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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물 조연은 도망치고 싶다-104화 (104/115)

#104화

“공주님.”

“꺄.”

블랑세는 빌론을 알아보고는 손을 뻗었다. 하지만 빌론은 베개를 들고 블랑세의 얼굴을 누르려고 했다.

“보, 보좌관님!”

마침 빌론의 기사가 등장했다. 그러자 빌론은 생각이 바뀌어 베개를 내려놓고는 말했다.

“그래. 피 묻은 손으로 왕관을 써서는 안 되지.”

빌론은 아무렇지 않게 방을 나오며 명령했다.

“공주를 죽여.”

“네?”

“이제부터 공국은 내가 지휘한다.”

기사는 그 즉시 명령을 거역할 만큼 용기 있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갓난아기를 죽일 만큼 매정하지도 않았다.

그는 요람에 짐승의 피를 묻히고 비슷한 시기에 죽은 다른 아기를 데려다 놓았다.

그리고 블랑세를 바구니에 담아 제국 남부에 몰래 두고 떠났다.

“용서하지 마십시오.”

마침 남부에 포교를 하러 온 대주교가 국경 근처에서 바구니를 발견했다.

대주교는 누군가 아기를 살리기 위해 일부러 이곳에 두었다고 판단했다. 타르 공국의 국민들은 전염병으로 인해 입국조차 받고 있지 않으니 말이다.

“공국을 떠나온 것이냐. 가엽게도.”

대주교는 블랑세를 신전에서 찾았다고 선의의 거짓말을 했다.

***

블랑세가 눈을 깜빡이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하얀 파도 같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블랑세! 뭔가 떠올렸어?”

“응, 나는 엄마를 닮았어. 그리고….”

그녀는 뭔가 말하려다가 말문이 막힌 것처럼 고개를 푹 숙였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는 눈가가 붉어졌다.

“시엘, 네가 이곳으로 와 줘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그 보좌관, 나를 죽이려고 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 엄마의 연구를 훔쳤거든.”

“뭐?”

“바크 풀은 우리 엄마가 알아낸 거야.”

빌론이라면 그러고도 남았다. 하지만 블랑세를 죽이려고까지 한 그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

“그놈 아직 살아 있을 거야. 죽었을지도 모르지만. 왕궁으로 돌아가면 바로 확인해 볼게.”

나는 블랑세에게 약속했다.

“…기억이라고 확신하시는군요. 보통 환상이라고 생각하실 텐데.”

“환상인 것과 실제로 본 것의 느낌은 달라요. 무엇보다… 나를 안아 주던 따뜻한 감각.”

블랑세는 잠시 증오를 거두고 꿈결처럼 말했다.

“나를 바로 알아보셨죠?”

“네. 선대 공왕 부부께서는 공주님을 데리고 이곳을 찾으신 적 있습니다. 블랑세 양에게는 제가 기억하던 냄새가 납니다. 바로 공주님이시죠.”

아이의 이름을 한 살이 지난 후 짓는 풍습이 있었으니 이름을 짓기 전에 그런 비극이 생겼으리라.

“부모님께서 저를 사랑하셨군요. 태어났을 때부터 저를 사랑해 주는 사람이 있었어요. 그리고… 제가 살아남을 수 있도록 도와준 사람들도요.”

“나도 너… 사랑해.”

내가 혹시라도 잊었을까 봐 상기시켰다. 그러자 블랑세는 당연하다는 듯이 “나도.”라고 답했다.

“타르 열매 두 상자를 채웠습니다.”

수인족 한 명이 와서 상황을 보고했다. 우리는 타르 열매 물량을 확인했고, 미랑은 여우로 변해서 짐을 실었다.

“오늘 감사했어요.”

“아닙니다. 공왕님께 받은 은혜에 비해서는 별거 아닌걸요.”

나는 샤사와 샤를에게도 인사를 했다.

“인간. 또 올 거지?”

“또 와 주셔야 해요.”

“그래. 다들 건강히 있어.”

다시 미랑의 위에 오른 후 내가 다음 목적지를 알려 줬다.

“이제 왕궁으로 가요.”

“왕궁?”

“가서 잠시 보고도 받고. 블랑세에 대해 아는 사람들을 더 찾아보려고요.”

실라는 내게 공작 작위를 주려고 했다. 그것이 내가 원래 누려야 하는 권리라고 생각했기에. 나 역시 블랑세가 원한다면 여러 문제를 협의하고 공왕의 자리를 되찾아 주고 싶었다.

하지만 블랑세가 뒤에서 날 끌어안고 단호하게 말했다.

“시엘, 이런 이야기가 조금 이를지는 모르겠지만.”

“응.”

“타르 공국은 너를 통해 변화를 이끌어 낸 곳이야. 나의 신분과 별개로 네가 만든 왕국을 유지하고 싶어.”

블랑세가 내 의도를 알아차린 모양이다.

“게다가 지금 급한 일은 따로 있으니까. 치료제와 관련된 절차를 먼저 처리할게. 그게 우리가 해야 할 일이잖아.”

“알았어.”

그래도 부모님이 궁금할 법한데 블랑세는 침착했다. 일단 우리는 미랑을 타고 왕궁까지 금세 도착했다.

“공왕님, 어서 오십시오!”

델은 블랑세를 보고 뭔가 깨달은 눈빛이 되었다. 그녀 역시 블랑세가 선대 공왕과 닮았다는 사실을 바로 알아차렸다.

“델, 더 오래 있고 싶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짧게 전달만 하고 갈게요. 공작령에 타르 열매가 대량으로 필요해져서 산맥에서 공수했어요. 대신 책을 전달할 거고요.”

“네. 증서로 지금 바로 기록하겠습니다.”

델은 신하 한 명을 불러와 장부에 빠짐없이 적었다. 내가 인장을 찍고 신하가 돌아간 후 중대한 사실 하나를 더 알려 주었다.

“그리고… 이쪽의 블랑세는 타르 공국의 공주에요.”

나는 빌론의 만행에 대해서도 밝혔다. 델은 놀라면서도 블랑세에게 타르 공국의 방식대로 예를 갖췄다.

“그런 일이… 공주님께 인사드립니다.”

“네, 반가워요. 선대 공왕 부부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면 보여 주실 수 있나요?”

“아쉽게도 빌론이 대부분의 기록을 소거했습니다만 다시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잠시 델과 둘만 남은 후. 나는 혹시라도 왕위가 바뀌는 것을 염려하거나 혼란이 생길까 봐 미리 그녀를 안심시켰다.

“델. 내가 공국을 비우고 있음에도 무탈한 이유는, 델이 공국의 보좌관으로서 일을 잘 처리하고 있기 때문일 거예요.”

“별말씀을요. 변함없이 충성심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나는 앞으로도 대규모 구조 조정이나 정책 변경은 없을 예정이며, 델은 지금껏 그래 주었듯 앞으로도 잘해 주시면 된다고 당부했다. 그러자 그녀는 은근히 안심한 눈치였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공왕님.”

“네. 여전히 할 일이 많을 거예요. 루솔릿 공작령의 교역로 사업도 공국까지 이을 계획을 마련하고 있고요.”

“정말 대단하십니다! 새로운 문물을 교환할 장이 생기면 영주민들 역시 기쁠 겁니다.”

우리는 훈훈하게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블랑세는 선대 공왕 부부의 액자를 보고 있었다. 그녀는 그들의 이름을 작게 중얼거렸고, 내가 나오자 아무렇지 않게 미소 지었다.

“낯설어. 그런데 낯설지 않네.”

그녀의 감정에 대해서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나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 묘소를 찾아가고 싶어.”

“그럼 같이 갈까?”

“고마워.”

블랑세가 마치 옷자락의 감촉을 느껴 보려고 하는 듯 초상화를 쓰다듬었다. 그 후 선대 공왕 부부에 대한 기록을 다시 내밀었다.

“이거는 공국에 보관해야지. 나중에 다시 와서 읽을래.”

“알았어. 그럼… 이거 받아.”

나는 블랑세에게 작은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서랍에서 찾은 선대 공작 부부의 초상화였다. 구겨지지 않도록 마법 작물로 만든 종이 앨범에 감싸서 가져왔다.

블랑세는 초상화를 소중히 품에 넣어 간직했다.

***

델은 빌론을 찾아가서 시엘리나가 당부한 일을 처리했다.

“공국의 아기 공주님, 네가 죽였나?”

“무슨 이야기가 듣고 싶소?”

“공왕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 공주를 죽이라고 시키지 않았는가. 직계인 공주가 있다면 계속 보좌관으로 남아야 하니까.”

델이 찾아보려고 했지만 이미 기사는 퇴역한 후라 기록을 찾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녀는 증거를 남기기 위해 유도 심문을 했다.

“잭슨 경이 남긴 기록을 봤다. 네가 공주를 죽이라고 지시했다더군.”

“그, 그 새끼가! 아무 증거도 남기지 말라고 했을 텐데!”

“잭슨 경은 어디로 갔지?”

“모르오.”

“녹슨 톱으로 손가락을 자르고 그다음 네 입에 처넣을 것이다. 그걸 다 씹어 삼키면 다른 살점을 한 겹씩 베어 내 천천히 먹여 주지.”

“저, 정말 모른단 말이오.”

델은 자백을 기록해 시엘리나에게 보내 주고 영상을 보관하기로 했다.

***

나는 미랑을 타고 블랑세와 함께 루솔릿 공작령에 도착했다.

그런데 평야에 군대가 쫙 깔려 있었다. 이클립스 기사단과 황실군과 대치 중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클립스 기사단이 황실군을 포위하고 있었다.

나는 미랑에게 멈추라고 말한 후 멈추기 전에 훌쩍 뛰어내렸다.

“에카르트!”

“엘린!”

이미 몇몇은 에카르트의 포스에 눌려 몸을 일으키지도 못했다.

“어서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저 쭉정이들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나를 발견한 그가 성큼성큼 다가오던 그때 마력의 변화가 느껴졌다. 황실 마법사 중 하나가 손을 쓰려던 것이었다. 나는 황실 마법사의 손목을 넝쿨로 잡아 멈추게 했다.

“뭐 하는 짓거리야?”

“아, 아까 크로덴 공작께서 먼저 공격하셨습니다! 저희는 분명 충분히 경고를….”

“그래요? 난 못 봤는데.”

내가 싸늘하게 말하자 마법사는 할 말을 잃었다. 에카르트가 공격하든 하지 않았든 그를 해치려는 자는 내게도 적이었다.

“블랑세. 자루 잘 보관하고 있어 줘.”

“응.”

블랑세와 미랑은 보호 마법을 걸고 제자리에서 기다렸다. 나는 에카르트와 함께 섰다. 이 군단을 이끄는 사람은 엔티 후작. 마법사 가문이었다.

“후작. 설명하시죠.”

“전염병이 돌고 있다는 제보가 들렸습니다. 공작께서 신고한 내역이 없기에 조사를 위해 나왔죠.”

조사를 위해 공격에 특화된 마법사들을 데리고 온다고? 웃기지도 않았다.

“전염병이었다면 보고했을 겁니다.”

“어쨌든 안으로 들어가 한번 조사해 봅시다.”

“누구에게 제보받았죠?”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어쨌든 성문을 개방하시죠.”

당연하지만 나는 후작의 뜻에 따르지 않을 것이다.

“엔티 후작. 적어도 저는 늘 황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후작의 단독적인 결정인지 의심스럽군요.”

“루솔릿 공작께서는 피해망상이 있습니까?”

“겪었던 일이 많아서요.”

“황후 폐하의 인장이 찍힌 종이도 갖고 왔습니다.”

말하자면 수색영장 같은 역할을 했다.

“보여 주시죠.”

내가 요구하자 그는 귀찮은 티를 내며 품에서 둘둘 말린 종이 한 장을 꺼내 내게 건넸다.

나는 일부러 종이를 느슨히 받아들였고 후작이 내 수작을 눈치채기 전. 정신을 집중하고 바람을 일으켜 종이를 날려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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