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바로 악마를 퇴치하고 얻은 심안이었다. 블랑세를 위해서라면 내 어떤 능력이든 동원할 수 있었다.
내 마력이 쭉 빠져나가며 깊은 잠에 드는 것 같았다.
조금 더 집중하니 어슴푸레한 빛이 보였다. 마치 깊은 바닷속으로 한없이 내려가듯 나는 더 집중했다.
나는 거대한 도서관 안으로 들어와 수십만 권의 책을 매우 빠르게 훑듯이 새로운 지식을 흡수하고 있었다.
블랑세의 병증은 어딘가 익숙한 느낌. 별의 꽃과 같은 종류지만 그보다 더욱 강력한 이것은… 나는 눈을 뜨고 확신했다.
“달의 꽃을 사용해 만든 독 같습니다.”
“달의 꽃?”
진단을 듣고 다비온은 물론 에카르트 역시 예민하게 반응했다.
“네 어미와 이야기를 나눠야겠군. 엘린에게도 허튼짓을 하지 않았는지 알아내야겠어.”
“아니. 저는 괜찮아요. 수호 신령도 있고 마력과 성력 덕분에 독도 정화하니까.”
“다행이군요. 그래도 저놈과 확인하고 오고 싶은데. 이 여자와 단둘이 두고 싶지는 않군요.”
에카르트가 나를 집착 가득한 눈빛으로 봤다. 괜히 함께 보냈다가 또 허튼소리를 하면 시간만 늦어질지 모른다.
“…내가 전부 확인할게. 루솔릿 공작, 블랑세를 지키고 있어 주세요.”
“네. 서둘러 주세요.”
다비온은 블랑세의 손을 한번 잡고 그 온기를 확인하듯 가볍게 입술을 맞추고 나갔다. 에카르트는 둘이 스킨십하는 모습을 보고 미간을 구겼다.
“바퀴벌레 한 쌍을 본 것 같습니다. 당신을 보고 눈을 정화해야겠어요.”
그러더니 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게 했다. 내가 쓰러진 블랑세를 염려하거나 말거나 말이다.
블랑세가 회귀했다는 사실을 말했을 때도 내 이야기만 궁금해하더니. 지금 황후가 블랑세를 독살하려 했다는 소식을 접해도 그저 내게도 해가 가지 않았을지를 먼저 생각한다.
그는 원작에서도 자기 안전과 감정이 가장 중요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른 사람인 나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니 발전이라면 발전일까.
마치 온 세상의 중심이 내게 있는 것 같은 눈빛을 보면… 이상하게 늘 용기가 생겼다.
하여 반드시 블랑세를 고치겠다는 의지를 다졌다.
***
다비온은 착잡한 마음으로 브록과 기사들을 이끌고 황후궁으로 향했다. 정원을 걷는 동안 여러 기억이 떠올랐다.
“이 꽃은 뭔가요?”
“블루 세이지란다.”
“어머니는 정말 모르는 게 없으세요!”
사사로운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직접 마법도 배웠다.
“물속에 가라앉았다가 서서히 수면 위로 올라온다는 느낌으로 마력을 이끌어 내보렴.”
“이렇게요?”
“심장박동을 느껴 봐. 팔과 다리를 움직이듯 마력을 네 몸처럼 통제하거라.”
하지만 다비온의 마력은 그저 평범한 수준이었다. 지팡이 끝에 모여든 마력은 그저 미약하기 그지없었다.
“죄송합니다.”
“…하아. 마력이 부족하구나.”
가르침과 보살핌을 받고 꾸지람도 들으며 기억을 쌓았던 곳.
이제는 황제의 직속군이 황후궁을 엄중히 호위하고 있었다. 문을 지키던 기사가 어두운 얼굴로 문을 열어 주었다.
오늘따라 작아 보이는 아렌다가 지친 듯 소파에 앉아 있었다.
어머니가 우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 없었는데 눈가가 붉었다. 다비온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얘야. 네가 어찌 내게….”
흐린 말꼬리에서는 슬픔이 묻어 나왔다. 다비온은 가장 나은 방식이라고 자신하지는 못했지만, 아렌다를 저지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아야 한다는 결정만은 확신했다.
행복하고 즐거웠던 가족의 모정에 대한 모든 기억을 잊어야 했다.
지금은 그저 블랑세와 황제를 죽이려 하고, 시엘리나와 에카르트에게 누명을 씌우려 한 비정한 황후로 기억해야 했다.
다비온은 흔들리지 않기 위해 애를 써 굳게 마음을 먹었다.
“블랑세 양에게 달의 꽃을 사용했나요?”
“…….”
“달의 꽃을 사용하셨겠죠.”
“그래. 잘 아는구나. 그 또한 너를 위해-”
“그만하세요!”
다비온이 주먹을 꽉 쥐었다.
분노와 원망이 뒤섞여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토할 것 같았다. 너를 위해. 너를 위해! 세상에 애정을 빙자한 그보다 끔찍하고 폭력적인 말이 어디 있단 말인가?
“시엘리나 님께도 다른 해가 되는 일을 했나요?”
“그 애가 밝혀낸 게 전부야.”
아렌다는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얘야. 너는 나를 미워할 수만은 없어.’
가끔은 좋았던 기억을 떠올릴 것이다. 어리던 자신을 지키기 위해 감수한 일을 생각하면 자책도 할 터였다.
어머니와 자식의 관계란 복합적인 데다 애초에 정이 많은 아이니까.
‘여기서 만약 다비온을 뒤흔든다면…’
아렌다의 눈빛이 다시 탐욕스럽게 변하던 그때. 다비온의 손이 떨리는 것을 보았다. 늘 여리게 느껴지던 아들이었다. 애쓰는 모습을 알아차리자 여러 감정이 밀려 들어왔다.
다비온이 강해지길 바랐다면 드디어 원하는 대로 되었다.
이제는 다 자란 아이를 보내 줄 시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렌다는 황후가 아니라 어머니의 마음으로 물어보았다.
“블랑세와 결혼할 것이냐?”
“네.”
“…나는 너를 통제하려고 했으면서 나 자신은 통제할 수 없었다.”
“…….”
다비온은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모두를 위한 결심이 흔들릴까 봐 이해하기가 두려웠다.
“나 같은 여자를 곁에 둘 바에 그런 순수한 아이도 나쁘지 않겠지.”
“저는 더 이상 누구의 허락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다비온은 완전히 어머니의 품을 떠나기로 했다.
“저는… 당신의 죄를 짊어지고 살아갈 겁니다.”
울고 싶은 목소리였지만 울지 않았다. 아렌다는 문득 다비온이 소년이었을 때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도 황태자로서 울어서는 안 된다고 했지, 아들인데도 다정히 위로해 주지 못했다.
뒤늦게 아렌다가 손을 뻗었지만 다비온은 이제는 그 손길이 몸에 닿는 것도 싫었다.
“…다비온. 나는.”
그것이 너를 사랑하는 방식이었다.
아렌다는 그런 말을 하려고 했다.
“대체 왜 그러셨나요? 아냐. 더 이상 묻지 않을게요. 나를 위해 했다고 하시는 일들이, 나를 너무 괴롭게 합니다!”
“미안하다.”
언젠가 다비온이 새로 알게 될 일이 있었지만 아렌다는 먼저 말하지 않았다.
다비온은 아렌다를 넓은 공간에 내버려 두고 나왔다.
그렇게 아들에서 황제가 된 이가 떠난 뒤, 아렌다를 호위하던 기사들은 이제 그녀를 감시하게 되었다.
***
다비온은 떠났을 때보다 더 착잡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블랑세를 보자 따뜻하고도 결단력 있게 시선을 고정했다.
“달의 꽃을 사용한 독이라고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루솔릿 공작께서 밝혀낸 악행이 전부라고 하더군요.”
“흐음.”
당연히 아렌다의 말을 전부 믿을 수 없었다.
그래도 어차피 나는 독을 써 봤자 통하지 않고 지금은 블랑세의 상태가 중요하다 보니 이쯤에서 넘어가기로 했다. 에카르트가 상황을 깔끔하게 정리했다.
“엘린. 제가 나중에 그 여자를 찾아가 다시 확인하지요. 당신 옆에서 지켜보며 이상이 없는지 계속 감시, 아니, 확인하고요.”
“방금 감시라고 했는데.”
“이런. 제가 그랬단 말입니까?”
에카르트가 내 허리를 끌어안아 제 옆으로 밀착시키고는 다비온에게 통보했다.
“너. 혹시 모르니 우리 엘린이 연구할 달의 꽃도 남겨 둬. 황족만 사용할 수 있다는 같은 제약도 바꾸고.”
“그래, 그래.”
황제가 된 후에도 여전히 부하 취급을 당하는 다비온이었다. 그때 블랑세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며 눈을 떴다.
“블랑세 양.”
“…다비온?”
“블랑세, 정신이 들었군요. 루솔릿 공작이 밝혀낸 바로는 당신은 달의 꽃의 독에 중독됐습니다. 제 어머니…가 사용했고요.”
“아아, 그때.”
블랑세는 짚이는 일이 있는지 중얼거렸다.
“그래서 달의 꽃으로 해독제를 만들어 보려 합니다.”
“달의 꽃? 그건 황족에게만 사용할 수 있잖아요.”
“그랬기에 선대 황후 폐하는 이 꽃을 당신과 루솔릿 공작의 약점으로 잡으려 했고요.”
“황족도 아닌 제가 정말 이 꽃을 받아도 되는 건가요?”
“블랑세. 그런 규율은 중요하지 않아요. 당신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아뇨. 혹시 나중에라도 황족이 사용하지 않은 게 문제가 되어선 안 돼요.”
“그럼… 혼인 서약서에 서명하고 꽃을 가져가신 후 이혼해도 괜찮습니다. 저는 그 사실을 비밀에 부치고 누구에게도 마음을 주지 않을게요.”
“다비온. 당신은 이제 황제예요. 이혼을 그렇게 쉽게 말씀하실 순 없어요.”
블랑세가 은근한 눈빛을 보내던 그때야 깨달았다. 블랑세는 이 기회에 다비온과 확실한 관계가 되려는 것이다.
자유분방하고 규칙에 얽매이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황후의 신뢰가 곤두박질친 상황에서 덜컥 황제로 즉위한 다비온.
사교계에 데뷔한 적 없는 블랑세.
최소한의 절차만을 갖추고 혼인하려는 젊은 황제 부부.
혼란스럽지만 내가 아는 그들은 강했다.
다비온은 블랑세의 사명을 존중하기 위해 자신의 마음까지도 포기할 수 있었다.
그리고 블랑세는 더 이상 불행한 길을 선택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기꺼이 그녀의 곁에서 함께할 테고.
다비온이 블랑세의 말뜻을 깨닫고는 환하게 웃었다.
“블랑세. 달의 꽃이 있는 아공간으로 가요.”
“그래요.”
블랑세는 나를 향해 생긋 웃어 주고 다비온의 손을 잡았다. 둘이 잘 되어서 좋았지만 왠지 나는 한편으로 섭섭함이 느껴지기도 했다.
“시엘. 내가 기혼자가 된다고 해서 안심하지 마. 후궁을 둘 수 있으니까… 콜록!”
그녀가 기침을 했고 나는 치료부터 받으라고 기겁했다.
“엘린. 이제 저 여자는 저놈에게 넘겼으니 우리끼리 데이트를 하러 갑시다.”
에카르트가 블랑세의 상태는 안중에도 없는지 철부지 같은 소리를 했다.
***
보름 후.
다비온은 대관식과 결혼식을 진행했다. 객석 어디에도 선대 황제 부부는 없었다.
꽃길 위로 부드럽고 하얀 천으로 제작한 진열대가 있었고 그 위에 두 개의 왕관이 놓여 있었다.
두 사람은 꽃으로 깔린 길을 함께 걸어가 진열대 앞에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