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에카르트. 자고로 다른 사람이 만든 요리가 가장 맛있다는 말이 있죠. 저도 당신에게 동방의 음식을 알려 드리고 싶었건만, 제가 만들 수는 없어서 아쉬웠는데….”
“아니! 아쉽다니 그런 일이 절대 없게 하겠습니다.”
“하, 하하. 언젠가 한번 도전해 볼게요. 아무튼 마침 영애께서 자리를 마련하신다잖아요. 에카르트! 정말 맛있을 테니 같이 가요.”
“저를 위해서요?”
“네-에. 재료 만들고 손질하고 다 얼마나 고생인데요. 당신도 가끔은 손에 물 묻히지 말고 푹 쉬어요.”
“그러지요.”
에카르트는 히죽 웃었다. 양심이 찔리긴 했지만 에카르트를 생각하는 마음 또한 진심이었으니까 말이다.
“엘린. 해도 지는데 이만 갑시다.”
에카르트는 박하사탕을 우걱우걱 씹어 삼키고서는 나를 보챘다.
“그렇다면 귀빈실을 내어 드릴 테니 주무시고….”
글로리아는 나와 더 가까워질 기회라고 생각했는지 눈을 빛내며 말했다. 하지만 붉은 두 눈이 그녀를 차갑게 응시하자 눈치껏 발을 뺐다.
“얼른 성문까지 모시겠습니다!”
맛있는 식사를 해서 좋았는데 에카르트에게 시달리느라 다 소화가 되어 버린 기분이었다.
어둑한 마차 안에서 추궁이 이어졌다. 에카르트는 내 손을 잡고는 놓아주지를 않았다.
“그 동방 요리가 그렇게 맛있었습니까?”
“네. 담백하고 좋았어요.”
“제가 한 것보다 더 마음에 들었다고요?”
“아니. 음식 자체가 다르잖아요!”
“아. 제가 만든 것과는 아예 급이 다르다. 이 말씀이군요.”
에카르트가 또 확대 해석을 하며 나를 곤란하게 만들었다. 나는 그를 토닥토닥 진정시키려 했는데 두 손 모두 그에게 잡혀 자유롭지 못했다.
“제 말은 마치 스릴러와 로맨스처럼 그저 장르가 다르다는 뜻이었어요!”
“그래서 뭐가 더 좋으십니까?”
“에카르트요. 됐죠?”
물론 나는 그를 얌전하게 하는 정답을 알았다.
각 구역에 식량을 보급하며 식량난은 점점 해결되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크로덴 공작가에 대한 소문도 조금씩 바뀌어 갔다.
초대 크로덴 공작은 제국의 멸망을 저지하기 위해 악마와 계약했다.
그러나 그 대가로 균열이 계속해서 발생했고 그 후손들은 북부를 수호하는 데에 일생을 바쳤다.
더불어 시엘리나와 에카르트는 그 굴레를 끊어 내고 루솔릿 공작령을 구했으며 북부를 새로운 땅으로 변화시키고 있다.
이야기는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오르내리며 조금씩 바뀌었다.
중도파 일부는 에카르트의 권한을 유지하는 조건으로 북부가 아닌 다른 전장을 맡기자고 제안했지만 다비온에게 기각당했다.
크로덴 공작가의 재산을 환수하고 책임을 묻겠다고 주장할 세력이 있을까 봐 걱정했으나… 차마 가문의 이름을 걸고 그런 논리를 펼치지는 못했다.
***
‘여기는… 외곽이던가.’
라멜은 완전히 지쳐서 휘청휘청 걸음을 옮겼다. 마수들의 기습으로 아버지와도 헤어지고, 자신을 수색하는 사람들을 피해 계속 도망쳤다.
먹은 것도 없는데 속이 울렁거렸다. 다리가 타는 듯이 아팠고 목이 따끔거리고 머리가 조였다. 그동안 대부분 마차를 타고 다녔기에 이렇게 오래 걸은 적이 없었다.
‘그냥 아무 집이나 들어가서 도와달라고 할까?’
자신의 얼굴이 사람들의 호감을 산다는 건 그간의 경험으로 잘 알았다. 라멜은 소매로 얼굴을 대충 문질러 닦고, 가장 가까운 집 문을 두드렸다.
“누구세요?”
깔끔한 인상의 젊은 남자가 얼굴을 비췄다. 남자는 라멜 공녀의 얼굴을 알아보고는 당황했고, 라멜은 그가 자신의 미모를 보고 넋을 놓았다고 생각했다.
‘나를 처음 봐서 놀란 건가? 하긴. 평민들만 보고 자랐을 테니.’
라멜이 남자에게 말을 걸려던 그때.
“여보. 무슨 일이야?”
안쪽에서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유부남이었던가. 라멜은 하필 골라도 이런 집을 골랐다는 생각에 짜증이 치밀었다.
“아, 그게….”
남자가 난처해하면서도 일단은 문을 닫지 않았기에 라멜은 안으로 비집고 들어왔다. 식사 중이었는지 주방에서는 맛있는 냄새가 났고 테이블에는 음식이 차려져 있었다.
“어머.”
여자 역시 난감한 얼굴이 되었다. 그녀는 난처하게 세 개의 의자 중에서 하나를 가리켰다.
“드세…요.”
“…….”
그녀는 기품도 잊고 식탁의 음식을 닥치는 대로 입에 집어넣었다.
식사가 끝난 후 부부는 함께 식탁을 정돈하고 설거지를 했다. 라멜이 뻘쭘하게 서 있자 여자가 먼저 말했다.
“안쪽에 손님방이 하나 있으니 쉬세요.”
“…….”
라멜의 입에서 순간 고맙다는 말이 맴돌았지만 뭔가가 입을 틀어막고 있는 기분이었다.
라멜은 낡고 작은 방에 들어와 침대에 지친 몸을 뉘었다. 식사하는 와중에도 서로를 챙기던 부부의 모습이 생각났다.
‘사이 좋아 보여. 나보다 키도 작고, 못생기고, 말하는 것도 기품 없는데.’
따뜻하고 평범한 가족을 보며 라멜은 자신이 가질 수 없던 것에 대해 생각했다.
피로한 도주 생활 중에 드디어 쉬게 되었으나 그녀는 잠들지 못했다. 스스로의 처지가 처량해서 눈물이 자꾸 났다.
“…해야 해.”
잠깐 잠이 들던 그때. 불이 꺼진 거실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라멜은 문에 귀를 대고 부부의 대화를 엿들었다.
“날이 밝으면 바로 치안대에 갈 테니 당신은 그동안 잘 붙잡아 둬.”
“알았어. 하, 왜 하필 우리 집으로 와서….”
“액땜했다고 생각해.”
“시엘리나 님이 돌아오시기 전까지 공작가는 외곽은 관심도 안 가졌잖아. 양심도 없지!”
대화가 드문드문 들리긴 했지만 부부가 자신을 신고하려는 게 틀림이 없었다.
공작성에는 모두가 자신을 사랑했는데. 액땜이라고 마치 골칫덩어리를 떠안은 것처럼 말하다니! 라멜은 문을 벌컥 열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감히 평민 주제에 귀족을 신고한다고?”
“뭐, 뭐야!”
“나 같은 귀족이 여기까지 왔으면 고마워하고 극진히 대접해야지! 내 너희의 얼굴을 기억해 둘 거야!”
그러자 여자가 혀를 차며 저잣거리 개도 아는 진실을 짚어 주었다.
“당신, 이제 더 이상 귀족도 아니잖아.”
“닥쳐, 닥쳐, 닥쳐! 아악!”
라멜은 귀를 틀어막고 비명을 질렀다.
부부는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 라멜을 보고 더 이상 자극하지 않기로 했다. 그녀는 누가 봐도 건드려서는 안 될 사람 같아 보였다.
라멜은 식탁 의자를 걷어차고는 씩씩거리며 뛰쳐나갔다.
다시 라멜은 며칠간 사람들을 피해 다녔다.
그러다 도착한 곳은 레이크 로즈가 잔뜩 핀 호수였다. 마수들은 퇴치했으나 보호 구역을 제외하고는 아직 접근을 제한했기에 사람들은 없었다.
라멜이 무릎을 꿇고 강가의 물을 허겁지겁 들이켰다. 물에는 작은 날벌레가 떠다니고 맛도 비렸지만 그래도 목을 축이기에는 충분했다.
그랬기에 그녀는 뒤에서 들리는 작은 발소리도 눈치채지 못했다.
“아니. 이게 누구야.”
“콜록, 콜록!”
누군가 말을 걸었고 라멜은 깜짝 놀라 사레에 들러 기침했다. 뜻밖의 인물을 마주했으니, 바로 리차드였다.
라멜이 진정한 후 리차드가 능청스럽게 물어보았다.
“어이. 네 엄마, 살아 있냐?”
“몰라. 당신은 왜 체포당하지 않았는데?”
“나는 무슨 죄목으로? 불륜? 네 엄마가 돈 빼돌린 일은 관여한 적 없어!”
리차드가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만한 짓을 했지만. 영지를 방치한 아빠와 구휼미까지 끌어와서 재산을 낭비한 엄마, 악마를 불러낸 동생에 비해서는 죄가 가벼웠다.
라멜이 딱히 답할 말을 찾지 못하자 리차드의 기세가 등등해졌다.
“어이, 라멜. 네 새아빠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사람인데. 이렇게 각박하게 굴 거야?”
“징그러운 소리 하지 마. 나한텐 아빠 한 명뿐이야!”
라멜에게는 아직 가족의 정이 남아 있다. 단순히 공작성이라는 공간뿐만 아니라 허울뿐이라도 가족의 형태가 말이다.
리차드는 그 마음을 알아차렸기에 이 어린 아가씨를 본인의 이득을 위해 이용하기로 했다.
그 역시 시엘리나 때문에 공작성에서 밀려난 제 처지가 못마땅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시엘리나의 탓도 아니지만, 그들은 본인들의 처지가 이렇게 된 것에 그저 원망할 상대가 필요했다.
검술 실력을 갈고닦아 공작성의 기사로 남거나 실라를 비롯한 하녀들처럼 시엘리나에게 충성심을 가질 생각은 하지도 않고 말이다.
“너, 마력 있냐?”
“없어. 왜!”
“짜증 내지 말고 들어. 어차피 여기 있다간 같이 조사를 받게 될 거라고. 내가 숨어 있는 곳이 있으니 그쪽으로 가는 게 어때?”
리차드는 라멜을 근처의 폐가로 데려갔다. 수년 전 호수의 낚시꾼들이 장비를 보관하던 장소로, 호수의 물이 썩어 가며 더 이상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벽에는 거미줄이 붙어 있었고 안에는 곰팡이가 잔뜩 폈다. 아무리 처지를 가릴 상황이 아니었다고 해도 라멜은 본능적인 거부감을 느꼈다.
“아니, 여기서 뭘 먹고 지내라고?”
“마수 사체를 먹었지. 대부분 금방 부식해서 사라지지만… 남은 거 대충 주워서 익혀 먹었어.”
리차드는 머리를 벅벅 긁고 슬슬 라멜의 분노를 자극하기로 했다.
“시엘리나가 원망스럽지?”
“…그건 왜 물어.”
“사실 늘 티가 났거든. 그래도 이해가 되었어. 이런 말하기엔 무엇하지만, 너도 고생 좀 하고 자란 거 안다. 그러다 팔자 좀 피는 줄 알았는데….”
“…….”
“거, 리타 공자님도 원래 그런 분이 아니었잖냐.”
“맞아. 리타 불쌍해. 시엘리나 그년 때문에 그런 금지된 마법까지 손을 댔잖아.”
“그래. 그러니 가족의 복수를 해야지!”
“복수?”
“뭐, 죽이거나.”
“죽…여?”
나보고 사람을 죽이라고?
라멜의 눈빛이 순간 흔들렸다.
괴롭힌다는 자각은 없어도 그건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나쁜 짓이었다. 라멜이 망설이자 리차드는 기준을 낮췄다.
“아니면 얼굴에 흠집 하나 내주거나.”
“…어떻게?”
리차드가 바닥을 주섬주섬 짚더니 판자 하나를 뜯어냈다. 그리고 그 안에서 긴 상자를 꺼내 왔다.
“활 쏘는 거, 배워 본 적 있지?”
“당연하지.”
“네 엄마가 칭찬하더군.”
엄마가 자신의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했다니 라멜은 묘한 감정이 들었다.
물론 리차드는 라멜의 경계를 풀기 위해 둘러댄 말에 불과했다. 아무리 둘의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라멜은 가족에게 너무 쉽게 흔들렸으니까.
“네 어머니가 꽤 많은 비상금을 빼돌렸지. 그것으로 이전에 타국의 무기상에게 특별한 무기를 구입했다.”
물론 리차드의 말은 거짓이었다. 그는 공작가가 부패하기 시작하며 집사와 내통하여 다른 음모를 꾸며 왔는데 그 사실은 누구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라멜이 숨겨진 진실을 간파할 리 없었다. 그저 당장의 호기심을 충족시킬 뿐.
“특별한 무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