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루솔릿 공작님.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바로 헬라였다.
에카르트가 루솔릿 공작령에서 살기를 원해서, 별장이 된 크로덴 공작성은 최소한의 인력만 남기게 되었다. 나는 마침 새로운 집사와 고용인들이 필요했고 말이다.
그래서 부집사에게 인수인계를 마친 후 헬라 역시 루솔릿 공작령으로 와 주었다.
물론 그전에 집착남과 집착녀 때문에 약간의 마찰이 있기는 했다.
“엘린. 다시 생각해도 집사, 하인, 마부, 전부 제가 하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그게 당신도 좋지요?”
“큰일이네요.”
“뭐가 말입니까.”
“고집부리는 모습도 귀여워 보여서요.”
그러자 에카르트는 히죽 미소 지었다. 나는 그 틈을 타서 슬그머니 헬라를 고용하는 서류에 도장을 찍었다.
그러자 그때 블랑세가 불쑥 다가오더니 내게 책을 내밀었다.
“뭐야?”
마법 서적인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가구 카탈로그였다.
“요즘 신혼부부들에게 이런 게 인기가 있대.”
“신혼부부?”
“응! 집은 네가 했으니까 가구는 내가 장만하는 게 당연하잖아?”
다비온과 교류하더라도 나에 대한 집착을 거두지 않겠다는 말이 진심이나 보다.
블랑세의 그런 행동에 에카르트는 카탈로그를 뺏다시피 가져가더니 벽난로에 넣었다.
“에카르트!”
“엘린. 저 여자에게는 개집을 내어 주는 것도 아깝습니다.”
“이미 블랑세가 머물 귀빈실도 마련하기로 했어요.”
“대체 왜.”
블랑세는 거처가 정해지기 전까지 루솔릿 공작성에 있고 싶다고 했다.
괜히 무리해서 다비온과 이어 주거나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하는 대신… 그저 지금까지 그랬던 대로 곁에 있는 거로 충분했다.
그렇게 결론을 내렸으나 에카르트는 다시 내게 캐물어 보았다.
“엘린. 한데 헬라에게 다른 마음이 있는 건 아니겠지요?”
“무슨 마음이요?”
“이전에 그 사람이 좋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언제 그런 말을 했는가 떠올려 보니, 마차에서 실수로 술을 마신 그때를 말하나 보다.
“에카르트, 이리 와 보세요.”
“네.”
“사랑해요.”
내가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춤으로써 질투를 달래 줬다. 그는 언제 심술을 부렸냐는 듯이 아주 너그러워졌다.
***
니나는 엄청난 친화력을 발휘해 루솔릿 공작성에 남아 있던 고용인들과 친해졌다. 업무 역시 금세 익혔음은 물론이다.
“주인님~ 방을 다 정리했어요.”
“니나. 전처럼 불러도 되는데요.”
“아뇨, 무조건 주인님이라고 부를 거예요. 주인님이라고 부르는 게 로망이었어요!”
니나가 과한 충성심을 넘어 조금은 무서울 정도로 호칭을 강조했다.
그녀는 아예 실라와 함께 공작성을 리모델링을 한다 싶게 만져 댔다. 그 덕에 크로덴 공작성만큼이나 이곳도 근사해졌다.
“여기가 주인님의 방이에요. 일단 새 가구로 전부 배치했고요.”
“예쁘네요.”
“주인님이 쓰실 곳인데 당연히 그래야죠! 다 수도에서 제일가는 장인께 맡겼답니다. 저쪽의 침구류도 전부 크로덴 공작가의 단골 업체에서 주문 제작한-”
“너무 좋다!”
블랑세는 내 침대 위에 눕더니 이불을 돌돌 말고는 후후 미소 지었다.
“여기가 시엘이 자게 될 곳….”
“고마워요. 니나, 실라. 이제 다른 곳을 안내해 주세요.”
내가 블랑세를 내버려 두고 나오자 그녀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옆을 지키던 에카르트는 그녀까지 빠져나오기 전에 문을 닫아 버렸다.
“밖에서 잠글 수 있으면 좋겠군요.”
“실라. 집무실을 보여 줄래?”
“넵. 새로 정비한 집무실로 모실게요!”
집무실은 포근하면서도 깔끔했고 두 개의 책상과 의자가 기역 자 모양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벌써부터 영지와 공국에 관련한 서류가 쌓여 있는 게 신경 쓰였지만… 그래도 기쁜 마음으로 일해야지.
“고마워, 실라. 그런데 한 가지만 더 부탁할게. 중앙에 두 명이 앉을 테이블과 소파를 놓아줘.”
“알겠습니다!”
바로 에카르트와 블랑세의 것이었다. 그런데 내 귓가에 익숙한 저음의 목소리가 꽂혔다.
“엘린. 저 여자와 그놈은 맨바닥에서 일해도 되는데 말입니다.”
당연히 지금 있는 책상 중 다른 하나는 집사의 것이건만. 이 남자는 그게 제 자리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러자 어느새 블랑세 역시 내 옆으로 와서 속삭였다.
“나는 무조건 시엘 옆자리야. 시엘, 여기 명패 하나 놓아줘. 사장 같고 근사할 테니까.”
블랑세 역시 헬라의 자리를 이미 제 자리로 취급했다.
그냥 내 개인 집무실을 하나 더 만들까 하면서도. 나는 에카르트와 블랑세가 머물 곳을 보여 달라고 했다.
“네. 이쪽이 크로덴 공작님께서 쓰실 귀빈실이에요!”
실라는 복도로 걸어가 으리으리한 방을 보여 줬다.
공작성 일부를 그대로 가져온 것처럼 모노톤한 벽지와 러그에 센스 있는 장식이 돋보였다. 하지만 정작 이 귀빈실을 사용하게 될 분은 어딘가 불만족스러워 보였다.
“엘린. 우리 각방을 쓰는 겁니까?”
“네?”
“떨어져 있으면 불안합니다. 같은 방을 쓰면 좋을 텐데요.”
“에카르트는 강아지가 아니에요. 게다가 같은 층에다가 거의 바로 옆방인데요.”
“잘 거절했어, 시엘!”
블랑세가 내 머리를 쓱쓱 쓰다듬으며 안 봐도 뻔하다는 듯이 말했다.
“같은 방을 사용하면 손만 잡고 자자고 말할 거야. 손을 잡고 자면 또 다른 짓을 요구하겠지. 사람들 생각하는 게 다 똑같다니까?”
소름이 돋았다. 왜냐하면 그건 블랑세가 내게 했던 짓이기 때문이다. 실라는 얼굴이 붉어져서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블랑세 님이 사용할 방도 안내해 드릴게요. 이쪽입니다.”
바로 내 옆옆 방이었다. 왼쪽에서부터 블랑세의 방, 집무실, 내 방, 에카르트의 방이 이어진 구조였다.
“…실라. 원래 귀빈실이 이렇게 양옆에 두 개나 붙어 있던가?”
“사실 이쪽은 안주인의 서재였어요. 그런데 공작님께서 개조를 허가했다고 하시기에.”
그런 적 없는데. 블랑세는 모른 척하며 방으로 들어가더니 창문을 활짝 열고 발랄하게 말했다.
“어머. 벽을 타고 오른쪽으로 이동하기 딱이네!”
“엘린. 제발 저 인간을 저대로 창문 밖으로 밀치게 허락해 주십시오.”
“실라, 니나. 다른 곳을 보러 가자.”
내가 걸음을 옮기자 에카르트와 블랑세가 졸래졸래 나를 따라왔다.
“여기는 동서쪽 정원이에요!”
동쪽 정원은 리타가 마법을 연습하던 곳이라 그런지 꽃과 나무가 울창한 대신 텅 비어 있었다. 전에는 식물원처럼 넓게 느껴졌는데 이제 내가 사용할 장소로는 좁아 보였다.
“마법을 수련할 좀 더 넓은 장소가 있을까?”
“그렇다면 승마장 쪽을 개조해 볼게요.”
“고마워.”
그 다음으로 둘러본 서쪽 정원은 라멜이 티파티 장소로 사용했었다.
실라는 전에 사용하던 흔적이 남아 있지 않도록 새 꽃과 나무를 옮겨 심고 가제보도 전부 새것으로 바꿨다. 조명까지 달아서 밤이 되면 더 아름다울 것 같았다.
“마음에 들어.”
“뭘요. 진짜 주인을 찾아서 기쁜걸요.”
실라가 수줍게 얼굴을 붉히고 그 순수함에 나까지 미소가 지어졌다. 새로 바뀐 공작 저를 이곳저곳 둘러보았는데… 계속 신경 쓰이던 게 한 가지 있었다.
“그런데 실라.”
“네?”
어느 순간 실라가 다시 자연스럽게 내 하녀가 되었다.
“너는 앞으로… 어떻게 하고 싶어? 원래 동방으로 가고 싶어 했잖아. 한나 님도 만나고 싶다며.”
“흐엉, 공작님. 이름까지 기억하시다뇨!”
그야 한나는 에카르트에게 납치당한 적도 있으니 기억 못 할 리가 없다.
“저는 공작님을 다시 모시게 된 것으로도 만족해요.”
오래전이었지만 실라가 자신의 꿈에 대해 이야기한 게 생생히 기억난다.
순수하고 들떠 있던 모습. 그 열정은 아직도 그녀의 마음속에 남아 있으리라. 그래서 나는 실라의 손을 잡고 말했다.
“실라, 동방으로 갈 준비를 해.”
“네에?”
“나도 너를 돕고 싶어. 유학비나 생활비나 필요한 돈은 전부 지원할게. 학업을 마치고도 여전히 공작령에 남고 싶다면 그때 언제든 돌아와도 되니까.”
그러자 실라가 울먹이기 시작했다.
“제, 제가 한 일에 비해 너무 과분하잖아요!”
“나야말로 그랬어.”
“흐엉. 너무 감사해요.”
졸지에 니나 역시 실라를 토닥토닥 달래 주게 되었다.
“저, 좀 더 공작님 곁에 있다가… 돌아오면 이 은혜에 꼭 보답할게요.”
“그래, 그래.”
실라가 천천히 눈물을 그치고는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그런데 제가 동방에 간 사이에 만약 중요한 행사가 있다면… 초청해 주실 수 있나요?”
“중요한 행사?”
교역로 완공식을 말하나.
“당연하지.”
“우와, 정말 감사해요! 기뻐요.”
실라는 볼이 분홍빛이 될 정도로 교역로 사업을 기대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녀가 공작령의 발전을 자신의 발전처럼 생각해 줘서 나 역시 감동이었다.
***
“여기가 크로덴 공작님의 성!”
글로리아는 새로 증축해서 으리으리해진 성을 보고 연신 감탄했다. 더군다나 작위식 이후 자신이 첫 손님이었기에 기뻤다.
루솔릿 공작가와 가장 가까운 귀족 중 하나가 벨라 백작가가 된다면 더 바랄 일이 없으리라.
그러나 오늘, 좋은 일 때문에 온 건 아니었기에 들어가기 망설여졌다. 그렇다고 해서 다음에 다시 오거나 미룰 수도 없는 문제였고 말이다.
글로리아가 괜히 하녀에게 물어보았다.
“얘. 나 어때 보이니?”
“정말 예뻐요. 제가 봤던 분 중에 제일 아름다우세요.”
하녀가 평소처럼 맞장구치며 거울을 보여 줬다.
“아니지. 네가 봤던 분 중에 제일 아름다운 분은 루솔릿 공작님이야. 알겠어?”
“네에, 네.”
그때 갑자기 공기가 차가워지며 성문이 열렸다. 안주인이나 다름없는 사람이 등장했기에 글로리아는 거울을 집어넣고 서둘러 예를 차렸다.
“안녕하세요, 크로덴 공작님. 벨라 가문의 글로리아입니다. 저어… 루솔릿 공작님을 뵙기를 청합니다.”
“엘린을?”
“엘린….”
글로리아가 실수로 애칭을 따라 부르자 마치 죽을죄를 지은 것처럼 포스가 살벌해졌다.
“죄, 죄송합니다! 루솔릿 공작님이요.”
“네 영지로 돌아가.”
“네-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