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피폐물 조연은 도망치고 싶다-94화 (94/115)

#94화

“그래. 보여 주지.”

리차드가 자신만만하게 상자를 덮은 천을 걷어 냈다.

그러자 화살통과 평범해 보이는 활이 나왔다. 라멜이 어이없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고작 이딴 허접한 거로? 걘 괴물이야!”

“허접하다니! 이걸 만드느… 만만하게 보지 말라고!”

큰 말실수를 했지만 라멜은 눈치채지 못했다.

“시엘리나의 옆은 크로덴 공작이 있어. 게다가 얼굴에 흉한 자국을 남겨도 성력으로 금세 치료할 테고. 무엇보다 이런 물건은 결계로 막을 텐데.”

“쯔. 역시 공녀는 잘 모르는가 보군. 이 화살촉은 평범하지 않아. 전부 마정석으로 만들었지.”

“이걸 다?”

“그래. 그리고 결계 마법의 함정이 뭔지 알아?”

라멜은 무시받기 싫어서 일부러 뚱한 표정을 지었다.

“같은 피를 갖고 있는 상대는 결계가 약하게 통한다는 거야! 리타 공자 역시 한때 그 연구를 진행했지.”

“뭔가 이상하잖아. 오레이칼 왕국에서 시엘리나의 결계는 완벽해 보였어. 리타 역시 이 연구를 더 이상 진행하지 않았고. 왜지?”

“그야-”

리차드는 예상치 못한 데에서 허를 찔렀다. 무기를 어떻게 구했는지는 숨겼지만, 가족과 관한 사실은 용케 예리하게 짚었다. 그는 불리한 이야기는 적당히 둘러대기로 했다.

“다른 연구를 하느라 바빴나 보지.”

대수롭지 않게 말했으나 혹시라도 눈치를 챌까 봐 걱정되는 리차드였다.

그 뒤 라멜은 리차드와 함께 활을 연습하는 데에 매진했다.

라멜이 쏜 화살은 과녁에 정확히 명중했다. 그녀는 과녁에 시엘리나의 모습을 겹쳐 떠올렸다.

마정석을 사용해 만들어서 그런지 활의 위력은 굉장했다.

피부를 뚫고 들어가면 화살촉이 분해되어 독이 온몸으로 퍼진다. 급소를 피하더라도 틀림없이 중상을 입을 터.

꽃과 장신구를 들고 있던 손이었다. 이런 무시무시한 무기를 들고 있는 건 다 시엘리나의 탓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내가 애꿎은 사람을 살해할 수 있을 리 없잖아!’

시엘리나의 탓을 할수록 복수의 칼날은 날카롭게 갈렸다.

한편 리차드는 활을 고쳐 쥔 라멜의 모습을 훔쳐봤다.

‘꽤 아름답단 말이지.’

리셀과 헤어진 후로 여자를 품에 안은 지 오래되었다. 리셀만큼은 아니지만 라멜의 모습도 제법 육감적으로 다가왔다.

나름 안전한 곳에 자리 잡으니 음심이 동하는 듯한 리차드였다.

“이봐, 공녀. 다른 사람과 교제한 적은 없어?”

“…왜.”

집중해서 다시 활을 쏘던 라멜은 뜬금없는 이야기에 인상을 찌푸렸다. 리차드가 은근슬쩍 라멜의 옆으로 다가왔다.

“혹시 나는 어때?”

“…….”

라멜은 여러모로 충격을 받아서 물어보았다.

“당신, 대체 엄마와는 어떻게 사귀게 되었어?”

그것을 관심이라고 착각한 리차드는 히죽이며 다가갔다.

“왜. 이제야 관심이 가?”

“꺼져!”

“그 성격도 엄마를 닮았나 보군.”

라멜은 저급한 남자의 호감을 사서 분노했다.

늘 우아하고 품격 있는 고백만 받은 그녀였다. 공작성의 티파티에 초대받아 기뻐하던 수많은 영애와 영식. 조심스러워하고 자신을 모시는 일을 영광으로 여기던 기사들이 떠올랐다.

손목에 리차드의 손길이 닿자 라멜은 피부에 뱀이 닿는 것처럼 소름 끼쳤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라멜은 화살대를 쥐고 그를 찔렀다.

“죽어!”

“아, 아악! 정신 나갔어?”

둘은 몸싸움을 벌였고 들고 있던 화살대와 화살통도 바닥에 떨어졌다.

화살통 안에 들어 있던 화살이 와르르 쏟아졌다. 라멜은 가까운 화살 하나를 쥐어 들고 리차드의 배에 있는 힘껏 꽂아 넣었다.

“으, 으윽.”

화살촉인 마정석의 독이 퍼져 가던 리차드는 몇 번 경련을 일으키다가 이윽고 피를 토하고는 조용해졌다.

‘주, 죽은 건가?’

라멜은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손과 옷자락에 리차드의 피가 튀어 있었다. 손수건을 꺼내 피를 닦았지만 깨끗하게 지워질 리가 없었다. 머리카락은 뒤엉켰으며 초점은 풀어졌다.

“하, 하하….”

그녀는 화살 한 대를 꽉 쥐고 목적지도 없이 무작정 걸었다.

하염없이 걷다 보니 어느새 외곽까지 다다랐다. 뒤늦게 활을 두고 온 사실이 생각났지만 돌아가고 싶지도 않았다.

“저기, 저쪽.”

“…맞지?”

“맞아. 대체 뭘 들고 있는 거야?”

주민들이 쑥덕거리며 라멜을 흘긋흘긋 보았다. 그때 마을에 어떤 여자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님께서 구휼미를 나눠 주러 오셨으니-”

아버지가 업무에 복귀했단 말인가! 그럴 리 없다는 것을 외면하면서도 라멜은 그렇게 믿고 싶었다.

기대감을 가지고 얼른 큰길가로 나아가자 수레마다 가득한 곡식과 옹기종기 모인 주민들이 보였다.

그 중심의 시엘리나는 이미 루솔릿 공작이 된 것처럼 당당했다. 그녀의 옆에 크로덴 공작은 물론 황태자까지 있었다.

그리고 크로덴 공작가의 집사와 수하들이 루솔릿 영지의 가신들인 양 일을 하고 있었다.

‘내게는 아무것도 남은 게 없어.’

라멜은 자신이 왜 여기까지 추락했는지 깨달았다.

그녀는 한 걸음, 한 걸음 비틀비틀 걷다가 무작정 시엘리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마정석으로 만든 화살촉이 빛났다.

“시엘리나 님의 사비로 지원한 구휼미는 세 번에 나눠서 배분할 예정입니다.”

목소리를 높여 주는 마도구로 헬라가 주민들에게 외쳤다. 나는 가만히 주민들의 인사를 받으며 상황을 감독했다.

“공녀님, 감사합니다!”

“정말, 덕분에 살았습니다. 공녀님 아니었다면 어찌 되었을지….”

그런데 인파 틈으로 잘 아는 얼굴이 섞여 있었다.

“제발 그냥 이제는 사라져 줘!”

붉은 머리카락과 은색 눈동자는 라멜과 같았으나 내가 기억하던 아가씨 같은 모습과 많이 바뀌었다. 하지만 내게 닿기 전에 라멜은 무릎 꿇었다.

“죽여야 합니다.”

에카르트의 마력 파장이 라멜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은 것이다.

그의 검은 포스가 순식간에 발동했고 라멜의 전신을 두꺼운 올가미처럼 둘렀다. 화살을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커, 커흑.”

라멜이 발버둥 쳐도 오히려 에카르트의 힘은 커다란 뱀처럼 라멜을 집어삼켰다.

“에카르트!”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하셨죠. 저 새끼가 감히 당신을 찌르려고 했습니다.”

“…당신 손을 더럽히지 마세요.”

“그럴까요. 엘린을 만지려면 제 손도 깨끗해야 하니 말입니다.”

에카르트는 순순히 포스를 거두고는 말했다.

“그럼 법에 따라 죽입시다. 아시다시피 귀족을 죽이려고 한 자는 사형에 처할 수 있습니다. 이 자리에 황족인 다비온도 와 있고 목격자도 많으니 즉결 심판을 열면 어떠신지요.”

그러자 라멜은 쉰 목소리로 엉엉 목 놓아서 울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녀를 동정하지 않았다.

“왜, 왜! 네가 뭔데 나를 이렇게까지 비참하게 하는 거야?”

나는 라멜에게 다가가 엄지와 중지를 동그랗게 말고 딱밤을 때렸다.

“정신 차려! 내가 너를 비참하게 한 게 아니야. 네가 너를 비참하게 만들었지.”

“그럼 내가 뭘 해야 하는데? 행복해지려면 뭘 더 어떻게 해야 했냐고! 네가 처음부터 내 전부를 가져갔잖아. 이제는 가족까지도….”

라멜을 선처할 생각은 없었으나 그와 별개로 그녀의 불행한 삶은 이해했다.

“라멜. 네가 나를 네 가족이라고 생각하면 좋았을 텐데. 다른 사람의 삶과 방식에 휘둘리는 대신 네 길을 만들어 봐도 됐을 텐데.”

“…시엘리나. 너는….”

가족이 아니야. 그렇게 라멜이 중얼거렸다. 나 역시 씁쓸하게 말했다.

“알겠어. 나와 너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지.”

“…….”

우리가 더 이상 말이 없고 주민들도 눈치를 보자 다비온이 상황을 정리했다.

어차피 라멜 역시 조사를 받아야 했고 나를 살해하려고 했으니 처벌을 맡기기로 했다. 다비온의 기사들이 라멜을 황실로 끌고 갔다.

***

라멜은 좁고 어둑한 황실 감옥에 갇혔다. 그녀는 시엘리나가 무슨 조언을 했는지 잊었다. 오히려 시엘리나를 무작정 찌르려고 한 행동에 후회가 들었다. 좀 더… 좀 더 생각하고 죽여야 했는데 말이다!

그녀가 허탈함과 억울함에 멍하니 넋을 놓고 있을 때 누군가 들어왔다.

“누구…세요?”

“신관 존입니다. 루솔릿 공작이 친자 검사를 요청하여 머리카락을 채취해야 합니다.”

“아빠는… 제가 친자가 아니라고 의심하는 거예요?”

라멜은 울먹였다. 가족의 행복을 위해서 마음을 썼던 일들이 생각났다.

비록 라멜 스스로의 안위를 생각해서였지만 그중에는 진심으로 한 것도 많았다. 선물할 브로치를 고를 때. 받고 기뻐할 아빠의 모습을 생각하면 기분이 좋아졌다.

하지만 결국 자신이 친딸이 아니라는 의심을 사다니!

“그런 거 동의 안 해요.”

“이미 선대 루솔릿 공작이 외도 증거를 확보하였기에 검사에 불응할 시 재판에서 불리하게 작용합니다.”

“그, 그렇게까지 해야 돼요? 나는… 나는 진짜 딸이라고요!”

신관은 라멜의 말을 무시하고는 머리카락 끝을 자르고 새끼손가락을 바늘로 찔러 피도 채취해 갔다.

***

라멜과 리차드의 행방이 밝혀지고 루솔릿 공작가의 재판일이 되었다. 보통 재판은 재판장 세 명이 판결을 내리고 귀족과 평민을 섞어 선출한 배심원을 둔다.

하지만 고위 귀족이 회부가 된 재판은 황족이 직접 판결하고 재판장과 배심원 과반수의 동의를 얻어 통과한다.

가장 중앙에는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재판장들과 다비온이, 나와 에카르트는 고용인들과 함께 증인석에 앉았다. 먼저 신관 한 사람이 나와서 말했다.

“신전의 친자 검사를 담당하는 신관 존입니다. 루솔릿 공작의 간곡한 요청으로 신전에서 친자 검사를 진행했었습니다. 친자 감식 결과. 라멜 님은 루솔릿 공작의 친자입니다.”

“거봐! 난 친딸이잖아요.”

라멜은 득의양양해져서 루솔릿 공작을 향해 외쳤다. 하지만 그녀는 결백을 밝혀냈어도 깊은 슬픔을 느꼈다. 사랑하던 아빠에게 의심을 받았다는 생각에 슬펐다.

“한데….”

신관은 라멜의 눈치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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