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리타 님은… 친자가 아닙니다!”
재판소에 있는 모든 이들이 순식간에 웅성웅성했다.
라멜은 멍하니 있다가 “아니야.”라고 중얼거렸다. 반면 리셀은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뭐? 그렇다면.”
“리타 님과 공작님의 마력 반응은 전혀 다릅니다. 리타 님의 부친은 루솔릿 공작님이 아닙니다.”
이게 무슨 소리람. 막장 가족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출생의 비밀까지 숨겨져 있었다니. 라멜이 리셀을 윽박지르기 시작했다.
“그럴 리가. 이렇게 닮았는데! 어떻게 된 일이에요?”
“몰라, 어차피 다 뒈질 거 어디서 태어났는지가 중요해?”
“하! 그럼 그렇지. 고상한 척도 해내지 못하는 당신에게 기본적인 도리라곤 기대할 수 있을 리가.”
“그래서 넌 얼마나 잘나게 살았니? 너도 내가 낳았어!”
“그게 할 말이야?!”
라멜과 리셀은 서로 경박한 대화를 주고받았다. 배심원은 귀족과 평민 너 나 할 것 없이 눈살을 찌푸렸고 아이를 데리고 온 방청객들 중 부모는 아이의 귀를 막았다.
이미 판결이 정해진 듯이 다비온이 통보했다.
“판례를 검토한바. 루솔릿 공작은 작위를 박탈하고 공작과 공작 부인은 20년간 노역 후 추방한다. 라멜과 리타는 모든 권리와 지위를 압수하고 노예의 신분으로 강등한다. 더불어 이 모든 사태를 일으킨 리타는 태형에 처한 후 황무지 노역형에 처하며 라멜은 무인도를 개간한다.”
“…….”
피해자들을 생각하면 나는 처벌에 대해 왈가왈부할 수 없었다. 사실 사형을 원하는 의견이 대다수였으니까.
하지만 루솔릿 공작은 무엇이 그리 억울한지 수갑을 잘그락거리며 항변했다.
“억울합니다! 저는 결혼을 잘못한 죄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멍청하고 문란한 여자와 가정을 꾸렸다니 차라리 체닐이 그리울 지경이군.”
“닥쳐, 돼지 같은 게! 네가 사람처럼만 생겼어도 이 지경까지 안 왔어.”
부부는 서로를 원수처럼 노려보았다. 아무도 자식 생각은 안 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다 공작은 나를 응시하더니 절박하게 말했다.
“시엘리나. 이 아버지가 네게 해 준 것들을 생각해 다오!”
“…정말 당신과 라멜은 어디서 찍어 내기라도 한 것처럼 똑같네요. 대체 제게 뭘 해 주셨죠?”
내가 묻자 그는 선뜻 답하지 못했다.
“그, 그렇게 갑자기 물어보면 기억하지 못하는 게 당연하지 않느냐!”
“아무리 시간을 충분히 드려도 답하지 못하시겠죠.”
아무것도 해 준 게 없으니까. 공작을 향해 야유가 쏟아졌고 더러 나를 동정하는 눈빛도 느껴졌다. 조용히 하라는 의미로 재판장 중 한 명이 망치를 두드렸다.
“또한 루솔릿 공작가의 모든 권한은 타르 공왕이자 시엘리나 공녀에게 양도한다.”
방청객 대부분이 마치 정의를 구현한 것처럼 박수를 쳤다. 재판장은 퇴장했고 기사들이 죄수들을 호송했다.
“공왕님. 이제 과거는 뒤로하시고 행복한 일들이 가득하길 바라겠습니다.”
“공작령의 번영을 기원합니다.”
“저, 오레이칼 왕국에서도 활약을 지켜봤습니다! 물론 공녀님께서는 보지 못하셨겠지만요.”
재판이 끝나고 미리 내게 잘 보이려는 사람들이 눈도장을 찍으러 왔다.
그러다 에카르트가 노려보면 슬금슬금 예의를 차리고 물러갔지만 말이다.
애초에 공작령의 뒷수습을 황실에 전부 맡길 수 없었을뿐더러, 내게 모든 권한과 재산이 넘겨졌다. 그 의미는 단 하나였다.
“시엘리나 님.”
“네, 다비온 전하.”
“루솔릿 공작령을 맡아 주세요.”
이전에는 제국을 떠나라고 했던 다비온이 제국에서 자리를 잡도록 도와주려고 했다. 그 역시 그동안 나처럼 심경의 변화가 있었겠지.
‘정착한다.’
내가 처음에 생각하던 자유로운 모습은 아니더라도….
나는 오늘 재판에 함께 온 에카르트와 블랑세를 번갈아 보고는 의지를 담아 말했다.
“알겠습니다.”
“엘린, 그리고 루솔릿 공작. 당신이 공작성에서 지내면 저도 그쪽으로 가겠습니다.”
“그럼 크로덴 공작성은요?”
“그곳은 별장으로 씁시다. 어차피 황실 회의를 하려면 종종 수도에 들러야 하니까요.”
에카르트가 깔끔하게 결론을 내리자 블랑세 역시 김칫국을 마셨다.
“어머! 나 이제 공작 부인이 되는 거야?”
“엘린. 모욕죄로 저 여자를 어서 재판에 회부합시다. 지금 당장 재판을 진행하면 되겠군요. 절차는 제가 맡을 테니 동의만 하시지요.”
에카르트는 내 손을 잡으며 보챘고 다비온은 친우의 색다른 모습에 적잖이 충격을 받은 눈빛이었다.
악덕 가족의 형을 집행하기 전까지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에카르트와 시엘리나는 수도와 가까운 크로덴 공작성으로 돌아왔다.
하나 시엘리나가 루솔릿 공작이 된다고 하더라도 그전에 문제 하나가 더 남았다.
‘루솔릿 공작가 자체에 반감을 가진 세력이 있을 텐데.’
저항군이 남았을 거라는 추측이었다. 시엘리나가 잘하면 그런 세력도 알아서 흩어지겠지만 그래도 걱정을 안 할 순 없었다.
에카르트는 시엘리나의 고민을 말하지 않고도 알아차렸다. 그래서 따로 헬라를 불러 저항군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
“일단 다 죽이거나 반만 죽일까요?”
“흐음.”
그 방법이 편하긴 하지만 에카르트는 시엘리나의 말을 떠올렸다. 그녀의 교육은 알고리즘처럼 에카르트의 머릿속에 입력이 되었다.
“쓰레기들에게 자비를 베풀라고 강요할 생각은 전혀 없어요. 특히 당신을 위험하게 하려던 사람은 더더욱요.”
자신을 위협했는가?
시엘리나는 에카르트에게 자기 자신과 마찬가지, 아니 그보다 더 중요한 유일한 존재였다.
‘그렇다면 더 죽여도 되겠군.’
하지만 왠지 이러한 논리로 도출한 결과를 보고한다면 시엘리나의 얼굴이 사색이 될 것 같았다.
“다른 방법을 쓰겠다. 시키는 대로 해.”
다음 날. 에카르트가 내게 아침 인사를 건네고는 간단히 말했다.
“엘린. 저항군은 와해가 됐다고 합니다.”
“네? 왜요?”
“실체를 드러내게 했을 뿐입니다. 그 정의로운 척하는 자식이 실제로는 여자들에게 집적대고 사리사욕을 채우더군요.”
“…….”
“털어 보니 저항군 활동금도 다 빼돌렸지요. 결국 그놈이 다 그놈이라고 생각했는지, 저항군도 당신을 원하게 되었습니다.”
“어머.”
나는 저항군이 와해가 됐다는 사실보다도 그의 기준으로 평화로운 방식을 사용해서 놀랐다.
“에카르트. 주먹으로 해결하지 않는 건 무척 어려운 일이에요. 그런데도 저를 위해 노력해 줘서 기뻐요.”
나는 에카르트를 열심히 쓰다듬으며 덧붙였다.
“나도 어떨 땐 당신 생각을 이해해요. 무력행사를 무조건 반대할 만큼 평화주의자는 아니라서.”
“예를 들면?”
“누가 당신을 해치려고 했다면 그것이 미수로 끝나더라도… 나도 그 인간을 죽이고 싶을 거예요. 아니. 털끝 하나라도 건드렸다가는 정말 죽였을지도 몰라요.”
나는 라멜이 화살로 나를 처치하려 했을 때, 에카르트가 즉시 그녀를 죽이려고 한 것을 떠올리며 말했다.
“그래요. 쓰레기는 대가를 치러야 하지만 앞으로 우리에겐 세부적인 기준이 필요한 거죠.”
“네. 일단 재활용품, 음식물 쓰레기, 유독물질, 유해 폐기물 정도로 나눠 보면 될까요?”
“네! 그래도 그중에 우리와 가까운 사람은 없죠?”
“일단 고용인들은 재활용품입니다.”
“…첫 분류부터 말문이 막히네요.”
“감동받으셨군요. 블랑세 그 여자는 유독물질입니다.”
그나마 유해 폐기물은 아니라 다행이라고 할지. 나는 기준은 나중에 바로잡기로 하고 오늘은 그저 허허 웃어 주었다.
***
작위식은 다비온이 참석하고 가신들과 영주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진행되었다.
헬라와 니나처럼 가까운 고용인들도 특별히 와 주었다. 물론 에카르트와 블랑세는 나와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았다.
“이상, 타르 공왕이자 시엘리나 루솔릿 공녀가 24대 루솔릿 공작이 되었음을 공식적으로 선언하는 바이다.”
다비온은 몇 줄을 더 읊고는 내게 브로치를 건넸다.
“새롭게 변화하는 루솔릿 가문을 상징하는 태양입니다.”
원래는 선대가 후계자에게 가문을 상징하는 왕관을 건네는 게 관례지만, 나를 제외한 루솔릿 공작가 일원은 전부 투옥당했으므로 그럴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하지만 덕분에 이렇게 황실에서 하사하는 물건도 받았으니.
루비와 옐로우, 화이트 다이아몬드로 세공한 브로치는 섬세하고 아름다웠다.
“감사합니다.”
나는 그것을 두 손으로 받아 가슴팍에 달았다. 작위식을 마치고 에카르트가 얼른 꽃다발을 내밀었다.
“축하합니다, 루솔릿 공작.”
“고마워요.”
“시엘, 여기 내 꺼도!”
“이미 내 꽃다발을 들고 계시니 저쪽의 하녀에게 전하도록 해.”
에카르트가 블랑세를 견제했다.
“아니죠. 공작님이 주신 꽃다발을 하녀에게 전하면 되죠.”
내가 사랑하는 두 사람이 다시 옥신각신하기 전, 나는 그녀의 꽃다발도 냉큼 받아 들었다.
“고마워, 블랑세. 너무 예쁘다.”
그러자 에카르트는 다시 질투의 화신이 되어 음모론을 펼쳤다.
“엘린. 이 여자가 사 온 건 어디 화단에서 아무 데서나 꺾어 온 것이겠지요. 독초일지도 모르니 차라리 제게 주시지요.”
“독초 아니에요!”
“유독물질이 주는 선물이니 독초입니다.”
“그 기준표 말인데 나중에 수정해야겠어요.”
그러자 에카르트는 못마땅한 표정이 되었다. 나는 나와 함께하는 일이 다 좋다는 그의 말이 떠올랐다.
“같이 맛있는 거 먹으면서.”
“흐음, 좋습니다.”
좌우지간 여러 일을 겪어도 집착당하는 건 그대로였다. 에카르트가 천진난만한 얼굴로 말했다.
“엘린. 혹시 아이를 좋아하십니까?”
“네? 저는 이제 모든 영주민을 보살펴야 하는걸요.”
“그럼 우리는 낳지 맙시다. 당신이 사랑하는 상대가 한 명 더 생기는 건 싫군요.”
우리 아직 결혼도 안 했건만 벌써 자녀 계획까지 생각하다니! 그러자 블랑세가 나를 은근슬쩍 끌어안았다.
“안하무인 크로덴 공작께서 웬일로 양보하다니. 그럼 내 아이를 낳으면 되겠다!”
“네 아이?”
“붉은색 머리카락에 파란색 눈동자를 가졌으면 얼마나 예쁘겠어.”
“엘린. 우리의 상서로운 날과 저 여자의 처형식 날을 같이 잡읍시다. 제가 직접 형을 집행하지요.”
오늘 겨우 작위식을 했을 뿐인데 이러고 싶을까! 내가 신체의 자유를 주장해도 둘은 질척하게 나를 절대 놓을 수 없다는 듯 끌어안았다.
***
나는 본격적으로 공작가의 안살림을 정비하기로 했다.
파빌을 비롯한 대부분의 고용인은 역시 횡령에 가담하거나 묵인했기에 조사를 받는 중이라 새로운 집사를 구해야 했다. 다행히 나는 믿음직한 사람을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