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미랑이 눈에 띄지 않도록 은둔 능력을 사용하여 우리를 루솔릿 공작령까지 데려다줬다.
“수고했어요.”
“그려. 힉, 저기 마수가 아직도!”
미랑은 가능한 빨리 돌아가고 싶었는지 후다닥 사라졌다. 균열은 이미 사라지고 중하급 마수만 남았을 뿐인데 그래도 무서운 모양이었다.
내가 구미호이자 영물답지 못하다고 혀를 차던 그때 하녀들이 불쑥 다가와 무릎을 꿇었다.
“공녀님! 계속 여기 계시면 안 되나요?”
“갑자기 마수들이 나왔는데… 공녀님이 아니었다면 죽을 뻔했어요.”
많이 잡아도 실라와 비슷한 또래였다. 루솔릿 공작가의 누구도 이들의 안전을 신경 쓰지 않았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
“최대한 빨리 상황을 해결해 볼게. 바깥은 아직 마수가 남아 있으니 기다리고 있어.”
하녀들을 안심시키던 그때 블랑세와 다비온이 우리를 발견하고 달려왔다.
“시엘! 영지 내의 균열이 전부 사라졌어.”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입니다. 실라 양의 도움을 받아 대부분의 주민을 대피시켰습니다. 재산 피해 외에 인명 피해는 크지 않아 보입니다. 공왕께서 균열을 빠르게 없앤 덕분이죠.”
“다행이네요. 루솔릿 공작과 리타는요?”
“그들은 긴급 체포했습니다. 하지만 라멜과 리셀은 추적 중입니다.”
나는 신전에서 있던 일을 일단 짧게 보고했다.
“신관들이 쓰러져 있던데 큰 이상은 없어 보여서 일단 왔어요. 리타가 불러내려던 악마도 완전히 사라지게 했고요. 아마 그래서 균열이 사라졌을 거예요.”
“대체 어떻게…?”
“우리 엘린은 못하는 게 없으시지.”
에카르트와 내가 동료이자 연인으로서 눈빛을 주고받았다. 이번에는 우리가 자세한 이야기를 전할 차례였다.
루솔릿 공작성 로비에 마련된 옆방. 시엘리나가 말을 할수록 다비온의 표정이 점점 굳어 갔다.
“그런….”
다비온은 괜찮은지 물어보려다가 쓸모없는 질문 같아서 관뒀다.
“만약 황실에서 설명을 요구하면….”
“사실대로 말할 거다.”
“에카르트! 진담이야?”
“문제라도?”
“초대 공작님은 후대를 지키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어! 어째서 모든 내용을 밝히려는지 모르겠어.”
그러나 에카르트의 판단은 달랐다.
시엘리나가 전부 그의 뜻대로 하겠다고 말했지만. 에카르트는 크로덴 공작가의 자작극을 그녀까지 짊어지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 일을 아예 매듭짓고 싶었다.
다비온은 언제나처럼 에카르트를 말릴 수 없는 걸 깨달았다.
“하아. 결국 네 뜻대로 하겠지.”
“이해해서 고맙군.”
시엘리나는 그저 에카르트의 손을 잡아 주었다.
***
날이 완전히 밝을 무렵 우리는 미랑을 타고 북부로 가 보았다. 악마를 퇴치한 후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북부의 산맥을 뒤덮었던 안개는 완전히 사라진 상태이었다.
“당분간 경계를 유지해. 별 이상이 없을 시 산맥의 남은 마수들을 토벌하고 자원이 있는지 확인하도록.”
“알겠습니다!”
프롬은 기합이 단단히 들어간 채 우렁차게 답했다.
우리는 균열이 존재하던 호수도 들렀다.
호수는 마수가 떠나니 스스로 물을 정화했다. 내가 호수의 물을 손가락으로 찍어 맛을 보려 하자 에카르트가 날름 내 손가락을 핥았다.
“맑군요. 호수의 물을 요새까지 끌어올 수 있겠습니다.”
그 외에도 근방의 지대를 둘러보았다.
에카르트는 요새 주변과 기사단을 중심으로 마을을 만들 생각이었다.
이클립스 기사단 역시 공작성과 북부를 번갈아 가며 근무했는데, 상당수는 고향인 북부에 정착해 원주민으로서 살아가고 싶어 하는 듯했다.
나는 북부를 둘러보는 에카르트의 눈빛에서 기대를 읽었다. 앞으로 변화할 땅에 대한 희망. 기분 좋은 바람이 불어오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에카르트의 이상을 함께 실현시키고 싶었다.
***
“놓, 놓아라! 감히 내가 누군 줄 알고!”
루솔릿 공작은 공작성 지하에서.
“아잇. 나는 왜 잡아가는 거예요!”
공작 부인 리셀은 숲 끝자락에서 검거되어, 리타와 함께 곧바로 황실 감옥으로 이송되었다. 리차드를 비롯한 공작령 고용인 일부와 라멜의 행방은 수색 중이었다. 그들을 찾는다면 곧장 심판을 진행하기로 했다.
한편 시엘리나는 리타의 흑마법을 저지하고, 그 진원지를 밝혀내 흑마법을 해결한 영웅이 되었다. 하지만 사람들에게는 여전한 의문이 남았다.
“대체 왜 그 마법이 신전에 있다는 것인가?”
신전 관계자들 역시 밝혀내지 못했다. 그래서 시엘리나와 에카르트 역시 북부에서 돌아오기가 무섭게 황실의 소환을 받았다.
나와 에카르트는 간단한 소지품 검사를 마치고 황실 회의장으로 들어갔다.
딱딱한 분위기 속에서 나는 긴장이 되었다. 어떻게든 에카르트에게 불똥이 튀지 않게 해야 했으니 말이다.
에카르트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테이블 아래로 내 손을 잡고는 느긋하게 쓰다듬었다.
“크로덴 공작. 신전 지하의 마법진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해 보시오.”
황후의 요구에 에카르트가 진실을 섞어서 답했다.
“초대 크로덴 공작은 마검과 계약하던 당시 제국을 지키기 위해 악마의 힘을 빌렸습니다. 그 영향으로 북부에 균열이 발생했고, 저주는 계속 계승돼 후대 크로덴 공작들까지 전부 동원됐죠.”
모두가 웅성거렸고 몇몇이 화를 냈다.
“아니. 여태 마수 출몰이 크로덴 공작가의 자작극이었단 말입니까?”
“잘도 수호자 행세를!”
“나조차 알지 못했는데 자작극이라.”
에카르트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질문을 던진 귀족들을 즉시 매장시켰다.
“그대들이 공작성으로 첩자를 보내고도 모른 척하는 게 자작극이지.”
“어, 언제 보냈다는 말씀이신지요?”
“이렇게 발뺌할까 봐 뒷돈을 준 증거도 다 수습했네. 그 첩자는 아직 잘 보관하고 있으니 찾아가고 싶다면 지금이라도 말하게.”
“크로덴 공작. 주제와 관련된 이야기만 하도록.”
황후가 지적했으나 에카르트는 전혀 무관한 이야기는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실례했습니다. 내 부모는 견제당하다가 돌아가셨고 나 역시 평생 북부를 수호했음에도 여러 위협을 받은 건 모두가 알 겁니다. 그런 와중 자작극이라는 의심을 받으니 말이 길어졌군요.”
선대 공작 부부를 언급하자 회의장이 숙연해졌다. 에카르트를 비판하려는 귀족들 역시 뒤가 깨끗하지 않았기에 혹시 자신의 치부까지 밝혀질까 봐 말을 아꼈다.
“저는 출정도 특혜도 바란 적 없습니다. 애초에 내게 필요했던 건… 내 마음을 알아줄 사람 단 한 명뿐이었으니까.”
에카르트가 나를 응시하며 말했고 갑자기 순정적인 모습을 본 귀족들은 입이 떡 벌어졌다. 이런 이야기까지 하게 될 줄 몰라서 내 얼굴도 저절로 붉어졌다.
다비온이 아예 대놓고 편을 들어줬다.
“크로덴 공작은 북부 출전 외에도 루솔릿 영지와 그 인근의 도적 떼도 소탕하고 전투에도 다녀오는 등 큰 공헌을 하였습니다. 항상 제국을 위해 최선을 다해 준 그에게 이번 사태에 대한 책임을 묻는 건 부당합니다.”
더 이상 에카르트를 흠잡을 수 없게 되자 귀족들의 타깃은 은근슬쩍 나로 바뀌었다.
“시스 자작령의 소악마는 정복했으면서 어찌 그 악마는 여태 알아보지 못했습니까?”
“소악마는 정령에 가까웠다면 북부와 루솔릿 공작령에 해를 입힌 악마는 초월적인 종. 상상 이상의 힘을 가졌습니다. 저의 상식으로도 알아차릴 수 없었죠.”
“한데 정말 남동생의 소행을 몰랐다고요?”
“네. 저와 리타는 오레이칼 왕국에서 대련한 후 어떤 교류도 없었습니다.”
“그럼 리타 공자의 이야기를 들어 봐야겠군요.”
황후가 눈짓을 하자 기사들이 문을 열었고 여러 구속구에 속박당한 리타가 들어왔다. 회색 죄수복을 입은 그는 이전에 봤을 때보다 더욱 눈가가 움푹 꺼져 있었다.
“공자의 실험에 공녀는 연관 없는가?”
나는 당연히 리타가 발뺌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부정하지 않았다.
“네! 전부 다 제가 한 일입니다! 저 해충만 아니었다면… 더 강력한 힘을 이끌어 낼 수 있었을 텐데!”
리타에게는 지금의 상황과 입장 따위는 상관이 없었던 것이다. 그저 자신의 실력을 입증하는 게 더 중요했다.
그것이 여러 사람을 위험에 처하게 하고 자신의 앞길까지 막아도 말이다.
“저 해충이 못했던 걸, 누구도 몰랐던 걸 내가 밝혀냈다고요!”
은색의 눈동자가 광기로 번득였고 입꼬리는 쭉 올라갔다. 일부 귀족들이 공포를 느꼈고 황후가 냉랭하게 말했다.
“다시 가둬.”
기사들이 다시 리타를 끌고 갔다. 다비온은 우리가 더 이상 추궁받지 못하도록 화제를 돌렸다.
“현재 루솔릿 공작령은 여러 구호물자가 필요합니다. 한데 주요 인력도 횡령과 연관되어 조사를 받고 있거나 추적 중이죠.”
“전하, 그렇다면 제가 이웃 영지로서 발 벗고 돕겠습니다!”
“제 보좌관을 지원하게 해 주시지요.”
귀족들은 이 기회에 루솔릿 공작령을 조금이라도 차지하려는 하이에나처럼 나섰다.
“적극적인 지원 감사합니다만 다행히 적임자를 알고 있죠. 시엘리나 님, 공작령을 도왔으면 합니다.”
이런 말은 없었는데. 황후와도 미리 예고된 일이 아니었는지 그녀 역시 동요했다.
***
회의가 끝난 후 아렌다는 다비온과 함께 황후궁으로 돌아왔다.
에카르트 크로덴은 원래부터 경계하던 세력이었다. 하나 시엘리나 루솔릿은 삼사 년 전만 해도 예상치 못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에카르트와 엮이며 능력을 드러내고 있었다. 에카르트 한 명으로도 거슬렸는데 둘로 늘어나다니.
아렌다는 우선 정리할 수 있는 곁가지부터 쳐 내기로 했다.
“잘도 빠져나가더군.”
“…….”
“신전이 지하의 공간을 몰랐을 리 있느냐. 크로덴 공작가와 결탁했다면 책임을 져야겠지.”
악마가 만들어 낸 교역로조차 시엘리나를 제외한 모두가 여태 알아내지 못했다. 하지만 신전에게 책임을 묻겠다니?
다비온은 아렌다의 의중을 눈치챘다. 신전이 와해가 되길 바라는 것이다.
“어머니. 신전은 가장 큰 복지 기관 중 하나며 기부금 내역을 전부 투명하게 공개했습니다. 평판이 일시적으로 떨어지더라도 앞으로 도움을 받는 사람들은 분명 존재할-”
“다비온.”
아렌다가 말을 끊으며 눈빛으로 경고했다.
“자꾸 안 하던 짓을 하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