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단장, 이야기를 나누죠.”
“네.”
황후의 부름에 단장이 긴장한 목소리로 고개를 숙였다.
둘은 시종들이 없고 인적이 드문 복도로 갔다. 소리를 차단하는 마법 장막이 둘을 감쌌다. 단장은 그 벽의 출구를 찾듯이 불안하게 바라보았다.
“단장. 다시 성전 업무로 복귀하는 게 어때요? 폐하의 차도가 없어 보이는데.”
“…….”
“성전에서 바크 씨앗과 풀을 구해 와요. 연구용으로 보관하던 것들이 있겠지.”
단장의 눈빛이 흔들렸다. 아렌다가 굳이 독초를 요구하는 이유는 따로 있을 테니까.
“황후 폐하. 이전에 타르 공국에서도 바크 풀을 재배했습니다. 당시에는 전염병이라고 생각했지만… 원인은 바크 풀의 독성 때문이었죠.”
대부분 독성에 대한 면역이 없기에 섭취할 경우 일주일 후부터 증상이 나타나 결국 사망까지 이르는 위독한 작물이었다.
그러나 아렌다는 단장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날카로운 손톱이 옷을 파고들었다.
“그것도 모를 것 같나? 너를 가르쳐 준 것도, 이 자리에 앉힌 것도 나거늘.”
백마법사 단장의 이름은 카렌.
카렌의 삶도 한때는 잔잔한 물처럼 흘러갔다. 그러다 운이 좋게 시녀로 들어와서 후궁 아렌다의 궁에 배정받았다.
아렌다는 그저 마법을 조금 잘하는 평민이었는데, 황제의 눈에 띄어 입궁하게 되었다.
그럴듯한 연줄도 없었고 궁중 암투조차 겪어 보지 못한, 갓 성인이 된 지극히 평범한 여자.
어떤 시녀들은 아렌다가 단 한 달도 황실 생활을 버티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렌다는 누구의 눈에 띄지도 않으며 지냈다. 아렌다와 카렌은 외딴 황궁에서 조금씩 신뢰를 쌓아 갔다.
어느 날 평소처럼 시중을 드는데 아렌다가 말했다.
“너, 마력이 있구나.”
그 후부터 아렌다는 카렌을 가르쳤다. 아렌다는 카렌의 스승이었고 정신적인 지주가 되었다. 반년 후 아렌다가 다비온을 임신했다.
“아이를 가졌어. 진찰을 받지는 않았지만. 곧 다른 후궁들이 알게 된다면… 내가 표적이 될 거야.”
마냥 순하기만 하던 표정이 확 바뀌었다.
“카렌, 나를 도와줘.”
아렌다는 황후가 되면 카렌을 단장으로 만들겠다고 약조했다.
그렇게 아렌다는 카렌에게 마법을 가르쳐 준 사람이자 감히 꿈꿀 수 없던 미래를 약속한 상대가 되었다.
카렌은 아렌다의 그늘 아래에서 궂은일을 해 왔다.
그렇게 둘은 궁에 스며든 암살자는 물론 총애받던 후궁들까지 전부 정리했다.
하지만 아렌다는 황후가 된 후에도 여전히 주변을 견제했다. 그로도 모자라 이제 황제까지 해치려 했다.
“카렌. 널 대체할 사람은 얼마든 있어. 성전 역시 아예 황실 군대 소속으로 재편하면 그만이지.”
성전에서 백마법사 과정을 수료하고도 소속을 강제하지 않는 건, 황실의 지원을 받기는 해도 어느 정도 독립된 기관이기 때문이었다.
이러다가는 곧 성전까지 완전히 황실에 흡수될 것을 걱정하면서도 카렌은 아직 충성심이 남아서 아렌다의 명령에 따랐다.
카렌은 다음 날 바크 풀 다섯 포기와 씨앗 한 통을 구해다 주었다.
“다인가?”
“네. 이게 전부입니다.”
“흐음, 가 봐.”
아렌다는 카렌을 보내고 잠시 생각했다. 다 자란 풀은 더 이상 없겠지만, 씨앗을 심어서 새로운 풀을 수확하면 되겠지. 다행히도 적당한 장소를 알았다.
‘루솔릿 공작령.’
영지에서 바크 풀이 발견되면 조사에 나서서 책임을 물고 풀도 확보하면 되었다. 그렇다면 마정석까지 황실의 것으로 만들 수 있으리라!
루솔릿 공작령은 최근 구휼미를 인근 벨라 영지에서 충당했다.
벨라 영지는 공작령보다는 경계가 삼엄하지 않았다. 공작령으로 심복을 여러 번 보내기엔 발각될 확률이 있으니 거래 품목에 바크 씨앗을 섞어 보낼 생각이었다.
황후는 가장 충직한 새 모양의 신수에게 명령했다. 노란색 부리가 커다랗기에 안에 많은 것을 담을 수 있었다.
“이 씨앗을 자루 속에 섞거라.”
신수는 충직하게 황후의 명령을 이행했다.
한편 다비온 역시 아렌다를 예의주시했다.
루솔릿 공작령에 이동 마법으로 여러 마법사들을 파견했던 탓에 한동안 이동 마법 재료를 수급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폴의 다리에 편지를 묶어 상황을 전달했다.
- 최근 황실 신수가 동부로 향하는 모습을 목격했습니다. 공식적인 업무가 없음을 확인했습니다. 공작령에 별일이 없는지 확인 부탁드립니다.
하지만 편지는 전해지지 못했다.
***
루솔릿 공작령의 14구역 마을.
귀리 싹이 제법 자라서 밭마다 푸릇한 생명의 빛이 보였다. 농부 한 명이 새싹 귀리를 따서 맛을 보았다.
“벌써 어느 정도 자랐군!”
“품질이 좋아 보여. 신선한 채소 구경 못 한지도 제법 되었지.”
“조금만 먹으라고. 키워야 하니까.”
작은 것에 감사하고 평화로운 하루였다.
***
블랑세가 창문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그녀의 옆으로 다가가자 그녀가 화병에 꽂힌 하얀 장미 꽃잎을 건드리며 말했다.
“시엘. 요즘에 편지가 안 와서 걱정이야. 전하께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지….”
“얼마나 됐는데?”
“나흘.”
조금 길다는 생각이 들 때 에카르트가 끼어들었다.
“엘린. 저 여자, 차였나 본데 어서 다른 짝을 붙여 줍시다. 눈코입과 사지 멀쩡히 잘 달린 인간이면 충분하겠지요.”
설마 블랑세를 걱정하나 싶었는데 말을 끝까지 들어 보니 역시나 아니었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마을에 나가 보기로 했다.
“같이 가!”
“같이 갑시다.”
내가 방을 나가려 하자 블랑세는 내 팔짱을 꽉 꼈다. 그걸 본 에카르트는 내 반대편 팔짱을 끼고는 으르렁거렸다.
아무래도 추운 계절이 오더라도 둘이 함께 있으면 따뜻할 것 같았다.
***
우리는 마차를 세워 두고 양옆이 논과 밭으로 된 길을 걸었다.
“영주민에게 사용하는 말투를 바꿀지 고민이네요. 대부분 귀족은 하대를 하던데 익숙하지는 않아서요.”
“저와 헬라의 대화를 참고하면 도움이 될 겁니다.”
그랬다가는 영지에 주민이 한 명도 남아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저보다 나이가 많지만… 그래도 권위를 세워야 하니 극존칭은 사용하지 않으려고요.”
“현명한 판단입니다. 애초에 아랫사람과는 굳이 많은 대화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무시하면 수락이고, 노려보면 거절이지요. 웬만하면 눈치껏 알아먹게 두십시오.”
“아, 네. 좋은 충고 고맙네요.”
“뭘요. 또 상의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뭐든 말씀하십시오.”
비꼰 건데 그는 또 진심으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영지마다 분위기는 다르다. 규모가 작은 영지는 영주에게 살갑게 말을 붙이는 평민들도 있었지만 그동안 루솔릿 공작령의 분위기는 그렇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등장하자 모두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고개를 숙여 예의를 갖췄다.
“공작님. 14구역을 살피러 와 주셔서 영광입니다!”
마을 대표 역할을 하는 남자 한 명이 수줍게 인사했다.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데… 나는 헛기침을 하고 근엄하게 말했다.
“고생이 많군. 마을 상황은 어떤가?”
“공작님이 계시기에 걱정할 게 하나도 없답니다.”
“앞으로도 힘써 주게.”
내가 근엄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오히려 남자의 얼굴은 붉어졌다. 마을을 계속 순찰하며 나는 에카르트와 눈짓을 주고받았다.
‘저 안 어색했나요?’
‘네. 잘했습니다.’
계속 엄격, 근엄, 진지한 표정으로 걷던 그때. 겨우 네 살배기로 보이는 아이 한 명이 다가왔다.
“공장님! 안녕하세요.”
“응, 안녕.”
아이는 내가 인사를 받아 줘서 기뻐하더니 찻잔을 내밀었다.
“귀리차를 만들었는데 드시겠어요?”
“귀리차?”
“네! 시원해요.”
아이가 해맑게 내밀었지만 나는 선뜻 받을 수 없었다.
아무리 호의라고 해도 영주는 영주민에게 대접받지 않는다. 독살 위험과 영주민 간의 갈등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아무래도 아직 어려서 그런 규칙을 잘 모르는 듯했다.
“죄송합니다, 공작님! 데리고 가서 교육시키겠습니다.”
부모로 보이는 남자 한 명이 엄하게 아이의 손을 잡아끌었다.
아이는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지 못하고 어리둥절했다. 게다가 이미 가져온 것을 거절하게 되어 다소 미안하던 그때. 블랑세가 상냥하게 미소 지으며 나섰다.
“공작님은 이미 드셔서. 대신 내가 마셔도 될까?”
“그럼요, 엉니!”
남자가 블랑세와 우리에게 감사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요.”
“고마워.”
차를 마시던 블랑세는 뭔가 맛을 음미하듯이 입안에 오래 머금고 있었다. 그녀는 물컵을 비우자 아이는 뿌듯한 얼굴로 돌아갔다. 영주민도 다시 일을 시작하러 떠났다.
우리는 마저 순찰을 돌았다. 블랑세는 직접 밭에 들어가서 수확물을 관찰하기까지 했다. 그렇게 꼼꼼히 볼 필요가 있나 싶었지만 몇 포기는 직접 꺾어 가져왔다.
문제는 공작성으로 들어오고 나서 발생했다.
“시엘. 아까 그 차, 귀리로 끓였다고 했지?”
“응.”
“문제가 있었어. 독이었거든.”
“뭐?!”
이미 마신 지 한참 시간이 지났지만 나는 블랑세의 입안에 검지를 집어넣어 속을 게워 내게 하려고 했다.
내 의도를 알아챈 에카르트가 손가락을 감싸 쥐고는 먼저 자신의 입술에 가져다 댔다.
“저를 저 여자와 간접키스 시키면 안 됩니다. 혼자 토하게 두십시오. 아무거나 주워 먹은 게 잘못입니다.”
“이럴 때가 아니에요!”
내가 그와 옥신각신하는 사이 블랑세가 소용없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소용없어. 지금 당장 증세가 나타나지는 않으니까. 아이가 범인 같지도 않고.”
“독이 뭔지 알겠어?”
“응. 짐작 가는 게 하나 있어.”
그녀는 내게 풀 한 포기를 내밀었다.
“귀리잖아.”
“자세히 봐.”
귀리와 달리 잎맥이 좀 더 복잡하게 나 있었다.
“바크 풀이구나. 대체 이게 왜 여기에?”
사람에 따라 가벼운 두통이나 복통으로 시작해서 심하면 사망에 이르는 독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