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나를 향한 증오를 고스란히 느끼자 머리가 차분해졌다.
“리타. 네 마법은 전혀 위대하지 않아.”
“위대하지 않다고요?”
“그래. 너 혼자 아무리 대단한 듯이 떠벌려도 그저 범죄자일 뿐. 어디도 기록할 가치가 없지.”
그러자 리타는 영혼이 찢기는 것 같은 기괴한 소리를 질렀다. 리타가 다시 감옥으로 끌려 나가자 다비온이 남은 기사들에게 냉정하게 말했다.
“선대 황후 폐하를 모시라고 했을 터.”
“네, 넵!”
아렌다는 쉽게 물러나지 않을 것 같았지만… 체면을 생각하는지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스스로 일어났다. 모두의 어안이 모두 벙벙해졌을 때 다비온이 회의를 정리했다.
“루솔릿 공작의 무죄를 입증했다면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앞으로 즉위식을 비롯한 일정과 개정된 정책을 토론해야 하니 내일 다시 모여 주시길.”
새로운 황제의 축객령에 귀족들은 여전히 떨떠름한 표정으로 한둘씩 예를 차려 나갔다. 회의장에 오직 우리 셋만 남은 후. 황제가 된 다비온이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나도 덩달아 무릎을 꿇으려 했지만 에카르트가 손으로 내 허벅지를 눌렀다.
“앉아 계십시오. 저놈은 당신께 머리를 조아려도 시원찮습니다.”
“에카르트.”
“루솔릿 공작. 용서해 주십시오. 피해는 전부 황실에서 보상하겠습니다.”
“…네.”
나는 짧게 대답했고 에카르트는 짧게 물어보았다.
“왜 이제야 나섰지?”
“마지막으로….”
불쑥 다비온의 눈에 눈물이 고이고 침음에 잠겼다.
“마지막으로 어머니께 기회를 드리려 했어.”
그건 여리기만 한 황태자의 눈물이 아니었다. 자신의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시시비비를 판단해야 하는 숙명을 갖게 된 황제의 눈물이었다.
울었으면 일어나야 할 시간이었다. 다비온은 황제가 된다면 이 손으로 얼마나 많은 목숨을 좌지우지할까.
그러나 그만한 권한이 있다는 건 아끼는 사람들을 지킬 수도 있다는 뜻. 적어도 누군가의 피를 닦는 것보다 자신의 눈물을 닦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다비온은 폴이 다쳤을 때를 떠올려 보았다.
***
그간 다비온은 다친 폴을 처음 만났을 때처럼 극진히 돌봤다. 여러 연고를 직접 만들어 자신에게 사용해 보기도 하면서.
그동안 에카르트에게 폴을 보내거나 직접 가서 상황을 알려 왔다.
‘내가 약해서 폴을 지키지 못했어. 게다가… 언제까지 귀띔만 해 줄 수는 없겠지.’
루솔릿 공작령은 새로운 교역로를 개발하고 있고 대량의 마정석까지 획득했다. 어머니는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다음엔 폴이 아니라 시엘리나가 다칠지도 모른다. 그랬기에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다비온은 황제궁으로 찾았다. 황제는 수척한 얼굴로 침상에 누워 있었다. 가족의 정. 존경. 애틋함. 그런 감정들은 여전했으나 본인이 해야 할 일만은 명확히 알았다.
“아버지.”
“…….”
“아버지.”
두 번 부르자 황제가 간신히 눈을 떴다. 황제는 아직 꿈결을 헤매듯 지그시 눈을 다시 감았다.
“무슨 꿈을 꾸셨나요?”
“네 어머니를 만났을 때였다. 약초 향이 났지.”
다비온은 황제를 꿈에서 깨워야 했다.
“저는 더 이상 어머니의 의견에 따르지 않겠습니다.”
“다비온.”
황제가 올곧은 금색 눈동자를 마주 보았다.
“너는… 누군가를 사랑하더라도 현명한 사람이 되어 주겠느냐?”
“무슨 말씀이신지요.”
“나는 그러지 못했어. 지금도 여전히 아렌다를 사랑하고 그녀가 그렇게 된 데에는 내 책임도 있다.”
“아버지! 황제는 한 여자가 아니라 수백만의 제국민을 책임져야 합니다.”
다비온 역시 어머니를 사랑했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사랑하는 사람이 그렇게 망가지도록 두는 게 어찌 사랑이란 말인가.
원작에서도 다비온은 그랬기에 에카르트가 저주로 인해 이성을 잃었을 때 막으려 했다.
블랑세를 죽음에 몰아넣은 에카르트가 원망스러웠고 그를 연인 같은 깊은 감정으로 사랑하는 건 아니었으나 둘도 없이 아끼는 친구였기에.
“어머니는 루솔릿 공작에게 누명을 씌울 생각입니다. 그걸 지켜볼 수는 없습니다. 그동안 어머니께서 부족한 저보다 제국을 잘 이끌어 주리라 믿었습니다.”
“계속 말해 보거라.”
“하지만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무고한 사람들을 희생시켰고… 더 이상 제국의 지도자 자격이 없다고 사료됩니다. 그러니 아버지께서 어머니의 폭주를 막을 수 없다면.”
다비온은 높은 곳에서 다이빙을 하듯 두렵고 심장이 뛰었다. 하지만 다른 감정이 그 두려움을 압도시켰다.
주변 사람들을 지키고 더 나은 방식으로 통치하고 싶은 확고한 의지와 용기였다.
“제가 황제가 될 것입니다.”
“그러거라.”
“…아버지?”
선뜻 나온 대답에 다비온의 눈빛이 흔들렸다. 하지만 황제는 다비온이 말하기 전에도 오래 생각했던 일이었다.
황제의 주변에는 늘 권력을 노리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마력이 있었으나 소박하게 살아가고 그것에 만족하는 여자. 그런 사람을 궁으로 끌어들인 건 자기 자신이다.
사랑했던 아렌다가 변한 데에 책임을 느끼고 있었다.
병마는 그의 마음을 더 약하게 만들었다. 아렌다는 제국을 냉정하게 다스렸지만 그것은 황족의 카리스마로 포장될 수 있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아렌다의 통치 방식이 변하였고 이제 무고한 젊은이들마저 정치의 희생양이 되게 두어서는 안 되었다.
“네 뜻대로 하거라. 다만 내가 아렌다와 생사를 함께하게 해 다오.”
“…….”
“아니, 황제로서 첫 업무가 네 어머니를 처벌하는 거라면 안 되겠지. 이 일은 내가 처리해 네게 넘기겠다.”
“시간이 없습니다. 곧 회의가 시작할 거예요.”
“그렇다면 대전으로 가자꾸나.”
대전에는 황제가 되기 위해 필요한 자격을 갖추는 공간이 있었다. 황제는 밖에서 대기하던 카렌과 브록을 불렀다.
“두 단장이여. 다비온이 황제가 될 테니 증인이 되어 주게.”
“…폐하.”
“알겠습니다.”
백마법사 단장은 이내 말없이 고개를 숙였고 기사단장은 준비되었다는 듯이 답했다. 황제는 마법으로 함께 대전으로 이동했다.
역대 황제들의 조각상이 스테인드글라스의 찬란한 빛을 받으며 거인처럼 서 있는 곳. 그 중앙의 신성한 석판에는 황제의 이름들이 적혀 있었다.
임명장처럼 다음 대(代)로 넘어갈 때마다 새로운 황제의 이름을 써 왔다. 황제가 되었음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증표 중에 하나였다.
황제는 석판 앞에서 보검 한 자루를 소환했다.
“네 이름을 쓰거라.”
“알겠습니다.”
석판은 피로 작성했다. 피가 석판에 닿았을 때 황금색으로 변하면, 황위를 계승하는 자격이 된다는 의미였다.
다비온은 망설임 없이 보검으로 검지를 그었다.
다비온 윈터로드.
그 글자를 쓰자 석판의 피가 황금색으로 바뀌었다.
황제는 다시금 아렌다와의 기억을 떠올렸다.
“다비온이 아픈 일은 이 석판을 쓸 때 단 한 번뿐일 거예요.”
그렇게 될 수 없음을 알기에 씁쓸함을 느끼면서도 마음속으로 하나뿐인 아들을 축복했다.
다비온은 좁고 올곧은 길을 선택하더라도 그의 이상을 함께할 동료들이 있기를. 선황들의 앞에서 기도했다.
석판의 글자가 마르자 황제가 다비온을 따뜻이 바라보았다.
“그 보검은 이제 너의 것이다.”
“소중히 간직하겠습니다.”
“새로운 황제 폐하를 받들거라.”
호위 기사 브록와 백마법사 단장 카렌이 무릎을 꿇었다.
“루솔릿 공작을 보고 직접 사과하고 싶구나.”
“자리를 마련하겠습니다.”
다비온은 굳이 거절하지 않았다. 염치없지만 한편으로는 시엘리나에게 아버지를 진찰해 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었다. 그녀라면 황제의 병색을 밝혀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
“옳은 일이었습니다.”
다비온이 이 사태를 한마디로 정리했다.
그가 강경하게 대응한 덕분에 위기를 넘겼지만 그래도 아렌다는 어머니였다. 결국 어느 한쪽은 이런 결말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는 생각이 들어 씁쓸했다.
그러나 나는 죄송하다는 말은 하지 않기로 했다. 황후가 내게 누명을 씌우려는 이상 방어해야 했으니까.
과거로 돌아간들 나 자신과 에카르트, 그리고 영지민을 위해 같은 선택을 하고 만약 다비온이 황후의 편이었다면 결국 대립했으리라.
“그 여자라면 네게 의지가 되어 줄 거다.”
에카르트가 위로 같지 않은 위로를 하며 잠시 생각한 후에 그럴듯한 말을 덧붙였다.
“나도 이야기 정도는 들어주지. 가끔은 말이야.”
“고마워.”
다비온이 미소 지으며 나를 바라봤다.
“공작. 아버지의 상태를 살펴봐 주실 수 있을까요?”
“네. 알겠습니다.”
우리는 선대 황제의 병상으로 향했다. 상태가 위독하기 때문에 아직 황제궁에 머물게 하는 듯했다. 내가 침대 앞에서 가볍게 예를 차리고 말했다.
“루솔릿 공작입니다. 선대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공작. 그간 제국에서 고생 많았소. 그대의 활약은 널리 들었네.”
선황을 진찰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정 파악할 수 없다면 악마에게 받은 심안을 사용하려 했으나 그럴 필요도 없었다.
다섯 가지의 독을 조합한 저주가 걸려 있었고 굳이 달의 꽃이 아니라도 나을 수 있었을 것이다. 백마법사 단장이, 선대 황후가, 선황이 이 정도의 병증을 몰랐을 리 없었다.
‘알고 있었구나.’
모든 사정이 납득이 갔다. 문밖으로 나오자마자 다비온이 내게 물어보았다.
“공작. 아버지의 상태는 어떠신가요.”
이미 모두 병증에 대해 알고도 내버려 두었던 것 같다고 말해도 될까.
“어려운 독이 아닙니다. 금세 회복할 수 있습니다.”
“그 말씀은.”
다비온이 헛웃음을 지었다. 그간의 걱정이 얼마나 허무했던 것인지 자각하자 한심함까지 느꼈다.
“내가 괜한 걱정을 했군요.”
“…….”
“블랑세 양은 공작성에 계시나요?”
“네?”
갑작스러운 화제 전환에 내가 당황했다. 아니. 그의 심정이 이해가 갔다. 미칠 것 같은 상황 속에서 정신을 붙들어 줄 상대를 찾는 건 당연했다.
“블랑세가 보고 싶습니다.”
“아…. 전서구로 연락을 하시면 바로 올 거예요.”
곧 블랑세가 이동 마법으로 황궁에 도착하자마자 나를 향해 달려왔다.
“시엘. 어떻게 됐어?”
“음, 얘기하자면 긴데. 일단 다비온 폐하가 황제로 즉위하셨어.”
“뭐?”
하지만 구체적인 이야기를 듣기에는 그녀의 안색이 안 좋아 보였다. 잠시 안 본 사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걱정될 때. 그녀가 갑자기 벽을 짚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블랑세?”
“…갑자기 어지러워.”
다비온은 그녀를 가까운 방으로 옮겼다. 블랑세의 심박 수가 순식간에 낮아지고 호흡이 불안정해졌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갑자기 상태가 이렇게 나빠지다니?’
성력을 사용했지만 그녀에게 쉽게 흡수되지 않았다. 여러 진찰을 해도 파악할 수 있는 영역 밖이었다. 내가 말이 없자 다비온이 얼굴이 새하얘졌다.
“공작?”
“다른 능력을 사용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