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블랑세에게 물어봤어요! 그리고 만약이라고 했잖아요.”
“만약이라도 안 됩니다.”
결국 나는 에카르트를 달래 주느라 블랑세에게 답을 듣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그저 허허 웃은 후 미랑을 향해 명령했다.
“남부 검문소를 지나 타르 공국으로 갈 거예요. 최대한 눈에 안 띄게 가 주세요.”
“미인 두 명을 모시는 건 영광일세. 요정 같도다!”
미랑이 사심을 드러내자 나는 그의 갈기를 한 움큼 쥐고 속삭였다.
“쓸데없는 소리 하면 중성화 수술을 예약하겠어요.”
“시, 신령 모독이네!”
“신령이면 신령답게 성스럽게 행동해요.”
미랑은 블랑세의 환심을 사려는지 귀여운 여우인 척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블랑세는 미랑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내게 관심을 돌렸다.
“시엘. 네가 여우귀 머리띠를 쓴 모습이 보고 싶어졌어. 내 다음 생일에는 그런 이벤트를 기대해도 되겠지?”
“…….”
대체 어떻게 보면 여우를 보고 그런 이상한 상상을 하는지.
“엘린. 제가 여우, 다람쥐, 토끼, 호랑이, 강아지, 고양이 귀를 다 준비해 두지요. 물론 제게만 보여 주셔야 합니다.”
에카르트도 그런 취향이었던가. 내가 두 변태를 내버려 두고 미랑의 위에 올랐다.
그러자 따라서 앉은 블랑세가 나를 끌어안더니 허리를 만지작거렸다.
“…블랑세. 네가 앞에 탈래?”
“아니. 나는 시엘의 뒤가 좋아.”
그러자 에카르트는 주먹을 꽉 쥐고 간신히 화를 참았다.
“저 여자는 저 짐승이 물어서 데려가는 게 좋을 듯합니다.”
“하아. 출발할게요. 에카르트는 공작령을 잘 지키고 있어요.”
“잠시만요. 중요한 걸 잊으셨군요.”
“네?”
에카르트가 무릎을 굽히고 허리를 숙이더니 내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아까 키스를 나눈 거로는 모자란 모양이었다. 내조까지 타고난 일등 신랑감이었다.
“다녀오십시오. 쥐새끼 한 마리 들어오지 못하게 지키고 있겠습니다.”
“고마워요.”
에카르트와 공작가 고용인들이 배웅하기 위해 함께 와 줬다. 이제는 내가 지켜야 할, 그리고 나를 지켜 주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 생각에 어딘가 애틋함이 생겼다.
‘치료제를 구해 온 다음에는 더 영지를 번영시키겠어.’
에카르트에게 공국을 받아서 왕이 되었고 다른 마땅한 후계자가 없어 공작이 되었으나 이제는 내가 이끌어 가야 할 곳.
저물어 가던 루솔릿 공작령을 그 어느 땅보다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겠다.
나는 모두에게 가볍게 손을 흔들고 미랑의 목덜미 털을 살짝 잡아당겨 출발시켰다.
***
미랑이 열심히 달린 덕분에 우리는 빠르게 남부를 지나 타르 공국에 도착했다. 공국 입구를 지키던 문지기가 깍듯하게 인사했다.
“어서 오십시오, 공왕님!”
“수고가 많군요.”
문지기는 아직 여우 상태로 남은 미랑을 신기해했다. 검문소 통로를 지나며 미랑이 쫑알거렸다.
“광장에서 맛있는 냄새가 나는구나. 아직 돌려보내지 말아 다오!”
이런 쓸데없는 이야기나 하는 신령일 뿐인데 말이다.
“그럼 사람으로 변신하세요.”
“알았도다!”
미랑은 좀 더 가벼운 옷차림이 되었다.
공국은 이전보다 더 활력이 돌았다. 블랑세는 광장을 이리저리 둘러보고 미랑은 열대 과일을 보며 침을 삼켰다.
광장에서 시인 한 명이 기타처럼 생긴 악기로 연주를 하고 있었다.
“꽃은 꿈을 꾸고 달은 노래하네. 잘 자라. 별을 닮은 아이야.”
타르 공국의 자장가였다. 블랑세는 그 노래를 듣다가, 다음 멜로디를 따라 불렀다.
“…어떻게 알고 있지?”
그녀가 자신의 입술을 매만졌다.
그때 미랑이 배고프다고 찡찡거리기 시작했다.
“블랑세. 뭐 먹고 갈까?”
“응.”
“좋은 생각이로구나!”
나는 블랑세와 미랑을 데리고 근처의 살롱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십시오.”
우리가 자리에 앉자 나이가 지긋한 여자 한 명이 다가와 메뉴판을 내려놓았다. 블랑세와 미랑은 메뉴판을 보고 이것저것 가리키며 쫑알거렸다.
“나는 오렌지에이드, 올리브 치아바타, 샌드위치!”
“사 다오. 모카라떼, 딸기 타르트, 메이플 시럽 케이크….”
신령 입맛이 정말 세속적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내가 먹을 것 몇 가지를 추가해 주문했다. 음식이 나오길 기다리는 동안 블랑세가 옛날이야기를 꺼냈다.
“시엘. 성전에 있던 때 기억나? 네가 우유를 얼린 후 시럽을 뿌려서 만든 빙수, 맛있었는데.”
“아, 그거! 돌아가면 해 먹자.”
“나도 먹고 싶구나.”
나는 미랑의 말을 한 귀로 흘려들으며 그가 아름다운 추억 사이로 끼어들 여지를 제거했다.
이윽고 아까 메뉴판을 가져간 직원이 음식을 하나씩 갖고 나왔다. 테이블 위에 식사가 잔뜩 차려지고 그녀는 한 번 더 블랑세를 훔쳐보다 꾸벅 고개를 숙이고 돌아갔다.
“시엘. 아까 그 할머니, 내 얼굴을 빤히 보던데.”
“아.”
아마 블랑세를 보고 선대 공왕 부부를 떠올렸을지 모른다.
‘만약 블랑세가 타르 공국의 공주라면 앞으로 어쩌지?’
일단 타르 공국의 체계는 잡아 두고 델이 보좌관으로서 역할을 수행하는 상황.
지금의 나는 상징적인 존재였고 권력에 큰 욕심도 두지 않았다. 국민들 역시 정통성을 갖춘 블랑세를 환영할지 모른다.
‘하지만 블랑세가 여기 남는다면… 우리가 지금처럼 자주 보지는 못하겠지.’
“시엘. 음료 미지근해지겠다.”
“아, 그러게.”
내가 음료를 홀짝이자 블랑세는 또 농담을 했다.
“시엘도 다른 사람들이 나 보는 거 싫어?”
“뭐?”
“어느새 나를 독점하고 싶어졌구나. 후후. 역시 시엘도 나를 못 잊-”
“에휴. 다 먹었으면 가자.”
“잠깐 기다리게!”
미랑은 포크 두 개를 번갈아 가며 팬케이크를 해치웠다.
우리는 수인족이 있는 산맥으로 갔다. 산맥은 계절감을 자랑하듯이 꽃들이 화려하게 폈고 이따금 노랫소리가 들렸다.
“어서 오세요, 공왕님.”
수인족 족장은 급하게 나를 맞이했다.
“전에 주신 팔찌로 신령님도 불러냈어요.”
“세상에!”
미랑은 우쭐해졌다. 나는 그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은 이따 따로 주기로 하고 본론을 언급했다.
“오늘은 내 영지인 루솔릿 공작령에 문제가 생겨서… 타르 열매를 구하기 위해서 왔어요.”
“아, 네. 넉넉하게 준비해 드릴게요.”
족장은 블랑세에게도 은근히 관심을 보였다.
“그리고 이쪽은 블랑세, 제 친구예요.”
“반가워요, 블랑세 양.”
“환영해 주셔서 감사해요.”
둘은 서로 격식을 갖춰 인사했다.
그때 갈색 머리 청년이 꼬리를 흔들며 달려왔다. 샤사였다. 키가 그새 한 뼘은 더 크고 인상도 또렷해져서 조금 낯설게 느껴졌다. 그의 뒤로는 자석처럼 샤를이 따라왔다.
“인간! 오랜만이구나. 이분은 서… 서, 설마 수호 신령님?!”
“그렇다. 이 인간이 나를 소환하였지.”
“오오! 여러 능력이 있다고 들었는데. 시든 꽃도 살리신다고 들었어요.”
나는 미랑의 인권, 아니, 신권을 위해서 겁이 많다거나 말처럼 타고 다닐 수 있다는 이야기 등은 차마 하지 않기로 했다.
‘착해라. 나라면 왜 그동안 나타나지 않았냐고 원망했을 텐데.’
미랑이 어깨를 으쓱이며 무용담을 자랑하고 결국 샤사마저 지쳐 갈 때. 나는 샤사에게 물어보았다.
“샤사, 샤를. 요즘엔 어떻게 지내?”
“도서관에서 사서 일도 돕고 여러 책도 읽고 있어.”
“저도 글을 배우고 있어요.”
마을 일에 참여하는 수인족에게 도서관을 무료로 개방했다. 샤를은 이빨이 났다며 이도 보여줬다.
“잘했어.”
나는 샤를을 쓰다듬어 주었다. 샤사는 내 손을 빤히 보다가 말했다.
“그런데 공왕. 그 반지는 뭐야?”
“에카르트와 교제하게 되었어. 같이 왔던 검은 머리 남자 기억하지?”
“아아, 알지.”
그동안 신나게 떠들던 샤사의 꼬리가 축 내려갔다.
그때 족장이 다가와서 말했다.
“공왕님, 타르 열매를 수집하고 있습니다. 혹시 그동안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블랑세 님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
내가 블랑세를 바라보자 고개를 끄덕였다. 미랑과 샤사, 샤를은 눈치껏 자리를 비켜 줬다.
“블랑세 님은 제국분이신가요?”
“네. 어렸을 때부터 제국에서 자랐어요.”
“혹시 부모님께서는….”
“몰라요. 바구니에 저를 넣고 신전 문 앞에 두고 간 것 같아요.”
“그전의 기억은 없으시겠군요.”
“네. 갓난아기였으니까요.”
“혹시 그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기를 원하신다면 제가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족장이 뭔가 안다는 느낌이 들었다. 블랑세가 정중하게 수락했다.
족장은 우리를 납작한 바위가 있는 나무로 데려갔다.
“이 나무 아래에서 특별한 잎을 먹고 잠들면 무의식을 떠올린다고 전해집니다. 수인족의 주술이지요.”
“안전한가요?”
“네. 깨어났을 때 가벼운 두통이 몇 초간 있는 것 외에 별다른 부작용은 없습니다.”
하지만 나쁜 기억을 떠올린다면 괴로울 텐데. 그래도 이미 마음은 정해졌는지 블랑세는 족장이 내밀은 잎을 씹어 삼켰다. 쓴맛인지 인상을 잠시 찌푸리고는 물어보았다.
“혹시 시엘 손잡고 있어도 되나요?”
“네. 영향은 없습니다.”
족장은 한창 좋을 때의 청춘을 바라보듯이 훈훈한 미소를 지었다. 부끄럽게 진짜! 그러면서도 나는 반지를 끼지 않은 손을 블랑세에게 내밀었다.
블랑세가 내 손을 잡고 눈을 감았다. 족장은 주문을 읊기 시작했고… 블랑세는 무의식 속으로 빠져들었다.
***
“꽃은 꿈을 꾸고 달은 노래하네. 잘 자라. 별을 닮은 아이야….”
작은 침대 위에는 동물 모빌이 돌아가고 있었다. 다정한 파란색 눈의 여자와 남자가 자신을 내려다보았다. 여자가 모빌을 돌려주며 말했다.
“여보. 이름은 뭐라고 지을까?”
“눈이 반짝거리니 초롱이가 어때?”
“당신에게 작명을 맡기면 안 되겠어.”
부부는 사이가 좋아 보였다. 남자가 따뜻한 손으로 블랑세를 안아 들었다. 포근한 감촉이 전해졌다.
따뜻한 기억은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선대 공왕 부부는 바크 풀을 먹고 병에 걸렸다.
공왕은 부군을 떠나보내고 해독제에 대한 가설을 세웠다.
그리고 블랑세에게도 타르 열매를 먹였다.
“앞으로 바크 풀을 먹더라도 이상이 없겠지.”
하지만 공왕은 이미 여러 합병증으로 병세가 짙어진 상태였기에 죽고 만다. 결국 왕족은 블랑세 혼자 남게 되었다.
당시 보좌관이던 빌론은 연구 일지를 품에 챙기고 선대 공왕의 죽음을 알렸다.
빌론은 공왕 부부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뒤로는 블랑세를 제거하고 자신이 즉위할 속셈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빌론이 블랑세의 방을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