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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물 조연은 도망치고 싶다-90화 (90/115)

#90화

나도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본다면 같은 반응을 보일 테지. 내가 얼마나 그를 사랑하는지, 그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깨닫자 이상하게도 더 이상 겁이 나지 않았다.

“제가 에카르트를 두고 어떻게 잘못되겠어요?”

나는 자유로워진 손목으로 마법진을 마저 따라 그렸다.

마침내 마법진을 완성하자 검은 안개가 천장을 채울 정도로 꽉 찼다.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고 주변의 풍경이 모두 암흑으로 바뀌었다.

그 속에서 두 개의 빛이 떠올랐다. 악마는 붉은색 눈동자와 파란색 눈동자를 갖고 있었다.

악마는 검은색 심장을 닮았다. 동맥과 정맥이 있고 펄떡펄떡 맥이 뛰는 심장.

“나를 불러냈구나.”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네. 다른 사람의 몸에 기생하고 듣기 싫은 목소리만 들려주더니.”

“실제로 보니 어떠하지?”

“징그러워.”

그러자 눈이 가느다랗게 휘어졌다.

“이전에 누가 널 불러냈지?”

“그것은 중요치 않다. 필멸자여, 나와 계약하자! 네 영혼이 탐나는구나.”

악마가 무슨 말로 꾀어내든 나는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저주와 같은 그것은 내가 아니라 에카르트에게 말했다.

“에카르트 크로덴. 네 부모님이 있던 시간으로 돌려보내 주마.”

“에카르트!”

순식간에 강력한 기운이 에카르트를 휩싸더니 마치 알처럼 견고한 형태로 변했다.

“에카르트! 내가 여기 있어요. 나는 당신을 떠나지 않아요.”

나는 단단한 막을 두드리며 외쳤다. 목소리가 전해질지 모르지만 나는 원작과 달라진 그를 믿었다.

내가 아는 에카르트는 누구보다도 강하고 나를 사랑하며 현재를 소중히 생각하는 남자였다.

***

“어머니?”

악마는 그의 기억을 헤집으며 부모와 함께하던 시간을 필름처럼 보여 줬다.

처음 검술을 칭찬받았을 때.

함께 손을 잡고 여행을 갔을 때.

생일에 부모님이 직접 만들어 준 케이크를 먹었을 때.

다비온을 때려서 혼이 났을 때.

북부에서 함께 마수를 소탕하다 다쳐서 걱정받았을 때.

그 외에 그가 행복하다고 느꼈을 유년시절의 추억을 보여 주었다.

“그래. 네가 원하는 시간으로 되돌려 줄게.”

악마는 에카르트에게 달콤하게 속삭였다. 하지만 그 모든 기억들 속에는 가장 중요한 사람이 없었다.

“이때는… 엘린이 없어.”

시엘리나에 대해 생각하면 어떤 한 가지 장면만을 떠올릴 수 없었다.

어느 순간 어느 시간, 무엇을 생각하든지 좋았다. 도망쳤던 그때는 고통스러웠지만 함께하는 시간 동안 더 큰 신뢰를 쌓아 가고 있었다.

에카르트는 부모를 그대로 지나쳐 오직 앞만 보고 걸었다.

시엘리나가 있는 곳.

그곳이 자신이 있어야 할 유일한 장소였다.

***

악마는 여러 나라의 언어로 욕설을 했다. 에카르트가 너무나도 빨리, 너무나도 쉽게 장막을 찢고 나온 것이다.

“에카르트!”

나는 그가 저주 따위에 현혹당하지 않아서 기뻤다. 하지만 그를 반길 틈도 없이 바닥에 갑자기 경사가 생겼다.

“엘린!”

순식간에 내가 서 있던 곳이 무너졌지만 추락하지 않았다. 에카르트가 내 손을 꼭 붙잡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래로 열기가 느껴져 흘긋 내려다보자 검붉은 용암이 흘러가고 있었다.

‘환상 마법이 아니야. 이 장소는 완전히 이 악마에게 지배당하고 있어.’

“엘린. 꼭 잡으십시오.”

에카르트가 나를 끌어 올렸고 나는 정신을 차렸다.

주변에 금이 가더니 서로 다른 계절이 같은 공간에 드러났다.

오른쪽으로는 파란 하늘 위에서 낙엽이 흩날리고 왼쪽에는 밤하늘 속에 폭설이 쏟아졌다.

그러더니 꽃잎이 확 불어오다가 매미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수백 년 전의 유적이 펼쳐졌다. 시공간이 전부 조각조각 나는 중이었다.

체닐은 말했다. 이전 세계의 내가 알고 있다고. 소악마가 말했다. 이름을 알면 악마를 길들일 수 있다고.

‘이 악마의 이름을 기억해야 해.’

나는 이 세계를 창조한 작가의 차기작도 읽었다. 그것의 작품 후기가 떠올랐다.

<사실 캐릭터 이름 정하는 게 너무 힘들어서, 이전 작품에서 쓰려던 악마 이름을 사용했답니다!>

그 작품의 이름은 바로 <빛이 사라진 제국>. 나는 이 악마의 이름을 가까스로 떠올려 내 불렀다.

“…엔하르토 델피늄 아르누제블.”

“네가… 어떻게 그 이름을.”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들렸고 악마는 내게 악담을 쏟아부었다.

“저주한다, 증오한다, 갈기갈기 찢어 버릴 것이다!”

귓가를 아니, 온몸이 산산조각이 날 듯한 소리에 에카르트가 내 귀를 막았고 나도 그의 귀를 막았다. 나는 악마를 향해 말했다.

“엔하르토 델피늄 아르누제블. 너의 언령은 아무 효력도 갖지 못하며, 누구도 네 목소리를 들을 수 없어.”

“아니야. 나는… 나는!”

“너는 어느 곳에서도 영향을 주고받지 못하는 약한 존재야! 흔적도 없이 영원히 사라져. 이 세계는 어떤 사악한 존재도 발을 들이지 못할 것이다.”

악마가 절규와 함께 점점 작아지더니 눈동자도 마침내 커졌다가 질끈 감겼다.

“엘린. 악마를 퇴치했습니다!”

“다 된 걸까요?”

사라진 자리에 신비한 보라색의 빛이 감돌았다. 그 빛은 내게 갑작스레 스며들었고… 나는 비가 내리는 거리에 혼자 남겨졌다.

환상이라는 것을 알아차리자 주변에 번개가 치는 듯한 따끔한 감각이 느껴졌다. 그러다 주변이 고요해졌고 이내 향기처럼 희미해졌다.

‘…방금 뭐였지?’

“심안이에요.”

그 여린 목소리는 에카르트의 것이 아니었다.

다시금 내가 꿈에서 보았던 그 은하수 같은 풍경이 이 자리에 펼쳐졌다. 바로 체닐이었다.

“심안?”

“집중해서 능력을 발동하면 다른 사람의 상태를 파악할 수 있어요. 현재의 상태 이상은 물론 잠복된 독까지도요.”

그래서 마음의 눈이라고 불리는 건가. 다른 세계의 전설에 따르면 악마를 퇴치한 자는 특별한 보물이나 능력을 얻었다는데 그런 모양이다.

“다만 상당한 마력을 소모하니 아껴 사용하시길.”

“…체닐은 어떻게 되는 거예요?”

“생과 사는 미지의 영역이라 인간에게는 알려 줄 수 없답니다. 하지만 당신은 초월적인 힘을 갖게 되었으니 세계의 법칙을 조금만 귀띔해 드리죠. 나는… 기억을 잃고 새로운 존재로 환생할 거예요.”

“그렇…군요.”

“언젠가 다시 만나 당신을 알아보면 꼭 은혜를 갚겠습니다. 아직 많은 일들이 남았지만 두 사람은 잘 헤쳐 나갈 수 있어요.”

그리고 마치 우리를 축복하듯 따스한 빛을 흩뿌리고는 사라졌다. 나는 그녀의 새로운 삶이 행복하길 바랐다.

“에카르트. 심안을 얻었다는 사실은 숨겨야겠어요.”

이런 신비한 능력이 알려졌다가는 복잡한 일에 얽히기 십상이니 말이다.

“그럼 저와 당신만 아는 비밀이 생겼군요.”

에카르트가 은밀하고 야릇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고는 내 능력을 눈독 들이는 자는 전부 제거하겠다고 으슥하게 덧붙였다.

그때 바닥에 말라붙은 핏방울이 움직였다. 핏방울은 허공에 둥실 떠올라 누군가의 모습이 되었다.

“나의 후손이여.”

검은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고 붉은 눈동자를 가진 남자였다. 눈꼬리가 내려갔지만 반듯한 이목구비는 에카르트와 비슷한 인상이었다.

에카르트는 침착한 목소리로 물어보았다.

“…선조?”

“나의 흔적을 불러일으켰다는 건 결국 그 악마를 퇴치했다는 뜻이겠지.”

선조는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그놈과 계약했다.”

“…왜?”

“크로덴 가문은 남들보다 강한 체력과 마력을 타고나 세상의 두려움을 샀지. 그러나… 가문의 힘이 약해져 다른 가문에게 흡수될 위기에 처했다.”

그때 북부에 마수가 쏟아져 나오는 균열이 나타났고, 황실은 수도를 지키고자 전설의 검이라고 불리는 마검을 깨우기로 했다.

마검은 선대 크로덴 가주에게 반응했고 크로덴 공작가는 복권에 성공했다.

“나는 균열을 막으며 이것이 악마의 힘이라는 걸 깨달았다.”

“…….”

“하지만 황제는 크로덴 공작이 균열을 막은 후 제거하려고 했어. 그랬기에 나는… 다시 이 악마를 불러내 균열을 발생시켜 후손들을 북부의 수호자로 만들었다.”

“개소리 집어치워! 정말 그게 최선이었다고 생각하나?”

“…….”

“내가 묻잖아!”

“미안하다. 이 사실을 가족에게 털어놓았을 때… 딸의 실망스러운 표정을 보고 깨달았지. 그 아이는 존경하던 아버지가 그런 길을 택했던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했고.”

“당연하지 않겠어!”

“나는 뒤늦게 실수를 조금이나마 돌이킬 방법을 찾았으니, 바로 내 영혼의 일부를 이 자리에 남기는 것이었다.”

“누군가 밝혀내지 않았다면 계속 이 멍청한 짓을 하고 있었겠군.”

“제국의 수호자가 된 후로 내 가족은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결국 그 대가는 나의 딸과 후손이 치르게 됐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에게도.”

“당신은 가족을 지키려고 했다지만… 우린 많은 걸 잃고 살아왔어!”

에카르트가 거센 음성으로 말한 후로 둘은 아무 말이 없었다. 마법의 시간이 다 되었는지 선조는 점점 희미해져 갔다.

“…나를 용서하지 않아도 좋다. 염치없지만 그대가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지.”

“이기적인 인간 같으니. 끝까지 자기 할 말만 하는군.”

결국 참지 못한 에카르트는 마검을 들고 선조를 갈라 버렸다. 안개가 반쪽으로 흩어지듯 그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에카르트가 집어던진 마검이 벽에 부딪혀 큰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북부 토벌이… 의미 없는 일이었다니.”

크로덴 가문이 수백 년간 영웅 취급을 받으며 해 온 일이었고 수많은 병사가 죽었다.

에카르트가 얼마나 허무하고 괴로울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나는 그의 감정이 조금이라도 나아지길 바라며 안아 주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엘린. 저… 무의미하게 싸우는 짓은 이제 그만둘 겁니다. 수호자 행세도 싫습니다.”

“그 말씀은.”

“제국에 전부 사실대로 말하려고 합니다. 황실의 견제 따위 받아도 상관없고 모두를 적으로 돌려도 괜찮습니다.”

“…….”

“그저 당신만 제 편이 되어 준다면요.”

제국은 오늘 발생한 균열과 신전의 연관 관계를 파악할 것이다.

내가 이번 일에 대해 침묵하더라도… 리타가 지하에서 발견한 안개에 대해 자백하면 크로덴 가문은 의심을 사겠지.

게다가 북부 역시 더 이상 마수가 출몰하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그동안 크로덴 가문이 쌓아 온 업적도 흔들리고 사람들이 에카르트에게 등을 돌릴지도 모른다.

‘괜찮을까.’

그런 걱정이 들었지만 그를 먼저 안심하게 해 주고 싶었다. 괜찮지 않다면 괜찮게 만들어 줄 것이다. 나는 기꺼이 그럴 자신과 자격이 있었다.

“에카르트가 무슨 결정을 하든 내가 같이 있을게요. 제국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도 되고 여기가 싫다면 같이 갈 곳을 찾아봐요.”

“저는… 그저 엘린과 함께 있고 싶습니다. 어디든지요.”

에카르트가 더 나를 깊게 끌어안았다. 내 어깨에 뜨거운 뭔가 떨어졌고 나는 그가 조금이라도 진정될 때까지 가만히 숨을 골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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