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피폐물 조연은 도망치고 싶다-98화 (98/115)

#98화

“네?!”

“루솔릿 공작가의 집사였던 파빌이 남작령 광장에서 활개를 쳤다죠.”

“모릅니다. 제 영지에서 그런 일이 있었다니 유감이군요.”

“유감이라. 저도 소남작이 어디 절벽에서 떨어지더라도 유감이라고 할게요.”

에카르트가 연관된 일이다 보니 말이 곱게 나오지 않았다. 사색이 된 소남작을 향해 내가 밀어붙였다.

“알고도 방치하신 거 알아요. 제가 올 때도 신분을 확인했으면서 수배 중이던 파빌을 통과시켰다고요?”

“크흠.”

“이전에 무도회에서 두 번 참지는 않는다고 했을 터. 소문 정정과 피해 보상을 요구합니다.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이전의 일도 다시 짚고 넘어가겠어요.”

“얼마…나?”

“천만 니케.”

“천, 천만 니케?”

“네. 공작령 법률가와 상의한 금액이에요. 금전을 지불하기 어려우면 몸으로 갚든가.”

결국 아리타 소남작은 합의금을 두둑이 물어주게 되었다.

우리는 합의금 일부를 황실과 친화적으로 보이기 위해 제국에 기부하고, 공작령의 보육 시설에 사용하기로 했다. 나와 에카르트는 여러 시설을 돌며 눈도장을 찍었다.

“크, 크로덴 공작님께서 주신다고요?”

“네. 익명으로 기부하기를 원하셨어요.”

물론 말만 그렇게 하고 니나를 시켜 그의 선행을 퍼뜨렸다. 영주민들은 더욱 감동했다.

“묵묵히 북부를 지켜 오셔서 기부도 익명으로 하셨군. 퇴역한 기사의 이야기를 들었는데, 은퇴 자금도 평생 먹고살 정도로 챙겨 주셨다지.”

“아무렴, 영주민을 쥐어 짜내는 귀족보다야 훨씬 낫지.”

“그러니 루솔릿 공작님께서도 기꺼이 치료를 맡으신 거 아니겠어?”

계획대로 여론은 에카르트의 인성을 재평가하는 방향으로 흘렀다.

이클립스 기사단은 파빌과 떨거지를 공작성 감옥까지 이송해 각방에 가두었다.

다비온이 고맙게도 처벌 권한을 넘겨준 덕분이다. 나는 헬라와 에카르트를 곁에 두고 의자에 묶인 파빌을 내려다보았다.

“수정구, 마정석으로 만들었던데. 마정석은 어떻게 얻었어?”

“고, 공작성에 리타 님께서 연구하시던 것을 가져왔습니다.”

“치료도 안 받고 도주했으면서 마정석을 챙길 정신이 있었다고?”

내가 지팡이를 마검처럼 만지작거렸다. 사랑하면 닮는다더니 아무래도 에카르트에게 옮은 버릇 같았다.

“무엇보다 연구실은 잠겨 있었을 텐데.”

내 지팡이 끝에 빛이 감돌자 파빌이 겁을 먹었다.

“저, 정말이에요! 그때는 열려 있어서.”

“사실대로 말해, 쓰레기 새끼야! 같잖은 수작으로 감히 에카르트를 건드려?”

나는 지팡이를 왼손에 고쳐 들고 파빌의 얼굴에 마력을 실은 주먹을 날렸다.

의자가 휘청하며 넘어지고 파빌이 악악 비명을 질렀지만 분이 풀리지 않았다. 에카르트가 내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엘린. 이놈을 감시하는 건 제 부하에게 맡기고 잠시 바깥바람을 쐬시지요.”

“짜증나서 더 때리고 싶어요. 이런 쓰레기는 애초에 태어나지 말아야 했는데.”

에카르트는 내가 화내 주는 게 기쁜 모양이었다.

어쨌든 그의 뜻대로 잠시 밖으로 나오자 실라가 새로운 정보를 전해 줬다.

“공작님. 마부에게 들었는데… 파빌이 최근에 창고 구역을 기웃거렸대요. 승마장에도 자주 다녀오고요.”

공작성을 정비하며 그 근처도 얼추 둘러봤지만 텅 비어서 볼 것도 없었는데.

‘하지만 파빌과 관련된 이상 깊이 조사를 해야겠지.’

나는 에카르트와 함께 창고 구역으로 다시 가 보기로 했다.

목재로 지은 창고가 컨테이너처럼 여러 개 놓여 있었다. 에카르트가 그중 하나 앞에 서더니 유심히 관찰했다.

“엘린. 옆면의 창문은 세 개 같습니다. 창문처럼 보이지 않게 해 뒀군요.”

그러더니 마치 과자 봉투를 뜯듯 덧댄 판자를 맨손으로 뜯어냈다. 창고로 들어가 보니 안쪽의 창문은 정확히 단 두 개였다.

“밖에서 보던 것보다 좁아 보이네요. 에카르트, 관찰력이 좋네요.”

“감사합니다.”

에카르트가 막혀 있는 벽면을 두드리자 안쪽에 빈 소리가 났다.

“이것도 뜯을까요?”

“맨손으로요? 다치면 어쩌게요!”

“당신이 치료해 주겠지요.”

살인적인 미소와 함께 에카르트가 벽을 주먹으로 쳐서 부쉈다. 나머지도 사람이 들어갈 만큼 뜯어내자 드러난 안쪽의 공간에는… 마정석이 가득 쌓여 있었다.

“세상에.”

우리는 파빌을 감금한 지하로 다시 돌아갔다.

“창고에 있는 마정석. 어디서 얻었지?”

“리, 리타 님이 구매한 거야!”

“리타는 무슨. 내역 있어? 이렇게 많은 양을 어디서 수급했다고.”

“하. 어디서 잘난 척이야!”

순순히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에카르트가 다정하게 말했다.

“엘린. 제가 해결하겠습니다. 잠시만 밖에서 기다리시지요.”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어느 정도 예측이 가면서도 순순히 나는 문밖으로 나가 줬다.

잠시 후 다시 들어와 보니 파빌은 눈물과 콧물을 줄줄 흘리며 에카르트에게 빌고 있었다.

“마정석이 승마장에 매장되어 있다고 합니다. 다른 방에 가둬 둔 놈도 같은 말을 하는지 비교하겠습니다.”

“고문하시게요?”

“글쎄요. 제 몸을 아낀다면 고문하기 전에 털어놓을 거고, 지능이 있었다면 애초에 헛소문도 안 퍼뜨렸겠지요.”

에카르트가 들어가고서 방 안은 무서울 정도로 조용해졌다.

3분도 안 되어서 에카르트가 침착한 모습으로 나왔다. 헬라 역시 아무렇지 않게 검은색 장갑을 갈아 끼웠다.

문 너머로 보인 떨거지는 완전히 넋이 나가 있었는데 말이다.

“파빌 놈과 같은 증언을 하는군요.”

“그래요? 고생했어요. 헬라도요.”

에카르트는 그녀에 대한 칭찬 역시 자신의 몫으로 받아들인 듯 “뭘요.”라고 히죽 미소 지었다.

“그런데 정말… 승마장에 마정석이 있을까요?”

“한번 가 봅시다.”

에카르트는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밖으로 나온 나는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그럼 헬라. 뒤처리를 부탁할게요.”

“네. 돌아오시면 바로 저녁 연회를 즐기실 수 있도록 준비하겠습니다.”

방금까지 고문했으면서 비위가 매우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미랑을 타고 승마장으로 사용하는 언덕을 향해 달렸다. 미랑은 도착하자마자 우리를 내려 주고선 캣닢을 즐기는 고양이처럼 풀밭을 뒹굴었다.

“여기 풀, 너무 부드럽고 좋구나!”

그러다가 코를 풀밭에 대고 킁킁거리더니 앞발로 땅을 파냈다.

“뭔가 묻혀 있군.”

“자기 무덤을 파고 있나 봅니다.”

에카르트는 그를 비웃었고 나는 슬쩍 웃음이 나왔다.

미랑을 갈구는 일에 재미를 붙이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이 들었지만, 그래도 단순히 비꼬는 정도면 죽이려던 이전보다야 많은 발전 아닌가.

에카르트의 버릇이 나빠지게 오냐오냐 쓰다듬는 사이 미랑이 뭔가를 물고 폴짝 뛰어올랐다.

“예쁜 돌이로다!”

“먹지 마요!”

“내가 아무거나 주워 먹는 짐승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냐!”

“뭐 그렇게까지 말하지는 않았어요.”

미랑은 입을 앙다문 채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다가왔다. 그리고 내게 예쁜 돌이라는 그것을 보여 주었다. 에카르트와 나는 그것의 정체를 알아보고 놀랐다.

“정말… 마정석이네요. 그렇죠?”

“네. 그렇습니다.”

“미랑! 이거 얼마나 묻혀 있나요?”

“비슷한 힘이 곳곳에 느껴진다. 이 부근에 전부 매장되었을 것이야.”

그렇다면 다이아몬드 광산보다 더 엄청난 가치인데. 내가 떨떠름해하자 에카르트가 먼저 말했다.

“엘린, 축하합니다.”

“에카르트. 이게 어떻게 된 일이래요?”

“마정석이 자기 있을 곳을 알고 당신이 찾아내길 얌전히 기다렸군요. 제가 마정석이라도 당신의 소유가 되고 싶었을 겁니다.”

“그런….”

“앞으로 할 일은 간단합니다. 부와 권력을 즐기면 됩니다.”

부자에서 더 부자가 되었다는 뜻이다.

나는 승마장에 다른 사람이 함부로 접근하지 못하도록 결계를 걸고, 에카르트와 함께 연회장으로 돌아왔다.

“너무 많은 것을 갖는 게 아닐까요? 작위는 물론 이제 이런 마정석 언덕까지.”

“그중에서 뭐가 제일 마음에 드십니까?”

“에카르트요.”

“당신에겐 세상을 줘도 모자랍니다. 혹여 당신 것을 축내려는 벌레가 있거든 다 제가 퇴치해 드리지요.”

그가 산뜻하게 미소를 지었고 나는 그를 따라서 웃었다.

나는 에카르트가 좋은 말만 듣고 좋은 거만 보고 살면 좋겠다고 바랐다.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지만 그가 그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 주고 싶었다.

“에카르트. 마정석을 어디에 쓸지 생각해 봐야겠어요.”

“의욕 넘치는 모습이 멋지군요. 저 역시 연구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뭔데요?”

“물론 당신과 떨어져 지낼 일은 없겠지만 만약 그런 상황이 오거든 즉각적으로 통신할 수 있는 장치를 만들어 보려고 합니다.”

“대단하네요. 같이 연구해요.”

“물론입니다. 같은 연구실에서요.”

우리는 세상에 둘도 없는 짝처럼 죽이 잘 맞았다.

***

다음 날 다비온이 공작령에 방문했다.

영지에서 광물을 발견하거든 황실에 보고하는 게 관례였고, 그래야 내 재산으로 법적인 보호도 받을 수 있었다.

“루솔릿 공작. 절차에 따라 주셔서 감사합니다. 영지 상황이 정리된 후 그때 처분을 결정하셔도 늦지 않습니다.”

“감사해요.”

“엘린. 감사할 것도 없습니다. 블랑세를 보러 왔을 테니까요. 저놈 시커먼 속은 안 봐도 뻔하니 이리 오시지요.”

에카르트는 황태자가 불순한 뭔가라도 되는 양 나를 보호하듯 감쌌다. 그런 취급이 익숙한 다비온은 반쯤 포기한 눈빛으로 말했다.

“공작. 오늘도 구휼미를 배분한다고 들었습니다만. 함께 봐도 될까요? 사실… 저도 현장을 보고 싶어서요.”

“영주민들 앞에 얼쩡거려서 내 연인의 공을 네 것으로 돌려 추앙받을 셈인가?”

“지, 진정해! 로브를 쓰고 갈게.”

다비온이 에카르트를 어르고 달래며 안심시켰다.

사실 다비온에게는 다른 꿍꿍이가 있었다. 그는 배급 과정을 지켜보는 척하다 슬쩍 다른 길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 자리에는 블랑세가 담벼락에 기대 다비온을 기다리던 중이었다.

“블랑세 양.”

“어머, 이런 우연이 다 있나요?”

둘은 그저 서로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함께 걸으며 다비온은 블랑세에게 좀 더 속 깊은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때론 이렇게밖에 할 수 없는 제가 한심하게 느껴집니다.”

“그렇지 않아요.”

“제 어머니는 저를 위해 희생했습니다.”

다비온은 황후가 그동안 고생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블랑세는 말없이 이야기를 듣다가 물어보았다.

“저와 황후 폐하께서 강에 빠지면 누구를 구하실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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