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다비온은 왕관을 들고 블랑세의 머리 위에 올렸다. 그리고 블랑세 역시 다비온에게 황제의 왕관을 씌웠다.
격식에 따른 즉위식이 아닌 윈터로드 제국 최초로, 스스로 황제와 황후가 되었음을 선포하는 자리였다.
“나, 윈터로드 제국의 황제 다비온은 블랑세와 함께 제국의 부흥을 이끌고 모든 국민을 어질게 돌보겠습니다.”
“황제 폐하와 함께 제국을 보살필 것을 맹세합니다.”
그리고 둘은 결혼반지를 주고받았다. 고요하고 차분했지만 블랑세와 다비온의 눈빛은 서로를 향한 확신과 사랑이 담겨 있었다.
긴 주례도 없었다. 황제 부부와의 결혼이 아니라 그저 평민들이 할 법한 소박한 서약이었고 시국이 시국인지라 결혼 선물도 조용히 받거나 고가의 물건은 거절했다.
에카르트는 마치 먼지가 가득한 방을 다 청소한 하녀처럼 후련해 보였다.
“드디어 저 여자를 보냈습니다. 우리도 조만간 식을 올리겠지요.”
이미 정해진 미래처럼 말하는 모습이 귀여웠다.
나는 그와 사귄 후부터 자연히 결혼을 생각했고, 상황이 정리된다면 정식적인 혼례를 올리고 싶었다. 게다가 황족이 혼인한 후니까 시기도 적절하고.
사랑스러운 내 남자가 기뻐할 모습이 보고 싶어졌다.
‘몰래 프로포즈를 준비해야지.’
이벤트를 해 본 적은 없지만 그래도 마음이 중요하지 않겠는가.
“네, 그렇겠죠.”
“내일 당장 결혼하면 안 됩니까?”
“내일은 좀 그렇고요.”
“그럼 모레 새벽.”
“기다려요.”
나는 에카르트를 진정시켰다. 그에게 가장 좋은 것을 해 주고 싶었다. 내 손으로 직접 말이다!
나와 에카르트는 루솔릿 공작령으로 돌아왔다. 다비온이 특별히 허가해 준 가문에는 이동 마법 제한을 일정 부분 풀어 주었기에 황실을 오고 가는 길은 더 수월해졌다.
나는 니나와 단둘이 남게 되자마자 슬쩍 물어보았다.
“니나. 요즘 젊은이들은 뭘 좋아하나요?”
“공작님도… 젊으신데요.”
“유행은 잘 몰라서요. 요즘 유행하는 프로포즈 방식이 있다면 알아보고 싶어요.”
니나는 “네에?!”라고 외치더니 마치 자신이 고백을 받은 것처럼 방을 왔다 갔다 했다.
“어머, 어머어머.”
“니나.”
“넵, 진정했어요. 아무튼!”
니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설명했다. 대체 어디서 가져왔는지 펜과 종이로 그림까지 그리며 말이다.
“이렇게 중앙에 꽃 모양의 틀을 만들어 다양한 보석으로 채워 넣는 반지 스타일이 유행한다고 해요. 꽃잎 하나하나 섬세하게 제련하기 때문에 고도의 기술을 필요로 하죠.”
“그래요? 예쁘긴 한데… 마을을 순찰하거나 회의장에 참석할 땐 너무 화려할 것 같아요.”
“변환 마법을 걸면 되죠! 필요할 때나 기분에 따라 좀 더 간결한 디자인으로 바꿀 수 있도록요.”
“변환 마법?”
“네. 그럼 평소에 반지를 뺄 일은 없을 거예요. 우후훗. 절대 못 빼죠. 그렇고말고요!”
니나의 음흉한 웃음소리가 신경 쓰이긴 했지만 그녀의 조언은 참고할 만했다.
“마법은 제가 직접 걸겠어요. 소중한 거니까.”
“완전 소중하죠! 꺄, 너무 기대돼요.”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나는 니나가 반지 모양을 그린 종이를 후다닥 뒤집어 숨겼다.
“……?”
들어온 에카르트가 종이 뒷면을 빤히 바라보는 바람에 혹시 비치는가 싶어서 내가 아예 손으로 가렸다.
“엘린. 뭡니까? 그 여자에게 보내는 연서는 아니겠지요.”
“그럼요.”
“그렇다고요?”
“아니에요!”
오해의 소지가 있던 말을 정정했다. 에카르트는 무엇인지 궁금해했지만 나는 절대 답해 주지 않았다. 사실 그가 궁금해서 안달이 난 모습이 귀엽기도 했고 말이다.
그 후로도 니나와 단둘이 있을 때면 몰래 프로포즈를 준비하는 계획은 계속 이어졌다.
“공작님, 꽃잎 모양에 사용할 보석 말인데요. 한 장은 블랙 다이아몬드로 하면 어떨까요?”
“블랙 다이아몬드요?”
“네! 크로덴 공작님의 탄생석이거든요.”
“아, 좋아요. 이전에 생일을 챙겨 주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렸는데… 앞으로 모든 생일에 함께하겠다는 의미로 사용해야죠.”
“너무 감동스러워요. 공작님은 세기의 로맨티시스트에요! 그럼 저는 다이아몬드 제련소를 알아보고 올게요.”
“수고해요.”
니나가 달칵 문을 열자 에카르트가 들어왔다. 그는 밖으로 나가는 니나의 뒷모습을 못마땅하게 보고는 문을 닫다 못해 아예 잠갔다.
“저 하녀, 요즘 수상하더군요. 무슨 일을 그렇게 은밀히 하는 겁니까? 당신께 직접 대답을 듣고 싶군요.”
“…음! 니나가 요즘 좋아하는 상대가 생겼다고 하기에. 연애 상담을 도와주고 있었어요.”
“정말 그랬습니까?”
“그랬어요.”
꼬치꼬치 캐물을 줄 알았는데 그는 의외로 더 이상 따지지 않았다. 대신 신중히 물어보았다.
“우리 사이, 문제없는 거지요?”
“그럼요.”
“제가 질렸다든가.”
“네에? 아니에요옥!”
나는 손을 휘휘 저었고 그대로 다가가 팔을 벌려 그를 끌어안았다. 에카르트가 더 강하게 나를 압박하고는 귓가에 속삭였다.
“만에 하나 제가 질려도 당신은 어쩔 수 없습니다. 저는 계속 사랑할 테고 절대 놓아주지 않을 테니까요.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든.”
“그렇게 하세요.”
불확실한 미래조차 에카르트가 말한다면 확실한 것처럼 느껴진다. 우리는 서로 평생 사랑하겠지. 그건 내 인생에서 가장 큰 행운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내 숨이 막힐 정도로 그를 안고는 말했다.
“왜냐하면 저도 그럴 거니까.”
“정말입니까?”
“네. 만약 당신이 다른 마음을 품는다면… 어디 탑이나 섬에 가둬 버릴 거예요.”
그러자 에카르트의 말이 평소보다 더 빨라졌다.
“그럼 우리 둘이 거기서 살읍시다. 제가 이미 찾아 둔 곳들이 있지요.”
“네?”
“수도 시설은 물론 냉난방도 잘 되는 데다가 신축 급으로 재건축했습니다. 특수한 결계를 치면 벌레나 뱀도 막아 주더군요.”
“…에카르트?”
“당신이 좋아하는 과일 나무도 잔뜩 심고 꽃과 허브도 재배합시다. 소, 돼지, 오리, 양, 닭 등은 배로 실어 나르고 해안가에 항구도 만들어 교역선으로 드레스와 보석도 수입하지요.”
이미 봐 뒀다는 말이 정말이었는지 지나치게 구체적인 계획이 나왔다.
나는 조금 무서워져서 슬금슬금 팔을 떼어 냈다. 아무래도 에카르트만큼의 집착을 따라가려면 한참 멀어 보였다.
***
헬라는 루솔릿 공작 저를 순찰하고 마지막으로 서재에 들렀다. 루솔릿 공작가의 집사로 임명받은 후부터 헬라는 매 순간 최선을 다해 집사의 업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에카르트가 책꽂이에 기대서 책을 읽고 있었다.
이미 성인이 되기 전에 모든 전술서를 통달한 그였다. 전술 혹은 정치 경제와 관련된 것이라고 지레짐작했는데 표지가 분홍색이었다.
“흠흠.”
헬라는 책장을 정리하는 척 곁으로 다가가 제목을 곁눈질했다.
<…극복하는 방법>
앞부분은 가려져 있었지만 극복이라고 하니 단 한 가지의 경우만 생각났다.
아직 마검의 저주가 남은 것인가? 비록 여러모로 자신을 갈궜던 전 주인이었지만 걱정이 커졌다.
이윽고 에카르트가 책을 책꽂이에 꽂아 넣고는 한숨을 쉬고 나갔다.
그제야 헬라는 비로소 제목을 확인할 수 있었다.
<권태기를 극복하는 방법>
두 분 사이가 전혀 권태기로 보이지는 않는데. 헬라는 에카르트가 또 험난한 명령을 내릴까 봐 고민했다.
그 걱정이 무색하게 에카르트는 헬라가 아니라 엘린에게 요구할 생각이었다.
책에는 권태기를 극복하기 위해 취미를 같이하라고 적혀 있었다.
그래서 에카르트는 악기 연주하기, 자수 놓기, 체스 두기, 그림 그리기 등의 취미 목록을 떠올렸다.
하지만 다른 사람과 하지 못하는 것. 말하자면 조금 더 사적이고 자신만 볼 수 있는 모습도 만들고 싶었다.
“엘린. 취미를 만드는 게 어떻습니까?”
“취미요?”
매우 건강한 이야기를 들은 나는 두 팔 벌려 환영했다.
“좋죠! 이제 여유가 생겼으니 우리 같이해 봐요. 저는 그림을 배우고 싶었는데 어떠세요?”
“그림이라.”
그는 자신 있다는 듯이 말했다.
“좋습니다. 한데 한 가지 더 하고 싶은 게 있는데 수영은 어떠신지요?”
“…수영?”
“근력과 지구력을 기르니 건강에도 좋지요. 특수 도구를 착용한 후 물로 들어가 수중 생물을 포획하거나 관찰하는 재미도 있을 겁니다.”
“네! 그럼 물고기도 잡고 훈제구이도 해서 먹어요.”
내가 생긋 웃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그럼 커플 수영복을 먼저 사야겠군요.”
“수영복?”
“편의를 위해 상, 하의가 분리되고 가벼운 디자인이 좋겠습니다. 실내 수영장을 만들고 누구도 들어오지 못하게 합시다.”
말하는 형태로 봐서는 비키니 같은데. 내가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물어보았다.
“…혹시 수영복 때문에 추천한 취미인가요?”
그때 창문이 열리더니 밧줄을 타고 타잔처럼 블랑세가 등장했다. 그녀는 새처럼 가볍게 착지하고 한 줄로 평했다.
“음흉해요.”
“황후가 할 짓도 없지.”
에카르트가 짜증을 숨기지 않았고 블랑세는 해명했다.
“여자의 직감이 들어서 와 봤어. 이제 이동 마법 재료를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거든.”
“그럼 문으로 들어오면 되잖아?”
“내가 언제든 올 수 있다는 경각심을 심어 줘야 저 남자가 허튼짓을 안 하지.”
황후의 체통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는 에카르트를 경고하듯 쏘아보고는 다시 창문으로 나갔다.
“…에카르트. 수영복 디자인은 제가 고를 거예요. 동방에는 해녀들이 물질할 때 입는 전신 복장이 있는데 그런 종류가 좋겠어요.”
“전신….”
아쉬움이 묻어 나오는 목소리였다.
좌우지간 대체 뭘 그리 보고 싶은지 나는 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뭐, 물론 나도 그의 몸이 좋긴 하지만.
“상, 하의가 분리된 의상이 아니면 싫으신가요?”
“그럴 리가요. 의상실에 제 것까지 주문을 맡깁시다.”
“당신은 원래 입으려던 디자인으로 입으시죠.”
“싫습니다. 커플로 할 거라서요.”
튕기는 모습이 사랑스러워서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말은 그렇게 해도 나는 에카르트가 원하는 디자인을 주문하기로 했다.
보통 귀족들은 부부끼리 프라이빗한 수영장에서 수영을 즐긴다고는 들었다. 우리가 아직 부부는 아니지만 곧 그렇게 될 테니 상관없겠지.
“니나. 수영복은 어디서 파나요? 부티크?”
“네. 다나 의상실의 디자이너가 새로 개업한 부티크에서 수영복도 판매할 거예요!”
니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카탈로그를 가져와 보여 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