가 내 손을 잡고 입을 맞췄다.

그러고는 마치 협탁 옆의 푹신한 의자가 자신의 자리인 듯 그곳에 앉아 나를 내려다보았다.

***

에카르트는 시엘리나가 잠든 사이 황실로 전서구를 보냈다. 새벽이었지만 다비온은 친구를 위해 친히 공작령까지 와 주었다.

“무슨 일이야?”

에카르트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좌절한 모습은 처음이었기에 다비온은 걱정스러웠다.

‘무슨 고민이기에 시엘리나 님도 안 부르고….’

하지만 그는 윈터로드 제국의 황제. 이제는 루솔릿 공작과 크로덴 공작을 도울 위치와 능력이 되었다.

“에카르트. 고민이 있다면 황제의 이름을 걸고 무슨 일이든 돕겠다고 약속하지. 부디 믿고 말해 줘.”

그러자 에카르트는 몹시 짜증나는 눈빛으로 물어보았다.

“결혼하니까 좋냐?”

“…결혼. 뭐?”

“좋겠지.”

에카르트는 본인보다 늦게 교제를 시작했으면서 먼저 결혼해 버린 다비온이 못마땅했다.

“미안…하다?”

착한 황제는 일단 사과했다. 물론 블랑세와 정말 혼인했다는 사실이 떠올라 에카르트의 횡포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뻐렁치는 기분이 들었다.

“어쨌든 무슨 일인데?”

“나의 사랑이 내 제안은 거절하고서 다른 여자에게 적극적이시더군.”

“블랑세?!”

“아니다.”

“다행이야. 아니. 조금 구체적으로 말해 봐.”

“수영복은 거절하고서 하녀를 끌어안고 계셨다.”

더더욱 상황이 그려지지 않았기에 다비온은 그저 시엘리나에 대한 연민이 들었다.

“에카르트. 시엘리나 님을 괴롭히지 마.”

“쯧. 도움 안 되는 놈.”

에카르트는 중얼거리며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썩 나가. 아니지. 엘린이 깨지 않도록 조용히 나가.”

“그래, 그래.”

별거 아닌 일로 불렀지만, 다비온은 개의치 않고 블랑세가 있는 황궁으로 조용히 돌아갔다.

***

에카르트의 불안 증세가 다시 심해지기 전에. 나는 어서 프로포즈 준비를 마치기로 했다. 그는 니나와 나 사이의 비밀을 파헤치려고 하고 있으니 말이다.

“아침 시중을 들겠습니다.”

“점심 시중도 제게 맡기면 됩니다.”

“저녁이군요. 늦었으니 밤 시중까지 해도 되겠지요.”

다음 날. 이런 와중에 간신히 니나가 틈을 내서 와 주었다.

“주인님. 수도 제련소에서 블랙 다이아몬드 원석을 구했다는데요. 편하실 때 언제든 오시길 바란대요.”

“그래요? 그럼 오늘 가 볼게요.”

나는 에카르트와 함께 식사하며 말했다.

“에카르트. 마법 재료를 사 와야 해서 수도에 다녀와야 할 것 같아요.”

“좋습니다. 저는 이대로 외출하면 됩니다.”

“아. 저 혼자 다녀오려고요. 영지에서 기다리고 있어 주세요.”

“그렇다면 기사들을 데리고 가시지요.”

“괜찮아요. 그럼 먼저 일어나 볼게요. 금방 올 테니 기다리고 있어요.”

내가 테이블에서 일어났을 때 그의 머리 위로 먹구름이 떠 있는 것 같았다.

외출 준비를 마치고 니나, 헬라와 함께 나왔더니 이클립스 기사단이 연무장이 아닌 정원에서 기합을 받고 있었다.

기사들은 엎드려뻗쳐를 하거나 모래주머니를 끌고 저 멀리 훈련장까지 달렸다.

그리고 에카르트는 팔짱을 끼고 그들을 감독했다.

“무슨 일이세요? 지금은 훈련 시간도 아닌데.”

“당신이 호위 기사는 아무도 안 데려간다기에. 오죽 못 미더우면 그러시나 싶어 교육 중이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다른 사람을 인질로 잡으시겠다!

“에카르트. 자꾸 이러면 <좋은 상사가 되는 법> 열 번 필사하게 할 거예요.”

내가 따끔하게 훈수를 놓자 에카르트가 솔직히 인정했다.

“엘린. 당신이 저를 떼어 놓으려는 것 같아서 섭섭합니다.”

하긴 요즘 그가 들어올 때마다 보석 카탈로그를 급히 숨기거나 니나와 어색하게 있었으니 말이다.

섭섭하게까지 할 생각은 아니었기에 미안해졌다. 에카르트가 상처받으면 이벤트의 의미가 없었다.

“미안해요. 솔직히 말해 줘서 고맙고요. 그럼 같이 가요!”

“알겠습니다.”

에카르트가 히죽 웃으며 기사단을 해산시켰다. 나는 가여운 기사들에게 다음 휴가를 이틀 더 줘야겠다고 다짐했다.

제련소 안에는 도난을 방지하는 영상석이 작동했고 진열대에 형형색색의 원석이 놓여 있었다.

“루솔릿 공작님, 어서 오십시오.”

콧수염을 기른 노년의 제련사가 격식 있게 인사했다. 그러더니 에카르트에게도 말했다.

“크로덴 공작님, 또 와 주셨군요. 다시 뵙게 되어 기쁩니다.”

에카르트가 온 적 있었나?

블랙 다이아몬드는 보석 중에서도 가장 희귀하고도 값비쌌기에 따로 프라이빗한 방으로 안내받았다.

“블랙 다이아몬드 원석입니다. 이런 등급은 천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하죠.”

하지만 교역로를 설계한 루솔릿 공작, 체리베리 과수원의 소유주, 마정석이 가득한 땅의 주인인 내게 가격은 상관없었다.

헬라가 함께 감정을 마쳤다. 나는 쿨하게 금화로 결제하고 헬라에게 다이아몬드를 챙기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에카르트와 함께 마차에 탔다. 그는 보석상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말했다.

“한데 엘린. 무슨 마법을 준비하실 겁니까?”

“영지 발전을 위해서는 계속 마법을 연구해야죠! 통신석을 만들 재료도 다양하게 알아보고 말이에요.”

내가 이것저것 부연 설명을 하자 그는 결심한 듯이 미소 지었다.

“그래요. 당신이 연구할 곳도 지어야겠군요.”

“공작성에 이미 연구실이 있는데요?”

“그렇지요.”

그걸 잊었을 리는 절대 없는데. 내가 이상함을 느끼자 에카르트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수상하게 미소 지었다.

***

공작성으로 돌아온 에카르트는 지도를 펼쳐보았다. 평범한 지도에서는 없는 지형까지 나온 특별한 지도였다.

대륙 서단의 무인도. 왕국의 지하 도시. 타르 공국 근처의 무인도. 버려진 황야의 마탑.

‘역시 무인도가 낫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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