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엘린 님께서 전하는 선물 또한 내 보좌관이 골랐다는군.”
“가, 감사합니다. 그것도 잘 받았습니다.”
생일 선물로 귀족들이 기피하는 물건을 줄지 고민하다가 굳이 똑같은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아서 대신 맡긴 속사정이 있지만.
그런 사적인 일까지 공작가의 신하가 챙긴다는 건 의미가 분명했다. 나는 에카르트에게 특별하며 그의 신하 또한 내가 마음대로 부린다는 뜻이다.
그러자 라멜이 끼어들어 착한 척을 했다.
“언니. 선물은 받는 상대방의 마음을 생각하며 직접 골라야 하는 것 아냐?”
“그래? 가족에게 선물을 받아 본 적 없어서 모르겠네.”
“내가 줄 때…도 있었잖아!”
“벌레 들어간 스프, 죽은 쥐, 모함. 그런 거 빼고는 없어. 정말 그게 선물이면 네 생일에도 기쁘게 받을 수 있지?”
“그, 그럼.”
“아주 애쓰는구나.”
말을 할수록 본인의 손해라는 걸 아직도 모르는지 지능이 그대로였다. 나는 라멜의 머리에 부담스러울 정도로 달린 장미를 보며 혀를 찼다.
그러다… 그 뒤의 하녀들 사이에서 익숙한 머리를 발견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지만, 익숙한 머리 스타일은 분명 실라였다.
“…실라?”
“공녀님!”
고개를 들자 내가 기억하던 얼굴이었다.
어떻게 그녀를 잊을 수 있겠는가. 내가 성전에 시험을 보고 올 수 있도록 망을 봐준 하녀인데!
동방으로 떠날 수 있도록 은행에 돈도 넣어 뒀건만 대체 왜 이런 소굴에 아직 남아 있었는지 의문이었다.
“실라, 너….”
간만에 이야기를 나누려던 그때 라멜이 실라에게 차갑게 말했다.
“가서 청소해.”
일부러 나와 실라가 만나지 못하도록 훼방하는 것 같았다. 나는 라멜의 은색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라멜. 실라는 잠시 내가 데려가야겠어.”
“고, 공녀님.”
실라는 누구의 뜻에 따라야 할지 우물쭈물 망설였다. 그러자 라멜이 귀가 따가울 정도로 윽박질렀다.
“야! 너 네 주인이 누군지 알아?”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조차 이런 태도라면 평소에 실라를 어떻게 대했을지 안 봐도 훤했다. 나는 성큼성큼 가서 실라의 손목을 잡았다.
“언니! 걘 내 하녀라고!”
“아니. 네 하녀 아니야. 내가 데려갈 거니까.”
“무슨 소리야?”
라멜이 나를 따라오려고 하자 에카르트가 막아섰다.
“꺼져.”
라멜은 겁을 먹으면서도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그러다 차마 이 자리에서 해코지하지 않을 거라고 믿었는지 또 아득바득 선을 넘었다.
“공작님. 오늘은 아빠의 생일이기도 하지만 황후 폐하께서 저를 만나 보라고 초청하신 거예요. 저는 이따 공작님께 춤 신청을 할 거고요!”
“에카르트. 어디서 개가 짖나 봐요. 뭐라고 하는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어요.”
“그러게나 말입니다. 당신 같은 천재도 이해하지 못하는 개소리이니 저도 들을 가치가 없지요.”
철저히 무시당한 라멜은 자존심이 상했지만 굴하지 않고 바닥까지 드러냈다.
“한 사람만 사랑하기엔 공작님 작위가 아깝지 않나요? 저도 사랑해 보세요. 자매 둘을 얻을 기회가 어디 흔하겠어요!”
“허. 쓰레기 같은 생각만 해서 그런지 머리에 꽂은 장미도 시들었군.”
“언니 성격 보셨죠? 주변 사람 챙기려고 하는 거. 원래 성격이 저래요. 공작님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그저 동정하는 거예요.”
“…공녀가 나불거리게 둔 이유는 하나였는데. 이제 그 이유도 사라졌으니-”
내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에카르트가 불길하게 말끝을 흐렸다. 순간 주변의 기류가 날카롭게 바뀌었다.
“꺄악!”
라멜의 붉은색 머리카락 끝이 잘려 나가 바닥에 툭 떨어졌다. 에카르트는 손에 검이 없더라도 이런 것쯤은 마력의 기운과 운용으로 간단한 공격을 한 것이다.
“한마디만 더 하면 그다음은 진짜 머리를 자르지.”
“에카르트.”
내가 이름을 부르자 그는 아차 하는 얼굴이 되었다.
“죄송합니다. 실망하셨습니까?”
“…아니에요.”
다른 사람을 아끼라고 부탁했을 뿐 무조건 참으며 살라는 뜻은 아니었다.
마검을 사용하거나 유혈 사태가 발생하지도 않았으니… 내가 당부한 내용도 잘 지켰고. 무엇보다 내게 미움을 살까 봐 걱정하는 모습이 그를 용서하게 만들었다.
“가요. 라멜은 전보다 더 정신이 나갔네요.”
“그래 보입니다. 개소리를 하도 많이 해서 머리에 과부하가 걸린 모양이군요.”
“사람 취급도 하지 말자고요.”
나는 에카르트의 손을 잡고 실라에게 따라오라고 했다.
***
에카르트는 고작 라멜 때문에 시엘리나의 사랑을 의심하고 싶지는 않았다.
“공작님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그저 동정하는 거예요.”
그러나 그 말은 마음 한편으로 들던 생각이었다. 처음에 시엘리나를 붙잡을 수 있던 이유는 저주 때문이었고, 곁에 있겠다는 대답 역시 자신의 감정을 호소해서 들었으니까.
그래서 라멜이 눈치채지 못할 만큼 미세하게 동요했다.
***
실라는 훌쩍이며 나를 창문도 없는 골방으로 안내했다. 여벌의 하녀복이 걸려 있고 가구는 단출한 거로 보아 그녀의 방인 듯했다.
그러다 문을 닫자마자 예고도 없이 실라가 내게 와락 안겼다. 그러자 에카르트가 못마땅하게 중얼거렸다.
“습관이 아니라고 하시더니.”
“안는 거요?”
“네.”
실라가 안겼잖아! 저 못마땅한 눈빛을 보아하니 이따 무엇을 요구할지 다 예상이 갔다. 실라는 곧 눈물을 삼키고 띄엄띄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해요. 아가씨는 백마법사가 되고, 크로덴 공작님과 교제하고, 여전히 멋지시네요.”
“뭘. 그런데 넌 왜 동방으로 안 갔어? 돈을 보냈는데 혹시 못 받았니?”
뭔가 사정이 있는지 실라가 에카르트의 눈치를 살폈다.
“괜찮아. 편하게 얘기해도 돼.”
실라는 조금은 무서운 듯했지만 침대 쪽으로 가 쭈그리고 앉았다. 그러더니 아래의 장판을 뜯고 종이 뭉치를 꺼냈다.
“아가씨. 이걸 읽어 주시겠어요?”
“이건.”
루솔릿 공작가의 장부와 어음 목록이었다. 장부는 곳곳이 비거나 숫자가 안 맞았고 어음은 갚지도 않아서 이자가 불어나 있었다.
“요즘 공작님께서는 리셀 부인의 외도를 감시하느라 가주 직은 완전히 내려놓으셨어요. 도련님은 연구에 빠져 가주 일에 소홀하고 보좌관들은 뇌물을 받고 모른 척하죠.”
내가 나가 있던 사이 공작령이 그렇게 엉망이 되었던가. 뭐라고 답할지 어안이 벙벙해진 사이 실라가 내 눈이 크게 떠질 만한 말을 속삭였다.
“저. 이전에 아가씨께 누명을 씌웠던 일, 가짜 증언이라는 증거도 찾아냈어요.”
“그것까지 말이야?”
“네. 언젠가 아가씨가 돌아오면 모든 걸 바로잡기 위해서요!”
“그런.”
“아가씨. 공작가의 가주가 되어 주시면 안 되나요?”
실라가 불쑥 무릎을 꿇고 말했다. 떠날 기회가 생겼는데도 나에 대한 충성심으로 남아서 모진 일을 겪은 실라를 생각하니… 차마 무조건 안 된다고 답할 수가 없었다.
나는 일단 실라를 진정시키며 일으키고서 말했다.
“실라. 아직 내가 정리할 게 많아.”
북부의 균열. 그리고 신전의 마법진.
그리고, 내가 이곳에 정착한다면 에카르트는? 그러자 실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곧바로 납득했다.
“제멋대로 무례한 부탁을 드려서 죄송해요.”
“…일단 방법을 생각해 볼게. 네가 그동안 수집한 자료가 무용지물이 되게 할 수는 없지.”
“아가씨!”
“이 상태로 공작가를 내버려 둔다면 많은 사람들도 피해를 입을 테고.”
“감사해요, 감사해요.”
실라가 두 손을 모으다가 문득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고 보니 왜 다른 하녀들과 달리 장갑을 끼고 있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손 다쳤어? 장갑 걷어 봐.”
“괘, 괜찮아요. 별로 크게 다친 것도 아니고.”
“그건 내가 판단해.”
나는 실라의 손을 잡고 장갑을 벗기자, 손등에 세 줄로 흉하게 붉은 선이 돌출되어 있었다.
손톱에 긁힌 흔적이었다. 누가 할퀴었을지 충분히 추측이 갔기에 실라는 눈치를 보다가 다시 장갑을 끼려고 했다.
“놔두면 흉져. 치료해 줄게.”
“…….”
나는 얼른 목걸이의 팬던트를 지팡이로 바꾸고 간단한 치료 마법을 걸었다. 뒤에서 에카르트의 한숨 소리가 들렸지만 나를 제지하려고 들지는 않았다.
“실라. 당장이라도 오늘 나와 함께 떠나는 게 좋겠어. 그리고 이 증거는 맡아 둘게.”
나는 그녀가 준 서류를 챙기기로 했다.
***
한편 다비온과 호위 마법사가 탑승한 마차도 루솔릿 공작령으로 향했다.
교역로 진행 상황을 보고받은 바. 공작령에 머물며 영지를 둘러보기 위해, 이동 마법진을 사용하는 대신 마차를 타고 왔다.
표면적으론 그런 이유였지만 다비온의 가장 큰 관심사는 두 가지였다. 에카르트와 시엘리나가 무슨 사고를 치지는 않을지, 혹여 블랑세에게 접근하는 남자들이 있는지였다.
‘블랑세.’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호위복을 입었는데도 달랐다. 하나로 단정하게 묶은 은발, 반짝이고 총명한 눈동자. 그녀는 시선을 잡아끌었고 고귀할 정도로 신비로웠다.
블랑세 역시도 같은 마음이었다.
‘다비온.’
시간을 거슬러서도 서로를 향한 마음이 짙게 남았기에 다비온 역시 기억하였겠지.
둘은 말은 하지 않아도 마차 안에서 무언의 애정을 주고받았다. 그러다 문득 블랑세의 눈빛이 예리해졌다.
“전하, 잠시 마차를 세워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이유를 묻지도 않고 다비온은 마부에 멈추라고 명령했다. 덜컹하는 소리와 함께 마차가 멈췄다. 마차를 호위하던 기사들이 외쳤다.
“황태자 전하, 2시 방향으로 마수가 출몰했습니다! 중상급 한 마리입니다.”
보고와 동시에 기사 하나가 즉시 마수를 해치웠다. 마수는 다리가 없지만 기어 다니며 바위를 짓뭉갤 정도로 무겁고 컸다.
다비온은 블랑세와 함께 마차에서 내렸다.
“한 마리뿐인가요?”
“그렇습니다, 전하.”
제국 내부는 대부분 마수를 토벌하여 마수와 짐승 사이의 경계가 애매할 정도로 약한 것만 남아 있었다.
‘그런데 중상급 마수라니.’
블랑세는 문득 불길함을 느꼈다. 주변에 균열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발자국을 확인하기 어려워, 마수가 어디서부터 왔는지 알 수 없었다.
만약 균열의 영향이라도 지하의 좌표는 전부 북부로 되었을 텐데. 어째서 루솔릿 공작령에….
‘좌표가 변경되었나?’
블랑세는 신전 지하를 다시 확인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리고 다비온만 들릴 정도로 조용히 속삭였다.
“전하. 잠시 신전에 다녀와도 될까요?”
“무슨 일….”
다비온은 에카르트의 경고가 생각났다.
“마수가 생겨나는 균열을 만들 정도로 위험하더군.”