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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물 조연은 도망치고 싶다-99화 (99/115)

#99화

“블랑세 양요.”

다비온은 단 몇 초도 망설이지 않고 답했다.

“황후 폐하는?”

“어머니는 황실 신하들이 구하면 됩니다.”

“저를 지켜 줄 수 있는지 궁금했어요.”

“블랑세. 당연히 지키겠습니다.”

어머니가 이렇게 된 데에는 그녀를 외부 세력으로부터 지키지 않던 아버지와 능력이 부족해서 걱정을 끼치는 자신의 탓도 있다고 다비온은 생각했다.

만약 블랑세가 자신의 연인이 되어 주면 그녀가 피를 묻히지 않고도 탄탄한 입지를 유지하겠다.

“물론 전하의 그런 마음 이해해요. 하지만 어느 하나를 선택할 때도 있어요.”

“어느 하나라.”

다비온이 앞으로 닥칠 모든 파도를 막아 주지는 못할 것이다.

“전하를 이전에 지켜 준 사람과 앞으로 전하가 지켜야 할 사람. 효심과 우정. 그렇게 마음으로 판단하려니 어렵죠. 하지만 올바른 것과 올바르지 않은 것. 그건 간단히 구분할 수 있어요.”

블랑세는 상냥하지만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한편 나는 담벼락 뒤에서 블랑세가 다비온과 데이트를 하는 현장을 엿보았다.

블랑세는 다비온에게 웃으며 영양가 없는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리고 에카르트는 주먹을 꽉 쥐고 그 말을 요약해 전해 주고 있었다.

“저것 보십시오, 엘린. 저놈을 만나고서도 당신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습니다. 뭐? 당신의 활약이 앞으로도 기대된다니. 그걸 왜 저 여자가 기대한답니까. 당신이 너무 사랑스럽다니! 그건 저잣거리의 개도 다 알 만한 이야기입니다.”

“…저도 당신에게 블랑세 이야기를 하잖아요.”

“바로 그게 문제란 겁니다. 둘의 사이는 심해어가 살 정도로 깊군요.”

에카르트는 단둘이 남았는데도 또 집착 시동을 걸었다.

***

해 질 녘 수도 골목. 불콰하게 취한 남자 한 명이 비틀거리며 길을 지났다.

눈치챌 틈도 없이 손 하나가 남자를 벽으로 잡아당겼다.

“마정석까지….”

못마땅하게 중얼거리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런 어둡고 외진 골목가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 바로 황후 아렌다였다. 이윽고 소리도 없이 한 번 더 빛이 반짝였다. 처음부터 아무도 없던 것처럼 골목은 조용했다.

***

황실의 지하 감옥.

라멜은 냄새나는 모포 한 장이 깔린 감옥 안에서 벌벌 떨었다. 차라리 하늘이라도 볼 수 있는 빈민가가 낫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와중에 재판이 끝나고 시엘리나가 한 번 더 찾아와서 한 말이 생각났다.

“반성의 여지를 충분히 보여 주면 다시 재판을 받도록 해 줄게. 아마 10년간의 형을 선고받을 거야. 나가서 어떻게 살지 생각하면서 죗값을 치르면 돼.”

“10년?”

“긴 시간처럼 느껴지겠지. 그래도 그 후에도 수십 년을 더 살아가는걸.”

시엘리나와 에카르트는 그 잘난 마법 때문에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젊을 것이다.

하지만 평범한 사람들은 늙고 라멜은 절대 추하게 살아가고 싶지 않았다. 라멜은 꺼지라고 했고 시엘리나는 말없이 나갔다.

‘또 가르치려고 들었어. 주제도 모르고!’

씩씩거리며 분을 억누르던 그때 멀리서 기괴한 비명이 들렸다.

‘리타?’

혹시라도 리타의 목소리인가 싶어서 귀를 쫑긋 세웠다. 예민하게 감각을 곤두세우던 그때 쥐 한 마리가 발을 스치고 지나갔다.

“꺄악!”

“입 다물어!”

옥문을 지키던 여자 기사가 주먹으로 창살을 쾅쾅 두드렸다.

“흐, 흐윽.”

공녀가 된 후 누구에게도 이런 형편없는 취급을 받아 본 적 없었다.

깨끗하고 따뜻한 보금자리에는 맛있는 음식과 화려한 물건이 가득했는데!

라멜은 구석으로 가 쭈그리고 앉아,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한참 흐느꼈다. 무엇보다 가장 걱정되는 건 리타의 안전이었다.

‘리타는 괜찮은가? 고문당하는 거 아니겠지?’

훌쩍이던 그때 누군가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 주인은 아렌다였다. 그녀는 감옥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화려한 옷을 입어서 마치 그 자체로 빛이 난다는 착각이 들었다.

“화, 황후 폐하.”

“예를 갖춰라!”

“황후 폐하, 황후 폐하!”

기사가 호통쳤지만 라멜은 창살로 가까이 다가가서 무릎을 꿇었다.

아렌다는 라멜과 이야기할 필요를 느끼고 일부러 감옥을 찾아왔다.

밑바닥까지 추락했을 때 그럴듯한 패를 갖고 있는 사람도 있으니, 쓸모를 다 뽑아내고 사형에 처해도 늦지 않았다.

그런 아렌다의 속뜻도 모르고 라멜은 희망을 느끼며 간곡히 부탁했다.

“페하, 리타를 살려 주세요. 우리 리타는 그럴 애가 아니에요.”

“닥쳐! 범죄자 따위가 감히 황후 폐하께 부탁을 하려 들다니!”

“제발, 제발요.”

기사가 창살을 걷어차며 한 번 더 으름장을 놓았다.

아렌다는 묘한 흥미를 느꼈다. 그저 자기 잇속만 챙기는 귀족 영애일 줄 알았는데 동생을 구해 달라고 청하다니.

“잠시 공녀와 이야기를 나누겠다. 물러가 보도록.”

“존명.”

기사가 명령을 따라 멀찍이 떨어지자 아렌다는 지팡이를 꺼내 마법 장막을 만들었다.

장벽 밖으로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는 특수한 마법이었다. 그러자 라멜은 창살을 붙들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제 동생, 정말 열심히 살았어요. 성실하게 공부만 하다가 갑자기 엇나갔을 뿐이에요.”

“리타를 그렇게 아끼나요?”

“네. 제가 돌봐야 해요. 그 애를 챙겨 줄 사람은… 아무도 없거든요.”

아렌다는 묘한 동질감을 느끼고 마음이 쓰였다. 삐뚤어진 애정이라 하더라도 라멜은 마치 어머니처럼 리타를 챙기고 있었다.

“생각해 보죠.”

“자비로우신 황후 폐하! 감사합니다.”

라멜은 리타가 아버지가 같은 친동생이 아니라는 말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렇게 아꼈는데 그럴 리 없다. 시엘리나, 그 벌레처럼 불순물일 리 없었다!

그랬기에 여전히 리타를 위해 희생할 수 있었다.

***

아렌다는 다른 감옥으로 걸음을 옮겼다. 라멜이나 루솔릿 공작 부부가 투옥된 곳보다 더욱 보안이 삼엄했고, 특수한 결계가 걸려서 황족만 출입할 수 있는 감옥이었다.

리타는 복잡한 마법 술식과 사슬에 이중 삼중으로 묶여 있었다.

“나는 악마의 힘을 사용했어! 그 해충 따위는 해내지 못한 업적을 이뤘으니 나의 승리였다고.”

그는 계속 같은 말을 계속 중얼거리고 있었다. 악마의 강력한 기운이 아직도 손에 남아 있는 기분이었고 여전히 흥분이 가라앉지 않아 미친 듯이 웃었다.

아렌다는 리타가 내뿜는 광기를 덤덤하게 바라보았다.

“공자.”

“히힉!”

“리타!”

“…황후 폐하?”

리타는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입가의 미소를 천천히 거두었다.

“여기까지 무슨 일로.”

“공자는 재판장에서 범행을 부인하지 않더군요.”

“그야 제가 한 일이니까요!”

“하아.”

“저의 자랑스러운 업적은 널리 알려질 겁니다. 내가 악마를 불러내려고 했다는 사실이 널리 퍼지게 하세요. 시인들이 노래하고 배우들이 연극하게 하세요. 전설로 남게 하란 말입니다!”

“아아, 아이들은 왜 자존심도 강하고 엄마의 마음도 몰라주는 걸까?”

아렌다가 푸념하듯이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치기 어리고 근시안적인 행동이었어요. 살아가며 실력을 증명할 기회가 얼마나 많은데. 고작 한 번으로 시엘리나를 뛰어넘었다고 착각했다면.”

“…….”

“오산이야. 공자가 불러내려던 악마도 결국 시엘리나가 퇴치했으니 말이지.”

아렌다는 이제 회색빛에 가까운 탁한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고 말했다.

리타의 자존심을 건드렸으니 이제 달콤한 말을 던질 차례였다.

“당신은 지하에서 썩기 아까운 인재예요.”

“…….”

“그러니 기회를 주지. 공자의 실력을 증명해 봐요. 악마의 힘을 불러냈다면 강한 힘을 얻을 방법도 알겠죠. 성에 안 찰지도 모르지만 소악마도 남아 있고.”

“폐하께서는 왜 그 힘이 필요하시죠?”

“공자의 마법을 세상에 보여 줄 기회니까.”

“어째서 그 해충이 아닌 제게 이런 부탁을.”

“마법을 발견한 지 어언 수백 년. 대부분의 마법사는 기존의 마법을 따라가기도 벅차지만, 공자는 새로운 시도를 해내려 하죠. 제국에는 그런 인재도 필요한 법.”

‘그 야망을 나를 위하여, 아니. 다비온을 위하여 쓰거라!’

리타가 라멜을 부추겼듯 황후는 리타를 회유했다. 다비온을 위한 일이지만 리타의 실력을 증명할 일인 것처럼, 자신의 욕망을 타자의 욕망인 것처럼 만들었다.

사실 시엘리나와 블랑세가 협조하길 기다려도 되었다.

하지만 결론적으론 모두를 복속시키려는 생각이니 경쟁 구도를 만들어도 좋으리라.

‘라멜과 리타에게는 면죄부를 사용해 석방한다고 회유를, 시엘리나와 블랑세에게는 달의 꽃을 준다는 협박을.’

완벽한 계획이었다.

그날 황후는 희귀한 재료들을 가져와 리타에게 보여 줬다.

“재료는 이 정도면 충분하겠죠.”

“역시 황실이군요.”

속박이 풀린 리타는 여러 희귀한 재료를 보고 히죽히죽 이죽거리는 미소 지었다.

며칠간 리타는 분주하게 여러 술식을 조합했다. 그리고 뭔가 깨달은 듯이 손톱보다도 작은 씨앗을 집어 들고는 냄새를 맡아 보았다.

“폐하, 이건 뭐죠?”

“바크 풀의 씨앗. 먹지 마세요. 해독제가 필요하니까.”

리타는 미리 만들어 놓은 용액 안에 씨앗을 넣었다. 용액의 색이 짙은 보라색으로 순식간에 뒤바뀌며 흘러넘쳤다.

“마정석과 일정한 용량으로 조합하니 강하게 반응하는군요! 독성을 정제한다면 신체 능력을 크게 향상시키겠어요.”

“그래요? 부작용은.”

“일단 시험해 봐야 압니다. 바크 풀의 줄기를 가져오세요. 건조된 게 아니라 갓 재배한 싱싱한 잎으로!”

지시하는 말투가 거슬리기는 해도 실력은 확실했으니. 아렌다는 기다리라고 답했다. 바크 풀은 성전에서 보관하고 있었다.

***

아렌다는 종종 정원을 찾아 황제의 화병에 둘 꽃을 골랐다. 뒤따르는 시녀 한 명이 아렌다의 손길이 닿은 꽃들을 따서 바구니에 담았다. 시녀가 하얀 장미를 따려고 할 때.

“그거 말고.”

아렌다는 다른 장미 한 송이를 지그시 바라봤다.

“저것이 좋겠구나. 가시를 전부 손질해서 가져오렴.”

그 당돌한 공작을 연상하게 하는 노을화였다.

아렌다가 꽃다발을 들고 황제의 침상으로 향했다. 침상은 줄곧 백마법사 단장이 지키고 있었다. 황제의 상태가 위독하기에 백마법사도 성전보다는 황궁에 있을 때가 잦아졌다.

“폐하께서는 약을 드시고 주무셨습니다.”

“그래요.”

따뜻한 눈빛으로 꽃다발을 협탁 위에 올려 둔 아렌다가 황제의 야윈 손을 잡고 입을 맞췄다.

‘얼마 남지 않았군.’

아렌다는 백마법사 단장에게 차분히 말했다.

“단장, 이야기를 나누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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