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피폐물 조연은 도망치고 싶다-88화 (88/115)

#88화

“블랑세 양. 지하의 마법진과 관련됐나요?”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고 봐요.”

“그런데 어떻게 혼자 보냅니까?”

다비온은 블랑세가 임무 중에 이탈하더라도 거절하는 대신 오직 안전만을 염려했다.

“괜찮아요. 확인하고서 바로 올 테니까. 전하야말로 괜찮겠어요?”

“비상군을 근처에도 배치하고 이동 마법 재료 역시 확보했습니다. 이쪽은 너무 걱정 마세요.”

“다행이에요.”

“…에카르트의 의견이었습니다.”

“그걸 받아들일지 말지는 전하의 결정이었죠. 그럼 이따 뵈어요. 시엘에게 이야기 전해 주세요.”

“네. 무사히 오셔야 합니다.”

그렇게 블랑세는 신전으로, 다비온은 루솔릿 공작성으로 향했다.

***

오늘의 주인공 루솔릿 공작은 손님 접대를 마치고 잠시 쉬었다. 하인들이 열심히 넥타이와 재킷을 바꿔 주던 그때 파빌이 영상석을 들고 돌아왔다.

“주인님, 영상석을 가져왔습니다.”

리셀의 외도 정황을 포착하기 위해 마차 안에 몰래 넣어 두었던 것이다. 입수하는 데에 몇 달이 걸린 귀한 영상석이었다.

‘어디.’

영상을 재생하자 리셀이 리차드와 정을 나누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흘러나왔다. 충격을 받은 루솔릿 공작에게 파빌은 결정적인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리고… 부인께서 약방에 들러 피임약도 구매했다고 하시더군요.”

“젠장!”

루솔릿 공작은 영상석을 집어던졌다. 그리고 곧 터질 것 같은 얼굴로 리셀의 방으로 향했다.

원래는 같은 방을 사용했지만 리셀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서 귀빈실에 새로운 방을 마련했다. 사 달라는 건 다 사 주고 해 달라는 건 다 해 줬건만!

그는 여태 그녀를 배려한 일들이 전부 미련하게 느껴졌다.

“리셀!”

“아, 깜짝이야. 노크 좀 해요!”

리셀은 공작이 들어오자마자 화를 냈다.

공작은 저 무시받는 눈빛을 더 견딜 수 없었기에 주먹을 꽉 쥐고는 말했다.

“내 생일 선물은?”

“…뭐래? 어린애도 아니고.”

“선물 어딨냐고!”

리셀은 한숨을 쉬고는 지금 걸고 있던 목걸이를 풀어 하녀에게 건넸다. 하녀가 떨떠름하게 목걸이를 바라보자 리셀이 혀를 차며 말했다.

“뭐해? 갖다 드려.”

“아, 아아. 네….”

하녀가 눈치를 보다가 공작에게 양손으로 공손히 목걸이를 건넸다.

“뭐 하자는 짓이야!”

루솔릿 공작은 목걸이를 쥐고는 바닥에 집어 던졌다. 그리고 분이 풀리지 않아 화장대를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쳤다.

“당신이야말로 뭐예요!”

“오늘은 내 쉰 번째 생일이야! 당신은 또 그놈과 놀아났어?”

루솔릿 공작의 침이 리셀의 얼굴에 그대로 튀었다.

“더러워, 진짜.”

“뭐, 더럽다고?”

“그래! 생긴 것도 더러워서 진짜!”

리셀 역시 버럭 소리를 지르며 일어났다. 싸움의 징조가 점점 짙어지자 하녀들은 눈치껏 나갔다.

“뭘 잘났다고 큰 소리야! 당신에게 남편 취급 못 받아도 참았어. 하지만 내 생일에도 다른 놈 품에서 놀아나다니… 도저히 못 참겠어!”

“누구와 놀아났다고 그래?”

“마차에 영상석을 놓아두었어! 내 두 눈으로 보고도 차마 말이 안 나오더군.”

“뭐? 지금 화낼 사람이 누군데. 자기가 봐놓고 말이 많아?”

“이렇게 버젓하다니. 배우자로서 미안한 기미조차 안 보이는군!”

“미안해? 웃기고 앉아있네!”

루솔릿 공작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여전히 리셀의 얼굴과 몸을 보니 욕망이 일었다.

“그래. 부인의 의무라도 해야지.”

“뭐?”

그가 리셀의 손목을 움켜쥐자, 리셀은 손을 빼내고서는 남편의 왼쪽 뺨을 세차게 내리쳤다.

그리고 구두 끝으로 공작의 다리 사이를 있는 힘껏 가격했다.

“커, 커헉!”

“짐승 같은 새끼! 생긴 것도 더럽게 생겨서 머릿속도 더럽긴. 의무니 뭐니 콱 뒈져 버려.”

리셀은 분이 풀리지 않아 공작의 반대편 뺨까지 치고 나갔다. 홀로 남은 루솔릿 공작이 하반신을 고통스럽게 움켜쥐고 꺽꺽 울었다.

리셀은 문을 쾅 닫고 성큼성큼 계단을 내려갔다.

이미 손님 대부분이 도착했고 하녀들은 음식을 나르느라 분주했다.

“마님, 단장을 다시 해 드릴게요!”

“따라오지 마!”

새된 목소리에 하녀들은 겁을 먹고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리셀은 드레스 자락을 대충 쥐고 뒷문으로 빠져나갔다. 그곳에는 리차드가 담배를 뻑뻑 피우고 있었다.

“어라, 리셀. 몰골이 왜 그래?”

“하아.”

리셀은 리차드의 담배를 뺏어 피우고 연기를 내뿜고는 말했다.

“리차드. 여기를 뜨자.”

“뭐?”

“뜨자고.”

리셀이 담배꽁초를 구두로 꾹 눌렀다.

예상치 못했던 상황에 리차드는 머리를 긁적였다. 애초에 리셀의 몸만 탐했을 뿐, 이렇게까지 책임질 생각은 없던 그였다.

“이미 돈 챙겨 놨어.”

“아!”

리셀의 말에 리차드의 안색이 조금 밝아졌다. 그러다 뒤늦게 커다란 문제가 더 남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데 당신 자식들은?”

“알아서 잘살겠지. 다 성인인데 언제까지 내가 돌봐야 해?”

“아니. 그중에 하나는….”

리차드의 입가에서 진실이 맴돌았지만 결국 상황을 악화시키고 싶지 않아 급히 말을 바꿨다.

“무, 물론 당신 마음이지. 응. 그렇고말고!”

“그래서 따라올 거야, 말 거야!”

“갈게!”

둘은 마구간으로 가서 말 두 필을 챙기고 공작성 후문으로 빠져나갔다.

애초부터 자식에게 별다른 정이 없던 데다, 루솔릿 공작의 지독한 집착 때문에 완전히 가족에게 질린 리셀이었다.

집을 떠나는 데에 단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리셀과 리차드는 공작성을 빠져나오며 숲까지 계속 달렸다.

어둑어둑한 숲에 도착했을 때. 어디선가 쩌적 땅이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말이 놀라 다리를 들었다. 리셀과 리차드가 차례로 말에서 떨어졌다.

“리셀! 괜찮아?”

“저 새끼들이 미쳤나!”

리셀이 도망가는 말을 씩씩거리며 바라보다가 신음을 냈다.

“으윽!”

“왜 그래?”

“다리를 삔 것 같아.”

리차드는 드레스를 걷고 리셀의 다리를 확인했다. 그사이 리셀은 나무 사이에서 뭔가를 목격했다.

“저기, 리차드.”

“왜?”

“저게 뭐…야?”

대충 부목을 만들던 리차드는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봤다.

5미터도 넘어 보이는 커다란 괴인이 서 있었다. 짙은 피부에 돼지처럼 생긴 얼굴과 긴 송곳니. 피부는 창백한 하얀색에 눈동자는 파란색이었다.

리차드는 그것이 다른 기사들에게 말로만 듣던 스노우 오크란 걸 깨달았다.

“제, 젠장!”

리차드는 리셀을 질질 끌고 급하게 나무 아래로 숨었다. 근처에서 쿵, 땅을 내리찍는 소리가 들렸다.

곧 오크가 괴성을 지르며 주먹으로 나무를 쳤다. 쩍 하는 소리와 함께 리셀과 리차드가 숨어 있던 나무가 꺾여 넘어갔다.

***

실라를 데리고 우리는 홀로 나왔다. 루솔릿 공작은 아까 봤을 때보다 얼굴이 부어오르고 자세도 어정쩡했다.

‘뭐 잘못 먹었나?’

공작의 옆에는 변함없이 라멜이 서 있었다. 어차피 리셀이야 가족회의에도 참석하지 않았으니 그렇다 쳐도 여태 리타가 안 보이는 게 의아했다.

주변의 귀족들도 적나라하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공작 부인은 안 보이네요.”

“불화가 있다던데.”

“뭐, 공자도 그렇고 말이죠.”

나는 곁에 있는 실라에게 조용히 물어보았다.

“실라, 그런데 리타는?”

“요즘 연구를 진행하느라 바쁘다고 들었어요.”

무슨 연구일지 의문을 품었는데 어느새 하얀 연미복 차림의 다비온도 도착했다.

루솔릿 공작과 라멜을 선두로 순식간에 여러 귀족이 모여들었다. 나는 까치발을 들고 블랑세를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하이고, 황태자님. 오셔서 이렇게 자리를 빛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역시 제국의 빛. 너무 근사하시군요.”

다비온은 귀족들에게 적당히 예를 차리고 나와 눈이 마주치자 바로 이쪽으로 오려고 했다. 하지만 라멜이 매의 눈으로 그 움직임을 포착하고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 황태자 전하께서도 오셨으니 이제 연회를 시작해요!”

곧 칵테일 잔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사람들의 시선이 루솔릿 공작을 향해 집중됐다.

“이렇게…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와 주어서 고맙습니다.”

루솔릿 공작이 그 말을 하고 잠시 아무 말도 안 하며 멍하니 있었다. 어딘가 정신이 나가 보였다.

“아빠?”

“죄송합니다. 그럼, 모두 즐겨 주시길.”

루솔릿 공작이 잔을 들어 올리자 모두 건배하고는 한 모금씩 마셨다.

곧 연회장 중앙에 자리한 오케스트라의 지휘자가 지휘봉을 움직였다. 경쾌한 곡이 시작할 때. 갑작스레 귀를 찢는 굉음이 들림과 동시에 실내의 조명도 꺼졌다.

“이벤트인가?”

“뭐지. 손님을 잔뜩 초청해 놓고는….”

“아니, 어딜 만지는 거요!”

“안 보였소!”

사람들의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지 않았다. 불길한 예감을 느끼고 창가로 다가가 밖을 바라보자… 허공 곳곳에 금이 가 있었다.

‘저주의 전조잖아! 그렇다면 아까 그 괴성은.’

마수였으리라.

공작성의 보루가 순식간에 무너지며 아래로 벽돌이 쏟아졌다.

에카르트가 순식간에 나를 자신의 뒤로 잡아끌었고 곧바로 창문이 깨졌다.

다시 불이 들어왔을 땐 파티장에 날개가 찢어진 와이번 한 마리가 들이닥쳐 있었다.

“꺄악!”

“비켜!”

도망치는 사람들. 자리에서 굳은 사람들. 테이블이 엎어지고 유리잔이 와르르 깨졌다. 와이번이 다시 날아오르기도 전에.

에카르트가 곧바로 마검을 소환해 와이번의 목을 베어 냈다. 하지만 안심하기엔 일렀다. 곧바로 다른 마수가 벽을 부수며 홀에 들이닥쳤다.

샹들리에가 요란하게 떨어지고 파티장 곳곳이 쑥대밭이 되었다.

“엘린.”

“네. 다치지 말아요.”

우리는 눈빛을 주고받고 나 역시 장식하던 목걸이를 지팡이로 바꿨다.

다비온 역시 검을 뽑아 들고 인명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마수를 베었다. 에카르트는 내 주변에서 마검을 휘둘렀다.

한편 루솔릿 공작은 아무 지시도 하지 못하고 라멜과 도망쳤다.

“시엘!”

깨진 창문으로 블랑세가 들어와 내 앞에 섰다.

“블랑세, 어떻게 된 거야?”

“좌표는 그대로야. 하지만 마법진의 힘이 약화됐어.”

“그 힘이 여기로 이동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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