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
“충분히 네 몫을 했으니 가서 쉬거라.”
근신하라는 뜻과 마찬가지였다. 다비온이 황태자궁으로 오자, 이미 브록을 제외한 호위 기사들이 바뀌어 있었다.
“황후 폐하의 명령입니다. 정세가 혼란스러우니 당분간 황태자궁에 머무르라고 하셨습니다.”
“허.”
이동 마법 재료를 수급하는 길 역시 차단하겠지. 다비온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고는 표정을 바꿔 말했다.
“제국법에 의해 강제할 수 없는 명령이다.”
황후의 명을 따르던 기사들은 당황했다.
“또한 나는 약조를 맺었다. 황태자로서 마땅히 루솔릿 공작령 복구를 돕기로 하였다. 이행하지 않으면 더 큰 혼란을 야기할 것이다.”
이전에는 순순히 뜻대로 따르던 다비온이 달라졌다.
시엘리나가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모습을 지켜봤고, 블랑세와 마음을 나누게 되었다.
그러면 그럴수록 에카르트가 한 말이 가슴에 남았다.
“네 곁에 남는 사람은 네가 정해.”
소중한 사람들을 위해서는 어머니의 뜻을 거스를 수 있었다. 아니, 그래야 했다. 다르게 살아갈 것이다.
마음을 정한 그날 다비온은 은밀한 길로 주교를 찾아갔다.
“신전에서 해 왔던 일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제국에 구호 단체가 필요하기도 하고요. 하지만 어떤 사건이든 이야기에 따라 영웅이 되기도 하죠.”
“어떻게 말인가요?”
“신께서 시련을 주셨지만 동시에 체닐 님의 딸이자 타르 공국의 왕인 시엘리나 루솔릿을 보냈다. 신전은 앞으로 더 제국민의 평화를 위해 힘쓸 것이다… 그렇게 말하면 됩니다.”
시엘리나를 영웅으로 만들고 신전을 계속 유지시키는 방법이었다.
만약 신전을 무너뜨린다면 그다음 차례는 다시 에카르트와 시엘리나가 될지 모른다.
하여 다비온은 둘을 보호하기 위해 친우이자 제국에 정당한 후계자로서 뒤에서 힘썼다.
***
나는 하녀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루솔릿 공작가로 돌아왔다. 물론 에카르트, 블랑세, 헬라, 니나도 어쩔 수 없이 함께 왔지만 말이다.
여전히 공작성을 복구하는 중이었고 사실 영지 대부분이 엉망이었지만… 가장 중요한 식량난을 먼저 해결하기로 했다.
루솔릿 공작령의 창고는 텅 비었고, 농경지 역시 마수들의 침략을 받아 엉망이 되었다. 그러니 당분간 외부에서 물자를 조달받아야 했다.
‘공작령 14구역은 황실에서 배급받기까지 시간이 걸릴 테니, 가까운 영지에서 충당하는 게 좋겠어.’
다행히 인근의 벨라 영지가 14구역과 한 시간 거리였다.
영토는 공작령의 1/3 정도지만 대부분이 농경지인 데다 비축 식량이 많다고 들었다.
무엇보다 그간의 일로 미루어 보아 벨라 백작 영애는 나에 대한 호감도 있는 상황. 나는 루솔릿 공작성 집무실에 앉아 그녀에게 편지를 쓰기로 했다.
- 친애하는 벨라 영애.
그간 잘 지내셨나요? 저는 황실의 명을 받고 루솔릿 공작령으로 와 곡물을 배급할 방법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그러던 중에 벨라 영지에서 수확물을 수출한다는 반가운 소식을 들었습니다. 중상급 품질 이상의 물량이 충분하다면 이하의 목록을 1만 니케에 거래하고 싶습니다.
내가 곡식 수량과 유통가에 해당하는 거래액을 문의하자 그녀는 곧바로 장문의 답장을 보냈다.
- 존경하는 시엘리나 공녀님께. 말씀하신 양은 충분히 있습니다.
손을 떨면서 썼는지 글자가 삐뚤빼뚤했다.
- 거래가 성사될 경우 짐마차는 전부 제 쪽에서 준비하고 빵과 달걀도 서비스로 실어 보내겠습니다. 시간이 나시거든 품질을 확인하러 와 주시면 기쁠 거예요.
수확하는 모습까지 직접 보여 드리겠습니다!
항상 공녀님을 응원하는 글로리아 벨라 올림.
‘왜 나한테 이렇게 잘하지? 무도회에서도 그렇고.’
이유 없이 잘하는 사람은 없으리라 생각했기에 글로리아의 호의가 의심스러웠다.
그러다 나는 간신히 오래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10대 초반일 때. 글로리아는 시엘리나를 포함한 여러 귀족을 초청해 요리를 대접했다.
“저, 제가 만든 파이 드셔 보세요!”
단호박이나 밀가루 반죽에 싱싱한 과일을 올려 겉보기에는 그럴듯한 파이였다. 귀족들은 하하호호 웃으며 포크를 들었다.
“어머. 맛있어 보이네요.”
“그럼 어디 한입을….”
맛을 본 귀족들은 충격을 받았다. 당장 파이를 뱉고 싶었으나 체면을 생각해 그러지 못하고 장식용 과일만 깨작거렸다. 누군가 이 파이에 대한 감상을 먼저 말해 주길 기다릴 뿐이었다.
묘한 반응을 알아차린 글로리아는 점점 시무룩해졌다.
“저기. 하나 더 먹을 수 있을까요?”
그때 시엘리나가 침묵을 깨고 말했다.
“하나 더요?”
“네.”
“여, 여기요.”
시엘리나는 홀린 듯이 파이 한 접시를 다 해치웠다. 글로리아는 자신의 마음이 상하지 않도록 시엘리나가 일부러 배려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 공녀님. 무리하지 않으셔도 돼요.”
“아뇨. 정말 맛있어요.”
그랬다. 여동생 라멜로부터 형편없는 요리를 대접받던 시엘리나에게, 글로리아의 요리는 흠잡을 데 없이 훌륭하게 느껴졌다.
나는 그런 사정을 굳이 글로리아에게 말하지는 않기로 했다.
***
답신을 보낸 후 나와 에카르트는 벨라 영지로 출발했다. 원래 초청하는 측에서 따로 마차를 보내 주기도 하지만, 그런 형식적인 건 미리 거절했다.
대신 글로리아가 영지 입구까지 마중을 나왔다. 내 마차가 보이자 호위 기사들과 함께 달려오며 말이다. 바람에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휘날려서 약간 무서웠다.
“저 여자군요. 범상치 않아 보입니다.”
“그러…네요. 마차를 세우기도 애매한데.”
우여곡절 끝에 입구까지 도착했을 때. 글로리아는 옆에 마련된 마차 한 대를 가리키며 말했다.
“어서 오세요! 오느라 힘들지는 않으셨나요? 성까지 안전히 모시겠습니다.”
보통 귀족들은 안전을 위해 벽이 있는 튼튼한 마차를 사용했다. 하지만 글로리아가 보여 준 마차는 햇빛을 가리는 지붕이 있고 모두 트였다.
가면서 논과 밭 같은 풍경을 보여 주기 위해 따로 준비한 모양이었다.
“그래요.”
“엘린, 제 손을 잡으시지요.”
에카르트는 그 짧은 시간조차 나를 섬세하게 에스코트했다. 글로리아는 그 모습을 니나와 똑같은 반짝반짝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마차가 황금색 밭을 지나가자 농민들이 우리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글로리아는 성으로 가는 내내 틈틈이 작물을 어필했다.
“영지에서 나는 밀로 만든 빵은 정말 풍미가 남다르답니다.”
“논과 밭 근처에서는 가축을 기르지 않아서 더 위생적이에요.”
“쌀은 생으로 씹어 먹어도 괜찮아요! 해충을 잡아먹는 곤충도 동방에서 수입했고요.”
제국 동부는 북부처럼 춥지 않으니 여러 작물을 기르기 좋은 환경이었다. 물론 잘 관리한 벨라 가문의 공도 컸다.
여러 창고에서 충분히 좋은 품질을 확인한 후. 나는 글로리아와 간단한 계약 내용을 합의했다.
“밀과 쌀 포대 각각 서른 자루씩. 귀리 씨앗은 식용과 재배용을 따로 분류해 보내 주세요.”
“네. 좋은 품질로 엄선해 보내 드릴게요. 공작령과 계약을 맺게 돼서 정말 기뻐요.”
우리는 계약서 두 장에 서명하고 나눠 가졌다. 거래가 끝난 후. 글로리아는 내게 마치 “라면 먹고 갈래?”처럼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루솔릿 공녀님. 연회장에서 국밥 드시고 가실래요?”
“…국밥?”
“네. 소의 뼈를 우려낸 국물과 삶은 소고기를 두툼하게 썰어 넣은 요리죠. 취향에 따라 소금과 파를 더 곁들여도 좋고요.”
“좋아요.”
나는 순간 에카르트의 의견을 묻는 것도 잊었다. 옆에서 으슥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 동방 음식에 대한 미련을 못 버렸군요.”
“에카르트. 같이 먹어요. 네?”
내가 그의 팔짱을 끼자 그는 더 이상 튕기지 않고 수락했다.
“그럼 얼른 드시러 가요!”
글로리아는 내게 환히 웃다가 흠칫하더니 눈을 내리깔고 숨소리도 안 내며 앞서서 걸었다.
우리는 연회장에 도착했다. 화이트 테이블 위에 놓인 놋그릇. 그 안에 따끈따끈해 보이는 국밥을 보니 저절로 침을 꿀꺽 삼켰다.
“부족한 실력을 약간이나마 발휘해 봤어요.”
“영애가 정말 직접 하셨어요?”
“네! 동방의 도자기 장인에게서 놋쇠로 만든 그릇도 구하고요.”
“벨라 영애. 아니, 글로리아. 어쩜 이렇게 완벽할 수가! 정말 제국에 큰 공헌을 하셨어요.”
나는 그녀의 손을 붙잡고 제발 동방 음식점을 차려 달라고 간청하고 싶었다.
“혹시 머리카락이 국에 닿을까 봐 머리끈도 준비했어요. 필요하시면 제가 묶어 드릴-”
“엘린. 제가 하겠습니다.”
에카르트는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더니 머리카락을 슥슥 손으로 빗어 넘겨 직접 묶었다.
“어머. 솜씨가 좋으신걸요!”
‘네. 요즘 집착이 심해져서 하녀들이 만지는 것도 싫다고 내 머리카락 손질하는 것도 연습했거든요.’
나는 그런 속사정을 삼키며 숟가락과 젓가락을 쥐었다.
“불지 않도록 조금씩 덜어서 드세요. 아직 뜨거우니까 조심하시고요!”
“네, 네.”
나는 얼른 국밥을 떠서 입에 넣었다. 속이 따뜻하고 마음이 훈훈해지는 맛! 국물까지 전부 마셨다.
포장되는지 묻고 싶을 정도였다. 다만 김치가 없어서 약간 아쉬웠다.
“여기에 무를 깍둑깍둑 썰어 동방의 향신료와 버무리면 궁합이 좋을 것 같아요.”
“어머! 다음에 꼭 그렇게 해 볼게요.”
입가심용으로 양치와 비슷한 효능이 있는 시원한 박하사탕이 나왔다. 이 완벽한 조합에 히죽 웃음이 나올 뻔했지만 공작으로서 체통을 지켰다.
“글로리아. 정말 훌륭한 식사였어요.”
“저… 마음에 들으시면 다음에도 와 주세요. 밀가루를 향신료와 함께 반죽해서 쫄깃한 면을 만들었거든요. 그리고 삶은 닭으로 육수를 내 파와 곁들였죠. 그 요리는 이름하여!”
“닭칼국수?”
“어머. 역시 총명하세요! 참고로 그 동방 향신료를 곁들인 무절임도 만들었답니다.”
글로리아는 너무 즐거워 보였고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래요, 글로리아. 꼭 올게요. 언제 올까요?”
하하호호 담소를 나누던 그때 에카르트가 끼어들었다.
“엘린. 그 요리, 제가 더 맛있게 할 수 있습니다.”
아무래도 에카르트가 이렇게 글로리아를 견제하다가는, 닭칼국수를 못 먹을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