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피폐물 조연은 도망치고 싶다-89화 (89/115)

#89화

“그래.”

블랑세가 울 것 같은 얼굴로 말했다.

“미안해. 내가 괜히 지하를 알아내서… 괜히 너까지 휘말리고. 차라리 그대로 두었을 것을.”

“블랑세. 비밀을 알아낸 것도 너고, 마법진을 풀어낸 것도 너야. 네가 밝혀내고 연구하려는 시도는 틀리지 않았어. 이건 예측할 수 없던 일이야.”

나 역시 떨렸지만 블랑세의 어깨를 잡고 침착하게 말했다.

“지금은 피해를 줄여야 해.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았어.”

“응. 나는 부상자들을 치료할게.”

“좋아.”

전력이라고는 몇 없었다. 공작성의 기사들은 전투 훈련을 받은 지 오래되었던 것인지 검을 쥔 자세조차 엉성했다.

“다, 다들 공격해!”

“으악!”

기사단은 진열도 갖추지 못하고 마수를 공격하는 시늉을 하다가 공작을 따라 도주했다. 아무리 전쟁과 거리가 먼 지역이더라도 최소한 군사력은 갖춰야 할 텐데.

“가관이군요. 저런 놈들도 기사라고 녹봉을 받았다니.”

에카르트가 조롱하며 이쪽을 향해 달려드는 마수를 베어 냈다. 일단은 눈앞의 마수를 처치하는 동안 다비온이 다가와 말했다.

“호위 마법사를 보내 황실에 지원 요청을 했습니다. 10분 내로 다른 마법사들과 함께 공작성에 결계를 만들 것이오.”

“감사합니다. 하지만 멀리 있는 사람까지 공작성으로 대피할 수 없어요. 14구역까지 결계를 설치하도록 부탁드립니다.”

“네. 마법사들에게 좌표를 다르게 설정하라 하겠소.”

“그럼… 바로 주민들에게 상황을 전달하겠습니다. 실라!”

마수가 실라의 앞에 성큼 다가왔고 나는 얼른 마법을 시전하여 마수를 반대 방향으로 쓰러뜨렸다.

“가, 감사합니다!”

“실라! 비상 상황을 알리는 폭죽. 붉은색 맞지?”

“네, 네.”

전시 상황을 대비해 여러 영지에서도 공통적으로 사용하는 신호였다. 이 와중에 폭죽을 찾을 수는 없으니 마법으로 대신할 수밖에.

나는 뚫려 있는 벽까지 나아갔다. 마을 곳곳에서 균열이 발생하고 있었다.

‘아직 늦지 않았어.’

나는 일직선의 마력을 하늘을 향해 쏘아 올렸다.

그리고 그것들끼리 충돌을 일으켜 몇 번이고 연속적인 폭발음을 내며 불꽃의 역할을 했다.

“실라! 곧 황실 마법사들이 공작성과 공작령 각 구역마다 결계를 설치할 거야. 최대한 많은 주민이 결계 안으로 모이도록 대피시켜.”

“네!”

“공작성의 모든 마차와 말을 빌려도 돼. 손님들 것도 상관없으니까.”

“알겠습니다!”

실라는 곧 마음을 굳게 먹고 다른 하녀들과 기사단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나는 솟구치는 빛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 빛을 확인하러 가야겠어요.”

“엘린. 같이 갑시다.”

당연하게도 에카르트는 나와 함께하길 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의 대화를 들은 블랑세가 말했다.

“그럼 여긴 내게 맡겨 둬, 시엘. 지원군이 오면 전하와 바로 따라갈게.”

“고마워.”

나는 에카르트의 손을 꼭 잡고 로비 밖으로 빠져나왔다.

걸어 다니는 바위. 다리가 나무처럼 커다래 집채만 한 거미. 잔디밭을 휘저으며 구르는 거대한 벌레들….

“미랑!”

“히이익.”

소환된 미랑은 날뛰는 마수들을 보자 바람 빠진 풍선 같은 소리를 냈다.

“저 빛기둥 보이죠? 거기까지 달려 주세요. 빨리!”

“아, 알았다.”

나와 에카르트는 미랑의 등 위에 올라탔다.

지붕이 낮은 집이 휙휙 지나갔다. 쥐나 동물들은 검은 기둥의 반대편으로 도망치고 있었다. 기둥 근처에 도착하자 미랑은 속도를 늦췄다.

이미 주민들이 사는 구역에도 마수가 출몰하고 있었다.

“으, 으악!”

사람들이 겁에 질린 채 도망쳤다. 나는 지팡이를 들고 곧바로 마수를 처치했다. 반 토막 난 괴수가 피를 내뿜었다.

“고, 공녀님 아니십니까!”

겁에 질린 채 도망치던 사람들이 나를 알아보았다. 나는 한번 목소리를 가다듬고 크게 말했다.

“곧 지원군이 도착할 겁니다! 영지 상황을 확인 중이니 지원군의 안내에 따라 침착하게 대피해 주세요.”

“네, 넷!”

나는 사람들을 빛기둥과 떨어지게 한 후 미랑에게서 내렸다. 검은 기둥을 향해 밤하늘보다 더 짙고 깊은 어둠이 개미 떼처럼 모여들고 있었다.

“에카르트. 주변을 지켜 주세요.”

“당신 혼자 보내라는 말씀입니까?”

“제가 주변의 기류를 통제하려면 인원이 적은 게 좋아요.”

그렇게 둘러댔지만 속내는 자칫 에카르트까지 저 사악한 힘에 휩쓸릴까 봐 걱정됐기 때문이었다. 에카르트가 내 손에 입을 맞추고 말했다.

“엘린. 부디 조심하십시오. 부르신다면, 아니 부르지 않으셔도 달려가겠습니다.”

“네. 당신도요.”

나는 든든함을 느끼고 회오리 속으로 들어갔다. 그 안은 태풍의 눈처럼 매우 고요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단추를 여러 개 풀어헤친 리타가 나를 알아보고는 크게 웃었다.

“하하! 제가, 제가 이 힘을 불러냈습니다!”

“…리타?”

“당신이 하지 못한 일을 제가 했단 말입니다!”

그의 주변에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신전에서 봤던 것과 절반 정도 유사한 모양이었다.

리타의 주변엔 사람들이 쓰러져 있었다. 그 누구에게도 생명력은 느껴지지 않았다.

시체의 피부는 전부 검게 변해 있었는데 그것이 술식이라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리타가 지하에 들어갔을까? 아니다. 리타는… 사람을 상대로 실험을 벌여 중앙 마법진의 형태를 추측해 낸 것이다.

나는 그의 천재성과 잔혹함에 놀랐다.

“당신이 내 마법진을 복제했을 때도, 대회에서 이겼을 때도, 소악마를 제압했을 때도! 여태 다 운이 좋았을 뿐이었다고요!”

“…미쳤구나.”

“나도… 나도 해낼 수 있습니다. 이 술식을 완성한다면 대마법사가-”

“아니. 못해! 내가 막을 거니까.”

더 이상 이야기를 들을 필요도 없이 내가 딱 잘라 말했다. 리타가 미친 듯이 웃다가 웃음을 싹 거두고 정색했다.

“막겠다고? 하하, 하하하! 해충 주제에 여태까지 내 앞을 막으려고만 했지.”

리타가 전력으로 내게 마법을 쏟아부었다. 펑, 퍼펑. 주변에서 크고 작은 폭발이 일어났다. 이전과 다른 힘이 섞여 있었다.

‘리타의 것이 아니야.’

나를 필멸자라고 부르던 존재의 것이다. 절반 정도만 술식이 그려졌는데도 이렇게 힘을 발휘할 수 있다니.

리타의 잔혹한 손짓에 따라 주변에서 얼음 기둥이 떨어지고 작은 불길이 붙었다.

그리고 이제야 나는 지하의 마법진이 의미하는 바를 깨달았다.

“악마구나.”

그동안 인간의 지식과 이해 범위 밖이었기에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다.

목소리를 듣고도, 북부의 안개와 마법진을 보고도!

하지만 우습게도 이 존재가 리타의 힘을 빌리니 알 수 있었다. 마치 어려운 문장을 쉽게 풀어쓴 것처럼 말이다. 내게는 여전히 리타의 수가 내다보였다.

그래서 나는 내 지팡이를 저 멀리 집어 던졌다.

“무슨?”

리타가 당황해 빈틈이 만들어진 사이 그에게 달려가 손목을 쥐었다. 곧바로 리타의 지팡이를 뺏으려 했지만 순순히 놓칠 그가 아니었다.

리타가 나를 밀쳤고 나는 그 힘을 반발력 삼아 그를 밀어 넘어뜨렸다. 서로의 마력이 부딪치고 몸싸움이 계속 이어졌다.

악마의 힘만 빌린다면 나를 쉽게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여의치 않자 리타가 이를 빠득 가는 소리가 들렸다.

“놔, 이 더러운 해충아!”

“그래. 놓아줄게.”

간신히 리타의 지팡이를 쥔 나는… 손에 마력을 싣고 지팡이를 반으로 꺾었다.

“이제 지팡이가 없으니 마법도 못 쓰겠네.”

“꺼져, 꺼지라고!”

리타가 어린아이처럼 소리를 질렀다. 무장을 해제하고 술식을 멈췄다고 해서 다가 아니었다. 위태롭게 옆을 지탱하던 벽이 무너지고 있었다.

쩌적 소리가 들리던 그때 에카르트가 달려와 괴력으로 벽을 받쳤다. 그는 힘을 싣고 반대편으로 쓰러트려 넘겼다.

“에카르트!”

“괜찮습니까?”

에카르트는 도망치려던 리타를 붙잡아 주먹으로 가격했다.

리타가 휘청하고 마도구를 꺼내어 들었지만 마검을 지배하는 자의 포스만으로 마도구가 부셔졌다.

그렇게 한 번 더 에카르트의 주먹을 맞은 리타는 그대로 기절했다.

곧 도착한 블랑세와 다비온이 주변의 시체와 마법진을 보고 놀라서 굳었다. 나는 상황을 길게 설명할 시간이 없었다.

“악마였어요.”

“악마라고요?”

“죄송해요. 그동안 저도 알아낼 수 없었어요.”

내가 셋에게 말하자 먼저 에카르트가 말했다.

“엘린. 미안해하지 마십시오.”

“…이제 다시 신전으로 가야겠어요. 어떻게 해야 할지 알 것 같아요.”

“하지만, 시엘! 술식을 풀지 못했잖아.”

체닐은 ‘다른 세계에서 온’ 나였기에 이미 알고 있다고 했다. 그 말이 드디어 이해가 갔다. 나를 필멸자라고 부르던 악마가 누구였는지.

“일단 재료 있는 대로 다 내놔.”

에카르트의 말에 다비온이 순순히 이동 마법 재료를 품에서 꺼냈다.

“이 정도면 두 명이 갈 수 있는 양이야.”

“쯧. 쪼잔한 놈.”

여러 마법사들이 공작령에 오는 데에 사용했으므로 정말 이게 전부일 것이다. 에카르트는 다비온의 손에 있는 재료를 전부 가져갔다.

“엘린. 저와 같이 갑시다.”

나는 에카르트와 블랑세 중에 누구와 함께할지 선택해야 했다.

“시엘. 공작님이 더 강하니 같이 가. 나는 여기서 사람들을 돕고 있을게.”

“그럼, 부탁할게.”

나는 리타를 감시하는 것을 다비온과 블랑세에게 맡기고 연인과 함께 신전으로 갔다.

어두운 기운이 곳곳을 잠식한 신전.

하얀 기둥과 조각상들도 검게 물들고 신관들은 쓰러져 있었다. 아직 숨이 붙어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우리는 곧바로 지하로 들어갔다.

공간은 왜곡되어 계단이 마치 파도처럼 출렁거리고 있었다. 드문드문 바닥이 꺼진 곳도 있어서 위험해 보였다.

“엘린. 제게 안기세요.”

에카르트는 나를 안고 계단 끝까지 내려갔다. 블랑세가 건네준 팔찌와 반지로 문을 열고 곧바로 중앙의 마법진에 접근했다.

‘이건 해제할 수 있는 게 아니었어.’

나는 주변의 마법진을 전부 무시한 채 중앙의 마법진에 손을 댔다. 그리고 마력을 이끌어 내 그 위를 덧대서 그렸다. 리타가 아닌 나의 손으로 발동하기 위해서였다.

“엘린.”

에카르트가 내 의도를 깨닫고 손목을 붙들었다.

“그만하십시오. 지금부터 제 뜻대로 하시지요. 제국이 어찌 되든 신경 쓰지 말고 저와 함께 떠납시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충분히 해결할 수 있어요. 만약 제가 실패할 것 같으면… 그때는 당신 뜻대로 할게요.”

나도 무서웠지만 최대한 태연한 척했다. 이건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고. 그러나 에카르트가 내 불안을 눈치채고 서늘하게 말했다.

“엘린. 혹여 당신이 잘못되면 다 죽이고 저도 자결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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