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다행히 글로리아가 내쫓기기 전에 시엘리나는 늦지 않게 도착해 줬다.
글로리아는 에카르트의 앞에서 쩔쩔매고 있었다.
“이런, 벨라 영애! 어서 와요.”
창문 너머로 마차가 오는 모습을 지켜봤는데 성문 너머로 들어오고 있지 않아서… 뭔가 문제가 생겼나 싶어 니나와 함께 나와 봤더라니. 글로리아가 나의 등장을 격하게 반기며 말했다.
“공작님! 급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네. 안으로 들어요.”
“감사합니다. 저… 전에 맛있게 드신 파이를 만들어 왔어요.”
글로리아가 예쁘게 포장된 파이 상자를 보여 줬다. 니나가 두 손으로 상자를 받아 들려던 그때 냉담한 명령이 들렸다.
“버려.”
“네에?”
“독이 들었을지도 모르지. 엘린, 제가 다른 파이로 맛있게 만들어 드리지요.”
그러자 글로리아는 에카르트의 앞에서 초식동물처럼 떨던 모습은 어디로 가고 콧김을 내뿜었다.
“도, 독이라뇨. 저, 그런 변태 아니에요!”
“변태?”
내가 떨떠름하게 되묻자 글로리아는 열변을 토하기 시작했다.
“네! 성스러운 요리에 어떻게 독을 넣나요? 암살을 그따위로 하는 놈은 틀림없이 예술 작품을 파괴하며 즐거움을 느끼는 이상 성욕자겠죠. 저는 절대 안 그래요!”
“아, 아. 네.”
아무래도 에카르트와 블랑세처럼 이상한 사람이라는 직감이 점점 확신으로 변했다.
“핫. 말이 길어서 죄송해요.”
“괜찮아요.”
“저는 그저 공녀님께서 맛있게 드시는 모습을 보면 흥분할 뿐이라!”
“엘린. 당신 곁에 기분 나쁜 여자가 하나 더 늘었습니다.”
에카르트는 새로운 유해종을 발견한 사람처럼 불쾌한 기색으로 말했다.
나는 적당히 장단을 맞추고 글로리아를 정원으로 안내했다.
그런데 에카르트가 정원 입구까지 졸졸 따라왔다. 기어코 여자들끼리의 대화에 끼고 싶은 모양이었다.
“에카르트. 조금만 기다리고 계세요. 파이 맛있으면 남겨 둘게요.”
“…파이 때문에 그러는 게 아니라.”
“응, 알아요. 그렇지만 저는 성력도 있고 수호신도 있고 당신도 있는걸요. 그리고 바람도 안 피워요.”
나는 에카르트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글로리아는 정원에 가득 피어 있는 신비한 꽃을 바라보며 감탄하다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말했다.
“공작님. 실례지만… 붉은 눈의 까마귀 떼가 제국을 뒤덮을 거라는 이야기 들어 보셨나요?”
“처음 들어요.”
나는 그 까마귀가 누구를 의미하는지 짐작이 갔기에 불쾌해졌다.
“떠돌이 예언자 두 명이 아리타 남작령에서 헛소문을 퍼뜨리고 있대요!”
나는 여러 업무를 처리하느라 관련 없는 영지의 사정은 관심을 두지 못했다.
에카르트를 견제하려는 세력은 꽤 많았다. 그러나 신전의 마법진이 선대 크로덴 공작과 관련 있다는 게 알려진 후 괴소문이 떠돌다니.
“글로리아 양은 그 소문이 얼마나 설득력 있다고 생각하나요?”
“전혀 설득력 없죠! 부군이 될 분께 그런 터무니없는 소문이 돌다니 화가 나요. 그 예언자도 헛소리하고 다녀서 쫄리는지, 예언하고 난 후에는 자취를 감춘대요.”
“그렇다면 신분도 불확실한데 사람들은 무슨 근거로 소문에 흔들리죠?”
“그게… 예언할 때 신비한 빛이 감돈다고 해요.”
“마력?”
“아니. 마력보다 좀 더 강력하대요!”
제국은 신탁을 받지 못한 지 오래되었으니 그렇게 보일 법도 하다.
“게다가 루솔릿 공작령의 사태 역시 예언했다나요.”
그렇다면 공작령의 사정을 잘 아는 사람이었을 수도 있을 터.
“어쨌든 확인해 볼게요. 알려 줘서 고마워요.”
“뭘요! 나중에 시간이 되시거든 제 티파티에도 들러 주세요.”
나는 사교계에 아는 사람도 없고 글로리아가 내게 호감을 가진 이상, 적당한 관계로 지내도 괜찮을 듯했다.
대화를 마치고 정원을 나오는데 그녀가 화들짝 놀랐다. 내 부군이 될 남자가 팔짱을 끼고 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 가 볼게요! 바쁘신 분을 오래 붙잡고 있어 실례가 많았습니다.”
“아, 네. 그럼… 다음에 또 봐요!”
“네네, 꼭요!”
글로리아는 내게 잽싸게 예의를 차리고 니나의 배웅을 받으며 걸어갔다.
나는 해명을 요구하듯 집착남을 바라봤다.
“쓸데없는 놈이 들어갈까 봐 지키고 서 있었을 뿐입니다.”
“아, 네.”
나는 누군가 헛소문을 퍼뜨리는 걸 알게 되어도… 에카르트가 상처받지 않기를 바랐다. 그래서 먼저 듬직하게 말했다.
“…에카르트. 당신을 괴롭히는 사람은 내가 꼭 응징하겠어요.”
“이렇게 든든한 말씀을 하시다니. 저는 오늘도 또 당신에게 반했습니다.”
에카르트는 이토록 순수한 남자인데 말이다!
나는 내 방으로 에카르트와 블랑세를 불러, 아니 어차피 부르지 않아도 둘이 있지만, 이 사태를 알려 줬다.
“응징하실 겁니까?”
“그럼요.”
에카르트의 물음에 내가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그 예언자의 인상을 알려 주었다.
“일단 베일을 쓰고 있어서 정확한 얼굴은 드러나지 않았지만… 굵은 목소리로 봐선 남성 같아. 왼손은 팔꿈치까지 아예 없었대.”
그러자 블랑세가 잠시 생각하더니 뭔가 아는 목소리로 말했다.
“시엘. 짐작 가는 게 있어! 균열이 공작령에 생겨났을 때 말이야….”
블랑세의 말에 따르면 누군가 마수에게 팔을 물렸다. 다비온이 끼어들어 마수를 처치하고 블랑세는 괜찮은지 물어보았다.
“내가 치료해 주려고 했는데 그렇게 중상을 입고는 허둥지둥 떠났어. 얼핏 보기론 마수에게 물린 부위가 팔꿈치까지였지.”
그러자 차를 따라 주던 실라가 조심스레 말했다.
“공작님. 아직 검거하지 못한 고용인이 있어요.”
“리차드는 라멜이 살해했고… 파빌 말이지?”
“네. 이동 마법진 재료가 없는 한 아직 제국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했을 거예요.”
“흐음.”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거짓에는 거짓으로 맞대응할 것이다.
“파빌의 수법을 파악해서 폭로하면 좋을 텐데. 필요하면 이쪽도 소문을 만들어 내도 좋고.”
그러자 실라가 주전자를 내려놓고 당차게 손을 들고 나섰다.
“제가 할게요! 파빌이라면 꼭 제가 응징하고 싶어요. 가짜 예언자인 척하면 되나요?”
“내가 할래.”
블랑세가 생긋 웃으며 여유롭게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내가 앉은 의자에 어떻게든 공간을 만들어 끼어 앉았다.
“나는 시엘도 알다시피 한때 신관이었던 사람이라서.”
“잠깐, 블랑세. 어떻게 할 건데?”
“명색이 공작님인 분께 이런 사사로운 일을 맡길 수 없지. 나와 실라 양이 먼저 가서 해결할 테니, 시엘은 느긋하게 와서 범인을 데려가. 대신 잘하면 상을 줘.”
“상?”
“물질적인 건 전에 받았으니 글쎄. 이번엔 사랑의 뽀뽀가 어떨까? 아니면 그 이상도 좋고.”
진담인지 아닌지 긴가민가한 사이 에카르트가 버럭 고성을 내뱉으며 말했다.
“마음만 아니라 몸도 헤픈-”
“에카르트!”
나는 그를 진정시키기 위해 자리를 옮겨 열심히 머리를 쓰다듬었다.
***
시엘리나의 허락을 받고 블랑세와 실라는 이동 마법으로 아리타 남작령에 도착했다.
‘역시 공작님의 친구분도 능력자구나!’
시엘리나를 향한 실라의 존경심은 한층 더 깊어졌다.
남작령은 마치 수도를 압축한 작은 마을 같았다. 그들은 돌길을 따라 마을 광장으로 갔다.
과일로 저글링을 하거나 노래를 부르는 소규모 서커스단이 있었지만, 사람들은 예언자로 불리는 두 남자 앞에 가장 많이 모여 있었다.
“듣거라. 나는 수십 년 전 몰락한 왕국에서 온 떠돌이 예언자!”
신비로운 빛이 파도처럼 내려오는 베일을 적셔 성스러워 보였다. 게다가 남자는 행성처럼 신비한 색으로 반짝이는 수정구를 들고 있었다.
“특별한 힘이 나를 이곳으로 인도하였노라. 나는 제국의 몰락을 막기 위해서 신이 보낸 사자….”
블랑세는 수정구의 원리를 단숨에 간파했다. 저 신비로운 빛은 마정석을 이용해 다른 술식과 섞어 발생시킨 것이다.
“신이시여. 저의 목소리를 듣고 계시면 응답을!”
수정구에 빛이 모이려 할 때. 블랑세가 주변에 강한 마법을 발생시켜 마력 파장을 교란시켰다. 수정구는 그저 투박한 보석에 불과해져 빛을 잃었다.
“뭐야?”
“신이시여. 부디 계시를 내려 주소서!”
남자는 굴하지 않고 수정구를 꼭 쥐었다. 하지만 여전히 반응이 없자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실라는 모두가 집중할 만한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말했다.
“애초에 저 남자에게 예지력 같은 힘은 없으니까요.”
“없다고?”
“그런 빛은 저도 만들어 낼 수 있어요. 보세요.”
그녀가 남자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고 사람들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서로 비켜 주었다.
블랑세가 실라의 손 근처에 성력으로 된 빛을 만들어 냈다. 일반적인 마법보다 훨씬 더 찬란했고 따뜻함까지 느껴져서 사람들은 홀린 듯 그 빛을 바라보았다.
“이, 이 여자가 사기를 치는 거야! 신의 뜻은 아무나 받는 줄 알아?”
남자가 격하게 부정하며 원래의 목소리를 닮아 갔다. 파빌의 정체를 알아본 실라는 더욱 주저할 게 없어졌다.
“그래요? 그럼 다시 수정구를 사용해 보세요.”
“그게 신의 뜻인데 마음대로 되는 줄 알아?”
“저는 되는데요.”
실라가 가볍게 손목을 비틀자 아까와 달리 이번에는 성스러운 장미 꽃잎이 쏟아져 나왔다. 그것이 행운의 증표라도 되는 양 사람들이 주섬주섬 줍기 시작했다.
“너, 너. 어떻게….”
남자는 씩씩거리더니 급하게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옆에 우두커니 서 있던 다른 남자 역시 도망쳤다.
“저 새끼 도망친다!”
“멈춰! 사기꾼 잡아!”
사람들의 시선이 전부 남자들에게 집중된 순간. 실라는 남자가 두고 간 수정구를 들고 블랑세와 함께 뒷길로 향했다.
한적한 담벼락 아래 실라가 수정구를 꼭 쥐고 한숨을 돌렸다.
“후아. 떨려 죽는 줄 알았어요.”
“실라 양. 잘하던데요.”
“그게… 그놈에게 맞서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다시 하지는 못할 것 같아요.”
그때 누군가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파빌과 그의 부하였다. 파빌은 베일을 걷어치우고 당장이라도 실라를 씹어 먹을 듯한 기세로 말했다.
“너. 여기는 어떻게 온 거야!”
“…왜 크로덴 공작님에 관한 소문을 퍼뜨렸죠?”
“네년 때문에 라멜 님이 내쫓겼어! 내가 가만히 있을 것 같아? 어디서 굴러온 돌이 라멜 님을-”
블랑세는 파빌이 말을 잇기 전. 수면 효과가 있는 용액을 던졌다.
“개소리 나불대지 말고 시엘이 올 때까지 얌전히 있어.”
***
나는 크로덴 공작성에 남아 있던 기사 몇을 이끌고 남작령으로 왔다.
블랑세와 실라가 포획한 파빌과 떨거지의 얼굴을 확인한 후 곧바로 라멜의 추종자인 아리타 소남작과 대면했다.
“아리타 소남작.”
“네, 루솔릿 공작.”
“소남작께서는 삶에 미련이 없나 봐요. 그렇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